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 소나무 3 김원일 소설전집 12
김원일 지음 / 강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울주군의 지주이자 명망높은 양반 백하문의 죽음이 1910년의 경술국치와 맞물려 소설은 시작된다. 시대의 종말은 새로운 세대의 시작이다. 조선 말의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백하문의 차남 백상충은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백씨 집안의 종이었던 석주율은 백상충의 사사를 받아 스승의 뒤를 따른다. 그 사이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소설의 주요무대인 동남지방에 밀어닥친다. 기존에 칭송받았던 가치들은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천민들은 기회를 잡았고 백씨 집안은 영락한다.  

암울한 시대 배경이 명확할수록 무거운 도입부는 20세기 초중반을 다룬 한국 대하소설의 전형이다. 작가의 글솜씨에 빨려들어가면서도 극중 인물들이 어디로 도달할지 대충은 짐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석주율이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자 소설의 상투적인 첫인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석주율은 백상충의 은혜를 받아 뒤늦게 까막눈을 면하며 일본제국의 부당한 식민지배에 반항한다. 그러나 석주율의 길은 일반적인 경로와 달랐다. 타고난 부드러운 천성은 자신의 내면으로 고민을 가져왔다. 불가에 귀의했고,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옥살이도 하였고 만주에서 나라잃은 동포의 설움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도달한 길은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행동이었다.  

석주율은 비폭력을 끝까지 견지한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항거하지만 수단은 늘 비폭력이었다. 단식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며 고문당하며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으며 사람들의 감응을 얻어냈다. 컴컴한 토굴의 독방에서 죽다 살아나오는 장면이나 부산의 달동네의 비참한 사람들을 돕는 데에서 부처와 예수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일본제국에 맞서서 비폭력을 설파하는 석주율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하다. 극에서도 석주율은 조소의 대상이 된다. 군사적인 대항을 말하는 독립운동가 눈으로 석주율은 일제와 타협한 온건주의자거나, 친일파에게는 미련하고 고지식한 몽상가로 보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석주율의 사상의 종착지가 과연 어디일까에 대한 궁금함은 긴긴 이야기를 붙잡게 했다.  

폭력과 인습의 굴레에서도 꿋꿋했던 석주율의 행적은 그야말로 초인적이다. 목숨을 잃을 위기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냈던 그가 과연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석주율이라는 인물에 나마저 감화되는 것은 그도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시험받는 석주율의 내면 묘사는 소설의 백미이다. 육욕과 명예와 안락함에 대한 끌림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평범한 작가라면 비범하고 타고난 내면적 특성이나 외부적 요인으로 이겨내는 과정을 채택했겠지만 김원일은 대하소설의 주인공으로는 특이한,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석주율을 통해서 극복해나간다. 인간적인 고뇌의 단계를 밟아 성장해 성인으로 거듭난 석주율은 자체로 매력적인 인간이지만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한반도의 민중의 은유로도 훌륭히 기능한다.  

이제는 고리타분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대하소설임에도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많은 경험을 통해 시대를 개인의 내면으로 함축되는 과정은 기존의 이념적 틀에서 벗어나있어 더욱 새로웠다. 시대가 인간을 만들고 그런 인간이 시대를 바꾸는 피드백은 종교적이고 현대적이다. 분단을 테마로 대표작을 써낸 김원일은 현재를 배경으로 한 몇몇 글로 자신의 태생에서 비롯된 주제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흡족하지 못했다. '아우라지 가는 길'이나 '가족'이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늘푸른 소나무'는 문학적 한계 극복은 물론이고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노든 게이트 - 세기의 내부고발
글렌 그린월드 지음, 박수민.박산호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년 12월 1일, 기자인 글렌 그린월드는 '킨키나투스'라는 이름으로 보낸 이메일을 받는다. 중대한 내용을 제보하겠으니 그에 맞는 보안프로그램을 깔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반신반의에 의한 몇개월의 씨름 끝에 그린월드는 홍콩으로 날아가 제보자를 만난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연의 시작이다.  

그린월드와 만날 당시 29살에 불과했던 스노든은 911 테러를 목격하고 육군에 입대한 평범하고 애국적인 청년이었다. 고교를 중퇴했지만 컴퓨터를 다루는데 재능이 있었던 스노든은 전역 후 CIA와 NSA를 거치며 기술직 관리자로 출세길을 달렸다. 그러나 스노든은 자신의 일을 회의했다. 증거가 될 데이터를 문서화해서 빼돌리며 내부고발자로서의 준비를 차곡차곡 시작했다.  

그린월드와 스노든이 접선하고 인터뷰하며 그 결과가 가디언지에 실려서 세상에 알려지는 과정은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국가의 치부를 드러낼 치명적인 비밀을 품은 두 남성이 감시를 피해 동분서주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영화다. 영화 '컨버세이션'부터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까지, 가공의 인물들은 감시에 편집증적이다. 하지만 스노든의 폭로로 현실로 드러났듯이 국가의 손길은 전지전능했으니 편집증적인 불안은 과대망상이 아니었다.  

