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퍼러 1 - 로마의 문
콘 이굴던 지음, 변경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엠퍼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로마사에 남긴 카이사르의 거대한 발자취를 담아내기 위해 '엠퍼러'의 분량은 방대하다. 번역판 기준으로 6권의 본 소설을 나는 2권까지만 읽고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그렇듯이 고증과 각색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엠퍼러'는 정도가 심하다. 역사적 기록의 거의 전무한 카이사르의 유년기를 그린 1권은 그렇다치자. 본격적인 정치 군사적 행로에 돌입하는 2권부터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실제 폼페이우스의 업적이었던 지중해의 해적 소탕과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승리를 새파란 나이였던 카이사르에 몰아주고 있다. 마리우스와 술라나 킨나 같은 인물들을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죽음을 미루거나 다르게 구성하기도 한다. 압권인 것은 카이사르와 함께 자란 천한 태생의 마르쿠스가 사실은 공화파의 화신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는 게 은근슬쩍 밝혀지는 전개는 경악스럽다. 이는 잘난 척에서 우러난 지적이 아니다.  

차라리 실존인물의 행적은 두고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어떠했을까. 갈등을 조합해 흡인력을 유지하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 자체는 준수하기 때문에 좀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작법의 훌륭한 모범이 드라마 '로마'에 있지 않은가. 또한 현대인과는 결이 틀린 다른 고대 로마인의 정신세계 역시 시대를 설득력있게 채우고 있어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허나 장르적 즐거움은 역사소설이라는 범주를 배반한 각색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또한 과연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들여 책에 소비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괴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이 싫어서'는 제목 그대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나는 내용의 장편소설이다. 자유로움을 기대하며 떠나는 워홀러들처럼 주인공 계나 역시 과도하게 밀집되고 역동적인 한국 사회에 적응 못하며 결국 비행기에 오른다. 물론 계나의 행로는 100여 년 전의 후진국 이민자의 비참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괜찮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녔고, 결국에는 간절히 원하던 호주 영주권도 따내며 소설을 마무리된다. 사이에 조그만 좌절이 있기는 하지만, 지나서 회상하는 계나는 그것 역시 경험이며 유쾌한 소동 쯤으로 기억한다.  

나고 자란 조국을 성인이 되어서 홀로 떠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국과 다른 언어와 문화와 체계를 가진 나라에서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칭의 구어체로 씌여진 소설의 글들은 일상적이고 무심하기까지 하다. 우리 세대는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국가가 전쟁에 휩싸여있다거나 생명의 위협이나 굶주림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 있어서도 그럭저럭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조금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하는 과정이 죽느냐사느냐의 진지함으로 채색하지 않는 것은 본 작품의 강점이다. 국적을 옮기는 고민의 많은 부분을 독자에게 넘기는 작가의 선택은 무책임하다기보다 사려깊고 센스있다고 느껴진다.  

다만 여운있고 산뜻한 마무리에 되도않은 해설을 덧붙이는 것은 무슨 테러인가 싶다. 한국문학 출판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어디어디 교수이며 평론가 딱지를 단 현학적인 글로써 기분좋게 차차 채워갈 독자의 빈자리를 더럽히는 짓은 그만되기를. 

잘빠진 스릴러 '우리의 소원은 전쟁'으로 처음 만났던 장강명의 두 번째 작품은 낯설었다. 일상적이고 세련된 구어체로 거침없이 흘러가는 글이 딴판이어서 말이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작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던 타임스 세트 - 전2권
폴 존슨 지음, 조윤정 옮김 / 살림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던 타임스'는 작가의 견해가 사실을 압도하는 역사책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서서히 무너지던 20세기 초의 유럽부터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작과 끝을 그야말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20세기의 수많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표현 수위 역시 거리낌이 없다.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독창적인 평가들은 흥미로웠고, 그래서 유익했다. 일관되고 확고한 기준으로 다시 써낸 폴 존슨 식의 20세기는 역사에 관심이 깊을수록 더욱 눈을 잡아끌 것이다.  

