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이야기꾼 피에르 르메트르의 신작소설을 만나보았다.
전작인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에 이어
3부작의 마지막인 신간인 <우리 슬픔의 거울>이다.
끔찍한 전쟁의 참혹함을 잘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 내면의 깊은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인물’에 주목하며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
루이즈, 라울, 가브리엘, 데지레, 페르낭이란 인물들이
전쟁을 둘러싼 다양한 여정들을 걸어가고 있다.
카페 종업원인 루이스는 나이 든 의사에게서
단지 옷만 벗어달라는 매춘의 냄새가 나는 제안을 수락하고
호텔방에서 옷을 벗게 되는데,
순간 의사는 준비한 총으로 자살을 하게 되고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카페 주인 쥘 씨를 통해 숨겨진 사연을 듣게 되며
라울이라는 이복 동생의 행방을 찾아 나서게 된다.
전시 상황에서 군인인 라울과 가브리엘은
뭔가 어긋나 보이는 이 둘의 조합이 위태로워 보이긴 했는데
온갖 부정한 행동을 일삼으며 악행을 저지르다
탈영병 신세를 지고만다.
작품 속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인 데지레.
변호사와 공보관, 신부님으로 신분을 계속 바꿔가며
사기꾼의 면모를 보이지만 뭔가 캐릭터가 묘하게 끌리면서 정의롭게 느껴진다.
성자의 길을 걷게 되는 데지레의 모습은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함이 묻어나지 않는 신부의 모습을 잘 소화하고 있다.
헌병 대원 페르낭 역시 의문의 가방을 얻게 되어
운명의 수레가 쉼없이 굴러가게 된다.
부유한 이들의 탈출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군복 차림의 병사, 농부, 민간인, 장애인 들이
뒤섞인 잡다한 무리를 이루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한 시청 차량에 탄 어느 유곽의 매춘부들, 그리고 양 세 마리를 몰고 가는 목동 등
도로 위엔 그야말로 온 백성이 모여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겨울이 된 거래한 장례 행렬이었다.
p458-459
주여! 당신은 우리 육신의 양식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의 양식도 주시나니,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가 타인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너무나 다른 타인을,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 타인을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마음을 열어 주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우리 마음을 열도록 도와주십니다.아멘!
p588
전쟁의 무자비함 앞에서 생존에 굴복하고 악탈과 만행,
권모술수를 일삼는 모습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선과 악은 공존한다 했던가.
타락한 인간 본성과 공권력의 압박, 피난길 속에서의 혼란스러움.
그렇지만 서로 연대해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간의 온정을 발견하고
각기 다른 인물들이 묵묵히 걸어가는 여정들을 살피다보면
흩어진 희망을 하나로 모으는 불씨를 발견하는 묘미가 있다.
전쟁이란 소재 자체가 주는 비극과 공포,
무거운 분위기를 걷어낼 수 없겠지만,
그 속에서도 유머를 던지는 가벼운 농담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어
특유의 매력이 묻어나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사람을 통해 희망이 피어나는 모습은
절망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어서 감격하게 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애는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아프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