스노든의 폭로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안보국NSA는 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국방부 소속의 연방 기관으로 이전에는 암호 해독을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과 안보 환경의 급변은 NSA를 보다 강력하게 재탄생시켰다. 911 테러 이후 만들어진 '애국법'은 국가에 의한 감시와 감금의 대규모 확대를 합법화했다. 안보를 위협하는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 NSA가 택한 접근은 유무선을 통한 시민의 모든 소통을 저인망식으로 긁어 오는 것이다. 헌법에 불특정한 시민에 대한 감시는 영장이 필요함을 명시함에도 NSA는 안보를 빌미로 초법적인 기관으로 군림했다.  

이를 진영의 틀로 보면 곤란하다. 부시 행정부에서 시작된 NSA의 전횡은 정권이 바뀐 후에 바로 잡히기는커녕 심화되었다. 많은 이가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라 믿었던 버락 오바마 역시 부시와 다름없었다. 더욱이 NSA의 활동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을 뜻하는 '파이브 아이즈'의 협조를 받고 공유되었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흔히 인권을 가장 보장하는 민주적인 체제라고 인식되는 국가마저 개인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침범하고 있었던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스노든의 폭로를 보며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개인이 모여 국가를 이루고 국가는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자유와 안전을 위한 규율은 적절한 타협점을 찾음으로서 양존했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적 환경과 발전된 과학으로 둘러싸인 일상으로 인해 타협점은 위태위태해졌다. 

유투브를 로그인 할 때마다 내 취향의 동영상을 배치해주는 인공지능을 보며 편리해진 기술의 발달을 신기해하면서도 접속기록을 체크한 빅데이터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손과 눈이 휴대폰으로 항시 향해 있으며 GPS와 카드결제와 CCTV로 생활패턴이 명명백백해졌다. NSA는 애플과 구글 등의 세계적인 기업의 백도어를 통해 세계의 거의 모든 개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안전을 보장해주는데 왜 조그만 사생활침해를 문제삼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책을 보면 서구의 시민 인식도 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의 무차별적인 도청과 감청이 안보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고 한다. 더구나 이러한 추세가 계속 된다면 정말로 '1984'의 오세아니아가 조만간 현실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최근 중국이 모든 국민을 분류하고 등급화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지 않는가. 농업화가 자유로운 수렵채집인들을 노예화한 문명의 시작을 떠올려보면 기술의 발달은 자유의 신장과 별개였다. 

단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은 미국이 저 정도라면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떨까. 워낙에 당면한 문제가 많기에 스노든이 던진 화두는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고민해봐야 한다. 절대권력에 대한 문제제기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구질구질하지만 비밀로 남겨둘 수 있는 혼자만의 영역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것이며 건전한 사회의 토대가 붕괴되는 시작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입양아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인 카밀라는 친어머니의 오빠가 예전에 보냈다는 편지를 단서삼아 카밀라는 한국으로 떠난다. 강을 거슬러오르는 연어처럼 뿌리를 찾는 이방인의 이야기인듯 했던 이야기는 중반부터 예상 외의 전개로 빠진다.  

한참을 읽다가 알게되었지만 소설은 카밀라가 아니라 카밀라의 어머니 정지은에 관한 것이다. 여태껏 읽은 김연수의 글들이 그렇듯이 본 소설 역시 1980년대 후반 어딘가에 걸쳐 있다. 남해안 어느 곳을 따온 가상의 진남시에서 여고생 정지은은 카밀라를 낳고 바다로 투신자살한다. 미성년자가 임신한 사건의 흐름은 대충은 짐작이 가능하다. 지방 소도시 특유의 닫힌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 그렇듯이 최종 희생자는 여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문학소녀였던 정지은의 자살은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의 아버지가 친오빠였다거나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이었다라는 주민들의 무정한 카더라는 카밀라가 찾아온 20여년 후의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쉬쉬할수록 잊혀지기 힘든 기억의 역설은 화자를 바꿔가는 소설의 구조로 표현된다. 카밀라의 아버지로 간주되기도 하는 정지은의 선생님, 정지은을 질투하고 죽음으로 내몬 정지은의 친구, 그리고 카밀라의 생물학적인 아버지. 이들에게 정지은의 죽음은 덮어둘 망정 결코 치워버리기 불가능한 짐이었다.  

정지은에 앞서 1930년대에 호주인 선교사의 어린 딸의 죽음이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서양식 주택에서 일어난 이방인 소녀의 무덤은 정지은과 마찬가지로 기괴한 인상을 남겼다. 기억하는 이들은 죽고 소문은 희미해져 전설과 괴담이 되어 고장을 떠도는 과정의 동력은 죄책감일까, 호기심일까. 소설 초반 카밀라가 관광하는 열녀문을 다시 떠올려보면 입을 거치고 시간에 묵혀 살이 붙는 조선시대 민담의 근원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지은은 안타까운 생의 마감에도 불구하고 한이 서린 민담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다. 중간마다 딸을 자신의 흔적을 따라 최종적으로 카밀라의 아버지에게로 안내하며 이야기를 종결한다. 죽은 지은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소설의 장치는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교묘하고 자연스럽다. 지은의 목소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지만 진실을 드러내는 세월이나 뿌리를 찾는 카밀라의 열망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말한 민담의 맥락에서 보면 한스럽게 죽은 여인의 혼이 새로 부임한 사또 앞에 나타난 격이라고도 보인다.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조선시대 민담의 비틀기로도 보이는 소설의 전체적인 인상은 김영하의 '아랑은 왜'와 유사점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로맨서 환상문학전집 21
윌리엄 깁슨 지음, 김창규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이버펑크 개념을 정립시켰다는 고전 '뉴로맨서'를 읽었다. 하지만 세계관을 이루는 기본적인 개념은 즉시 이해되기 힘들어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조차 벅찼다.  

