몽골 제국과 러시아
게오르기 블라디미로비치 베르낫스키 지음, 김세웅 옮김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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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러시아'는 5권의 '러시아사 선집' 가운데 제 3권이다. 동유럽까지 이른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러시아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중세를 다룬 본 책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몽골제국을 읽는, 한국에서는 드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더욱이 저자는 일찍이 미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계급 프레임으로 짜여진 수정주의 시각의 현대 연구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교적 공정한 결과물이라고 보인다.  

러시아에 관심이 많아도 본 책이 재미있다고 감히 말하진 못할 것이다.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아 낯선, 러시아에 자리잡은 칭기즈칸의 후예들로 이뤄진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연대기는 정말 고역이었다. 유목민의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동방의 군주들이 틈만 나면 벌이는 권력투쟁과 전쟁들은 횟수가 너무 잦아서 사건의 개별 특성을 읽는데 결정적 장애가 된다. 차라리  니콜라스 라쟈놉스키의 '러시아의 역사'를 한번 더 읽을 걸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끙끙거리며 책을 붙잡았던 보람은 있다.   

'황금 오르다'는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오르다는 몽골 고유의 천막과 권좌를 말한다. 황금으로 치장된 오르다는 러시아를 통치하는 몽골의 권력을 상징한다. 볼가강 유역과 우크라이나를 점거한 황금 오르다는 북부의 모스크바를 사실상 속국으로 두는 강력한 체제였다. 저자는 1480년을 황금 오르다부터 러시아의 해방되었다고 말하지만, 알려진 바대로 러시아는 그 후로도 크림 반도에 잔존한 칸국과 더 나아가 오스만 투르크와 같은 동방세력과 수백년을 투쟁한다.  

흥미롭게도 황금 오르다는 생각만큼 독자적인 세력은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징기즈칸의 공식적인 후계자로서 중국을 통치할때는 물론 원이 멸망하고도 러시아의 몽골세력은 북경 혹은 카라코람의 제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에도 한때 명의 밑으로 들어갔던 티무르 제국까지 이어진다. 이에서 천문학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동방과 서방은 긴밀히 연결되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길의 완성은 몽골의 러시아에 대한 거의 영속적인 지배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러시아사의 일환으로 쓰여진 책의 의도에 반해 몽골에 관한 분량은 언뜻 과다해 보인다. 책의 반에 가까운 부분을 징기즈칸의 일생과 몽골이 팽창하고 몰락하는 연대기에 할애한다. 의아함은 책을 읽다보면 납득이 된다. 바로 몽골의 특성이 현재의 러시아를 형성하는 데 주요했기 때문이다. 서유럽과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전진한 러시아의 특성들, 전제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 한 지배체제는 몽골의 그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유럽의 방벽으로 버티었던 비잔틴 제국처럼 러시아 역시 몽골에 대항한 방벽으로 작용했다. 멸망에 이른 비잔틴 제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버텨내고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자연적 장애물이 전무한 드넓은 평원에서의 생존투쟁은 끝없는 완충지대에 대한 탐욕과 가혹한 착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로마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며 쌍두 독수리를 국가 문장에 박아넣은 러시아는 사실 몽골제국도 이어받고 있었던 셈이다.  

몽골의 영향력을 최소화했던 라쟈놉스키와는 다른 시각이다. 덕분에 난해함과 번역의 여러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유익했다. 틈날 때 마다 찾아보기 좋기에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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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가는 길 김원일 소설전집 6
김원일 지음 / 강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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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우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마두라고도 불리는 소설의 주인공은 자폐증을 안고 태어났다. 어느 정도의 사고와 기억은 가능하지만 언어로 이어지는 데에 곤란을 겪는 마두는 여차저차한 사연으로 정선의 산골을 떠나 전국을 떠돈다. 소설이 조명하는 시기는 구리에 자리잡은 이후이며 이전의 삶은 플래시백으로 맥락없이 끼여들며 인물의 정신이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폐 청년 마시우의 주먹 세계 체류기'. 소설 뒷면의 카피처럼 마두는 구리의 폭력조직에 든다. 하지만 마두는 사람을 때리지 못한다. 상황이 되면 우직하게 맞거나 눈과 귀가 밝은 재주를 부릴 뿐이다. 현실성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고 뒷통수 치는 바닥에서 자폐증을 앓는 성인이 버티겠다니. 시다바리도 어려울테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무리한 설정을 해뒀다. 마두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선한 구석이 남아있고, 마두가 묘하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마르게 굴다가도 마두 앞에만 서면 한켠에 두고 못한 말을 털어내고 머리를 기대며 내면의 안식을 찾으려 한다. 게다가 마두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지만 꽤나 준수한지 주변으로 여자가 줄줄 꼬이는 장면들에서 실소가 나온다.  