다만 본 책은 비판적으로 읽어야한다. 아무리 폴 존슨이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거대한 시간을 막힘없이 읊는다고 해도, 그 역시 한 인간의 견해일 뿐이다. 작가의 글에 글자 그대로 경도된다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으로 철없이 우쭐할 위험이 크다. 그래서 '모던 타임스'를 읽는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반공- '모던 타임스'에서 폴 존슨은 영락없는 반공주의자다. 반공의 이유를 공산주의가 가진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벗어나는 이상주의가 극단으로 흘러갈 때 동반하는 여러 폐해 때문이라고 나는 읽었다. 지난 체제와의 철저한 분리를 위해 계급을 나누어 살육을 저지르게 되고, 과정의 효율을 위해 일인 독재로 밖에 흘러갈 수 없다는 점을 폴 존슨은 특히 주목한다. 때문에 파시즘의 탄생을 레닌에서부터 찾는 작가의 견해는 새롭지만 설득력 있었다. 비인간적인 전체주의의 전통과 수법은 이미 레닌과 그 일당이 고안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그들의 동맹이었으며 제자에 불과하다는 작가의 설명이다. 

제국주의- 폴 존슨을 이미 100여 년 전에 사멸한 제국주의로 묶는 것은 너무 좌파적인 것일까. 허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해서 폴 존슨의 하나같은 해법은 당사자들이 너무 늦게 개입했고, 유약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실질적인 무력의 힘을 믿는다. 힘을 가진 강대국이 자국과 주변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비극이 일어났다고 풀이한다. 그런 그의 이론은 갓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빈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식민지 시절까지 올라가는 근원적인 설명보다는 서구 국가들과 아프리카 동맹의 유약함이나 도덕적 부채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정치공학 일변도의 서술은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 못했다. 

반동- 급진적인 변화를 혐오하는 작가의 뉘앙스는 책 곳곳에 깔려있다. 책의 서두에서 다원주의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에 부셔지며 20세기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의식의 변화를 원인으로 두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것이 아닐까. 더구나 살육은 인간문명사 전체에 수놓아져 있다. 같은 맥락에서 20세기의 학자들과 학문의 상당수를 불신한다. 레닌에 의해 세상에 구현된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구조주의나 해체주의같은 현대철학의 발흥을 폄하한다. 글의 논조는 이런 이상주의적인 이론가들이 세상의 중심에 선 결과로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이다.  

동시대를 읽는 한계-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나는 개인은 동시대를 온전하게 읽어낼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책을 고를 때에도 가급적 그런 기준에 따르곤 했다. 1991년에 출판된 본 책 역시 다르지 않다. 20세기 전반까지의 기술은 대단한 명작이다. 앞서 말한 파시스트와 소련을 짝지운 것이나, 인물들에 대한 거침없는 평가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 번뜩이던 통찰력이 사라진다. 더구나 레이건과 대처를 칭송하는 단락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 고개가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자유시장경제의 추종자인 작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나, 1980년대의 보수화가 즉효는 있었으나 부작용을 당시 폴 존슨은 목격하지 못했다.  

키워드까지 들며 늘어놓은 민망한 글은 세계적인 작가와 감히 맞서보겠다는 치기는 아니다. 비판적 책읽기를 위한 학습의 일환일 뿐이다. 본 책과 함께 한 시간은 즐거웠다. 폴 존슨의 퀄리티높고 독창적인 저술은 그의 세계관이 나와 반대편에 있지만 충분히 존중할 가치가 충분하고 일부는 경외롭기까지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소원은 전쟁
장강명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김씨 세습 체제가 붕괴한 가까운 미래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권력의 공백을 북한 과도 체제와 한국군이 주축이 된 국제 연합군이 메꾸는 혼란 속에서 소설은 전개된다. 가상이지만 허무맹랑하지 않다. 현재 우리 정치체제와 사회의 문제적 징후가 갑작스런 통일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터져나오는 문제점들이 소설에서 설득력있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한국 장르소설에 편견이 있던 나로서는 탄탄한 토대 위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존재감과 꼼꼼한 디테일에 조금 놀랐다. 감성적이지만 이제는 촌스러운 한국적인 클리셰에 쉽게 굴복하던 스토리는 나를 한동안 한국 작가의 글에서 멀어지게 한 이유였다. 엘리트 군인 출신의 사나이들이 주축이 된 흥미로운 스토리가 그저그런 작가에게 쥐어졌다면 결과물은 야설록이나 이원호 류의 마초적 활극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덫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제 갈 길을 걸은 작가에게 경배를.  