제대로 읽은게 맞다면 윌리엄 깁슨이 1984년에 상상한 인터넷은 현재의 VR에서 더 나아간 형태와 유사하다. 머리에 부착된 전극으로 접속되는 '사이버스페이스'는 '사이버스페이스 데크'라는 도구를 통해 시각화된다. 극의 인물들은 사이버스페이스 데크를 통해 현실과 다름없는 가상현실 속에서 활동한다.  

소설의 주인공 케이스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정보를 캐내는 해커지만 비윤리적인 행위로 사이버스페이스 접속을 차단당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 그에게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 들어온다. 특정한 물건을 얻어온다면 접속불가를 해제해주며 거액의 보상을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케이스는 몰리를 동료로 얻고 사선을 넘나들며 목표로 나아간다.  

세계 곳곳과 우주를 넘나들며 케이스가 얻어야하는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케이스를 선택하고 일을 의뢰한 막후는 인공지능 '윈터뮤트'였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윈터뮤트가 원했던 것은 소설의 제목이자 윈터뮤트의 반대편에 서있는 또다른 인공지능 '뉴로맨서'였다. neuromancer는 신경 세포를 뜻하는 neuron과 점성술사 mancer가 합친 신조어이다. 생명을 제어하는 뉴로맨서를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윈터뮤트가 원했던 이유는 자명하다.  

윈터뮤트와 뉴로맨서. 양자의 결합은 새로운 신의 탄생일까. 이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처럼 인간에 적대적인 기계문명이 아니다. 가상현실에서 태동한 새로운 자의식의 탄생을 그저 담담히 지켜볼 뿐이다.  

장황하게 끄적거린 이상의 글은 익숙해지지 않는 소설의 구도와 개념을 이해해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마니아들에게 칭송받는 소설의 명성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해 유감이다. 나에게 '뉴로맨서'는 마치 작품성 순위의 상위권에 있는 테크니컬한 고전영화를 시청하는 것과 같다. 장르 내 역사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보면 당시 첫 출현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혁신적 개념들이 시시하게 보이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수전 바턴은 딸을 찾아 브라질로 왔다가 선상반란으로 이름모를 섬에 표류된다. 구사일생한 수전은 흑인을 만나고 그의 주인인 봉두난발의 백인과 마주친다. 익숙한 '로빈슨 크루소'의 서사에 예정에 없던 여인이 끼어들게 된 전말이다. 이야기는 평행우주의 다른 곳으로 흐른다. 본래 프라이데이와 유럽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크루소는 구조선에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크루소의 자리는 수전이 채우게 되었다.   

'로빈슨 크루소'를 현대의 시각으로 다시 썼다는 점에서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떠올렸다. 야성으로 한없이 침잠하던 재해석된 크루소에 집중했던 투르니에와는 달리 쿳시의 소설에는 크루소가 없다. 구조되어 영국으로 온 낯선 조합의 두 남녀가 있을 뿐이다. 백인여성과 흑인남성. 16세기의 영국에서 이들은 대단히 낯선 조합의 커플이었다. 다만 커플이라 함은 둘이 가까이 있는 모양만을 말하는 것이다. 프라이데이는 크루소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노예상태에 놓여있기에 인간보다는 가축에 가깝게 묘사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에서 따온 '포'에게 수전이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은 희미하고 무기력하다. 끝내 찾지 못했던 딸이 눈 앞에 나타나는 부분에 이르면 생활고와 주변의 질시 때문에 미쳐버린게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든다. 그러나 읽을수록 소설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혀가 잘리고 거세되고 짐승으로 전락한 프라이데이와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여성과 프라이데이를 감당못하는 무기력한 지배자의 지위를 동시에 떠맡은 수전의 행적을 보며 '로빈슨 크루소'를 되짚게 된다.  

원전의 로빈슨 크루소는 서구의 가치가 응축된 상징이다.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야생의 자연과 맹렬히 싸워나간 투사이며, 한편으론 항상 기도하며 나태함을 경계했던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좁은 구세계를 떠나 신대륙과 아시아로 왕성히 뻗어나가던 서구인의 특질을 고스란히 투영시킨 디포의 소설은 일종의 선동이며 자기확신이었다.  

'포'를 근대의 이성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환이라 보면 될까. 더 나아가 작가의 프로필을 가져와보자. 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했던 남아공에서 그가 자라며 목격했을 그림을 상상해보면 글의 시작과 끝을 능히 가늠해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