그렇다. '마당 깊은 집'과 '겨울 골짜기'의 여운에 여전히 젖어있는 나에게 '아오라지 가는 길'은 당혹스러웠다. 작가는 마지막에 '오늘의 장애인 문제와 순수한 자연'을 연결지어보겠다는 의도를 말한다. 언뜻 봐도 둘은 쉽게 짝지워질만한 소재는 아니다. 그래서 소설은 일관된 톤이 없이 오락가락한다. 시시각각 플래시백되는 마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생태주의자의 일장연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마두를 돕는 노경주는 정열적으로 사회 소수자를 돕는 여성인데, 마치 브나로드 운동을 하는 1930년대의 지식인처럼 그려져 우리 시대의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마두가 위치한 주요 배경인 어둠의 세계는 왜 그렇게 어설픈지 이원호의 쌈마이 소설이 생각날 정도였다.  

실망스럽다.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요소들을 왜 그렇게 억지로 끌어와야 했을까. 분단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현 시대와의 대화를 시도한 작가의 도전이 이렇게 맺어져서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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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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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할아버지가 일제 징용으로부터 가지고 온 사진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예술적 목적으로 찍은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어린 서양 소녀의 알몸 사진은 화자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열쇠로 작용한다. 또한 반정부 운동의 일환으로 파견된 암스테르담에서 발견한 비디오 테잎 속의 남성의 독백 역시 소녀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물건으로 과거를 짚어나가는 방식은 직전에 읽은 '원더보이'의 사이코메트리를 연상케 한다. 과거를 살았던 사람과의 대화가 아니라 그가 가졌던 물품이나 그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퍼즐을 맞춰나간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역시나 '원더보이'를 읽어나가며 문득 떠올렸던 인간의 본능,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빈 구석을 허구로 채워나가며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6월 항쟁이 노태우의 집권으로 물거품이 되는 상황에 좌절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는 화자의 경험이 거듭될수록 확장된다. 일제 식민지 아래서 살았던 할아버지 대부터 액자 소설의 형식에서 또다른 주인공으로 행세하는 강시우의 파란만장한 삶, 거기에 홀로코스트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이어지는 이국의 역사들. 많은 조각들은 정교하거나 두서없게 이어지며 전개된다.  

혼란할수록 메시지를 읽어내려 노력하는 독자의 특성상, 김연수의 본 소설은 많은 해석과 감흥을 만들어낼 것이다. 내 경우에는 표지의 소개가 맞다면 작가 또래이며 작가의 사고와 경험이 재배치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20세기와의 결별이라 읽었다. 한국사에서 20세기가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국가와 이념을 위해서 개인은 없었다. 오히려 대의를 위해 개인이 몸바치는 행동이 좌우 모두에게 영웅시되었던 당시는 돌이켜보면 참 야만적인 시대였다고 느껴진다.   

이러저러한 상념을 정리되지 않은 형태로 주절대고 싶지 않다. 작품의 메시지라고 믿는 극 중의 글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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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문제적 인간 1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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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그의 이름이 오늘날에 어떻게 불리워지고 있는가. 급진파, 음모가, 공포정치의 대명사. 흔히 극좌 위험인물로 낙인 찍기 위한 비유로 쓰이고 있다.  

작가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 책을 썼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제 연설과 편지의 대목들을 직접 수록하여 그의 사상과 심리를 짚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가 골방에서 지인들과의 음모로 권력을 획책한 것이 아닌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성장한 대중정치인이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급진파라는 오해 역시 루이 16세의 처형과 대프랑스 전쟁의 발발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앞세워 반박한다. 자코뱅의 한 갈래였던 산악파의 주요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점 역시, 당시를 공포정치로 끌고 갔던 산악파가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조직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이는 그가 독재자가 아니었으며 혁명으로 향하는 대중의 열정을 뒤따른 이들의 일부였음을 뜻한다.  