다만 읽으며 왠지모를 기시감에 빠졌다. 의문은 끝머리의 후기에서 풀린다. 한국적인 특수한 배경 설정 외의 인물간의 장르적인 문법을 '잭 리처' 시리즈와 '개의 힘'에서 가져왔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작가에게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된다. 참고한 소설들이 내가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거니와, 흡족한 결과물의 공을 타인의 작품임을 밝히는 솔직함과 덕분에 한국 장르소설의 폐해를 벗어난 유연함은 다른 작가도 닮아야 한다. 장강명을 검색해보니 이미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하긴 이 정도 퀄리티의 글을 생산할 정도라면 이미 무명일 수가 없을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
그레고리 클라크 지음, 이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식량이 증산된다면 인구도 그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거라는 주장을 한 '인구론'의 저자, 신부이면서 산업혁명기의 고전경제학자. 이 정도가 책을 들기전에 맬서스에 관해 알고 있던 나의 단편적인 지식이었다.  

그레고리 클라크는 '인구론'을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를 읽어내는 패러다임으로 가져온다. 생산성이 증가하면 인구는 늘어나지만 총량은 그대로이기에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적어지고 더더욱 빈곤해지는 '맬서스 트랩'은 1800년 이전 내내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저자는 인류가 정착한 이후부터 산업혁명 이전의 시기를 아예 '맬서스 시대'라고 통칭한다.  

맬서스의 주장을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얼마나 잔인한가.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을 유지하기 위해 인구조절을 해야하고, 때문에 하위계층을 고립시키고 빈곤에 빠뜨려 단명시키자는 그의 관점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산업혁명 이전 혹은 산업혁명이 한창인 시기까지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맞았다. 생산의 총량을 증가시킬 혁신이 없는 상태에서 인구만 증가한다면 결국에는 체제의 후퇴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저자는 중국과 인도의 예를 들며 동서양의 힘의 역전을 그런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의도이자 독자를 책으로 끌어들이는 요인은 산업혁명이 왜 하필 그 시기의 영국에서 일어났는가이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분명한 이유가 규명되지 않은 문명사의 수수께끼를 저자는 맬서스를 빌어 풀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 책에서도 분명한 답은 없다. 분분한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약간은 다른 저자의 의견을 말미에 붙여놓은 정도랄까. 구텐베르크가 촉발한 인쇄혁명으로 인한 지식의 보급에서 비롯된 개인의 노동생산성 향상에서 찾는 저자의 주장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맞닿아 있다. 즉 정체구간이었던 수천 년의 완만한 누적이 1800년에 이르러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본 책은 오히려 저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썼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경제학이란 학문이 무엇이며, 오늘날에 각광받는 경제학자가 과연 자신의 학문으로 세계에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랄까. 맬서스가 파격적인 이론으로 자신의 시대와 과거를 설명하며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저자가 속해있는 경제학이 현 시대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아니 설명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일종의 자숙 내지 반성이 수록된 책의 말미는 산업혁명에 관한 설명만큼이나 핵심적이다.  

책에는 많은 그래프와 도표들이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수록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본 책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결국에는 숫자보다는 인간사에 관한 것이라고 저자 자신에게 되새기는 일환이었다고 책의 끝맺음을 읽으며 깨달았다.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움직임에 대한 경이와 감탄에서 시작되어 학문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감동으로 맺는 흐름은 단순히 지식을 전하거나 과시하기 급급했던 같은 분류의 책들 사이에서 단연 기억에 남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