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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입양아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인 카밀라는 친어머니의 오빠가 예전에 보냈다는 편지를 단서삼아 카밀라는 한국으로 떠난다. 강을 거슬러오르는 연어처럼 뿌리를 찾는 이방인의 이야기인듯 했던 이야기는 중반부터 예상 외의 전개로 빠진다.
한참을 읽다가 알게되었지만 소설은 카밀라가 아니라 카밀라의 어머니 정지은에 관한 것이다. 여태껏 읽은 김연수의 글들이 그렇듯이 본 소설 역시 1980년대 후반 어딘가에 걸쳐 있다. 남해안 어느 곳을 따온 가상의 진남시에서 여고생 정지은은 카밀라를 낳고 바다로 투신자살한다. 미성년자가 임신한 사건의 흐름은 대충은 짐작이 가능하다. 지방 소도시 특유의 닫힌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 그렇듯이 최종 희생자는 여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문학소녀였던 정지은의 자살은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의 아버지가 친오빠였다거나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이었다라는 주민들의 무정한 카더라는 카밀라가 찾아온 20여년 후의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쉬쉬할수록 잊혀지기 힘든 기억의 역설은 화자를 바꿔가는 소설의 구조로 표현된다. 카밀라의 아버지로 간주되기도 하는 정지은의 선생님, 정지은을 질투하고 죽음으로 내몬 정지은의 친구, 그리고 카밀라의 생물학적인 아버지. 이들에게 정지은의 죽음은 덮어둘 망정 결코 치워버리기 불가능한 짐이었다.
정지은에 앞서 1930년대에 호주인 선교사의 어린 딸의 죽음이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서양식 주택에서 일어난 이방인 소녀의 무덤은 정지은과 마찬가지로 기괴한 인상을 남겼다. 기억하는 이들은 죽고 소문은 희미해져 전설과 괴담이 되어 고장을 떠도는 과정의 동력은 죄책감일까, 호기심일까. 소설 초반 카밀라가 관광하는 열녀문을 다시 떠올려보면 입을 거치고 시간에 묵혀 살이 붙는 조선시대 민담의 근원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지은은 안타까운 생의 마감에도 불구하고 한이 서린 민담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다. 중간마다 딸을 자신의 흔적을 따라 최종적으로 카밀라의 아버지에게로 안내하며 이야기를 종결한다. 죽은 지은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소설의 장치는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교묘하고 자연스럽다. 지은의 목소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지만 진실을 드러내는 세월이나 뿌리를 찾는 카밀라의 열망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말한 민담의 맥락에서 보면 한스럽게 죽은 여인의 혼이 새로 부임한 사또 앞에 나타난 격이라고도 보인다.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조선시대 민담의 비틀기로도 보이는 소설의 전체적인 인상은 김영하의 '아랑은 왜'와 유사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