책은 로베스피에르의 전기이지만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바라본 프랑스 혁명사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1789년의 삼부회 소집부터 1799년의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까지를 말한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의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처형되므로 책은 혁명의 절반만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정국이 가장 뜨겁고 위태한 시기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므로 복잡다단한 혁명의 단계를 알기에는 본 책이 적절하다.  

이전까지 국가를 통치하고 지탱하던 왕정체제가 붕괴되고 온갖 혼란이 야기되었다. 국내 곳곳에서는 반혁명 반란이 일어나고 경제는 통제되지 못해 민중은 분노했다. 거기에 혁명을 짓밟으려는 강력한 외부세력들이 연합해 프랑스를 침공했다. 사면초가에서 혁명으로 이룩된 체제를 어떻게 수호했어야 할까. 격렬한 내부투쟁은 알려진대로 공포정치와 단두대로 상징된다. 한편으로는 혼란하고 위태한 당시 상황은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노선이 일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지의 혁명이었다. 본질은 10퍼센트의 부르조아지가 1퍼센트의 특권층이 가진 권력을 빼앗은 것이다. 상퀼로트라고 불리는 나머지 평민층은 결과적으로 부르조아지의 도구에 불과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에 서서 너무 좌측으로 비껴나가 역사의 흐름에 반했던 것 뿐이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나마 내걸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캐치프레이즈를 로베스피에르는 최후까지 품었으며 장렬히 산화했다. 때문에 논쟁적 인물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자코뱅주의자라며 자처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불꽃같이 살다간 인물치고는 드라마틱한 면은 부족하다. 실제로 사생활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을 빼면 무미건조한 그의 생애는 훨씬 나중에야 출현하는 마르크스주의 직업혁명가를 연상시킨다. 물론 로베스피에르의 강력한 옹호자인 작가는 이러한 면까지 찬양하고 있다. 

나라를 뒤엎고 머릿 속에서나 존재했던 이상향을 현실로 건설하려던 놀라운 인물이지만, 혁명가 1세대로서 많은 실책 또한 저질렀다. 정적이었던 당통을 처형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을 때 로베스피에르는 순진함에서 발로된 실책으로 명을 재촉했다. 물론 이 또한 독재자로 왜곡된 로베스피에르의 오해를 푸는 단면이다. 어쨌든 그 역시 한 인간이었을 뿐이였고, 역사는 목이 잘린 그의 시체 위로 야속하게 전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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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정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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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소년이 순식간에 실종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자친구의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반드시 자기 손으로 찾아올 것을 맹세한다. 물론 주인공의 이력은 범상치 않다. 특수부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수차례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면서 살인기계로 훈련받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가족애를 토대로 한 정의감에 불타는 건장한 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스릴러의 전형적인 설정이다. 뒷표지의 극찬에 반하는 뻔한 도입부에 기대가 급격히 사그라드는 와중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같은 동네에 사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와 아는 척을 하는 부분인데, 그 남자가 해리 보슈 시리즈의 주인공과 판박이다. 물론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묘사되는 외모와 주거환경은 누가봐도 해리 보슈다. 낯선 작품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의 등장은 흥분감을 안겨준다. 과연 의미심장한 복선일지, 마이클 코넬리에 대한 단순한 오마주일지.  

그러나 소설은 그저 그렇다. 냉정히 말하면 읽다가 구석에 처박히지 않을 정도의 재미다. 스토리의 밀도도 그렇고 특별한 반전이 없다는 것도 그렇다. 무엇보다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명확한 캐릭터가 없다. 앞서 많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본 작품이 시리즈임을 밝히는데, 매력이 전무하니 찾아볼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더구나 원문이 그런건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문장이 딱딱하고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때문에 글을 읽으며 머릿 속에 장면이 즉각 정렬되지 않는다.  

작가의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로버트 크레이스는 독서스케줄에서 잠시 접어둬야겠다. 오히려 잠깐 등장한 해리 보슈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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