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정신이 요약된 인권선언은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다고 선고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되며, 체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 신변확보에 필요치 않다고 보이는 모든 가혹 행위는 법에 의해 엄격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명시했고, 아울러 "엄격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필요한" 만큼만 형벌이 허락된다는 원칙이 생겼다.

로익 바캉의 『가난을 엄벌하다』(시사IN북, 2010) 를 추천한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에서는 복지정책이 쇠퇴하게 되고 실업자는 증가하는 반면 실업수당과 같은 전반적인 사회 안전망은 파괴된다. 복지정책의 쇠퇴는 사회 전반에 혼란과 무질서를 부채질하는데, 이때 국가는 자신이 파괴한 복지정책이 불러온 혼란과 무질서를 다잡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가 파고든 나라에서는 형벌주의가 강화되고, 죄수가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야만적 불평등』
조너선 코졸, 문예출판사, 2010

교육은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출발선을 같게 하여,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가난한 수재’가 ‘뜨거운 아이스크림’과 같은 형용모순이 된 지 오래인 한국에서 그 말을 곧이들을 사람은 없다.

유리창이 모두 깨지고 천장에서 비가 새는 교실, 비가 오면 식당과 교실이 침수되거나 운동장이 아예 없는 학교, 책이 없는 학교 도서관, 휴지와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 실험 도구가 하나도 없는 과학실, VCR이 한 대도 없는데다가 책·잡지·테이프가 필요하면 교사가 직접 사야 하는 학교, 선생이 사용할 분필이 바닥난 교실, 교과서가 없는 학생들, 학습 부진아로 가득한 교실, 한 학기 내내 교실에서 잠만 자는 교사, 돈을 절약하기 위해 고용한 임시 교사들, 50퍼센트도 채 졸업하지 못하는 도심의 공립 초·중·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겨우 2~3명만 대학에 진학하는 고등학교.

어떻게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의 교육 현장일 수 있을까?

도심의 빈민 거주지가 아닌 부유층의 거주지나 교외의 사립학교는 사정이 다르다. 거기엔 대입에 필요한 학문적 과정은 물론이고 음악·미술·연극 등에 대한 강좌가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고, 라틴어 강좌를 비롯한 6개의 외국어 강좌가 있다. 그밖의 선택과목으로 문학·항공학·형사재판·컴퓨터 언어 등이 있고, 미국연방통신위원회의 인가를 받은 텔레비전 방송국도 운영한다

과연 공립학교들끼리의 교육 평등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대학의 몰락』
서보명, 동연, 2011
『대학 주식회사』
제니퍼 위시번, 후마니타스, 2011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
클라이드 W. 바로우, 문화과학사, 2011

연초에 차례로 출간된 클라이드 W.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 서보명의 『대학의 몰락』, 제니퍼 워시번의 『대학 주식회사』는 모두 시장과 기업의 하수인이 된 지 오래인 미국의 대학을 다루고 있다.

탐사 기자가 쓴 『대학 주식회사』는 기업이 대학의 학문적 자유를 어떻게 자신의 이익에 맞게 유린하는지를 풍부한 사례로 설명한다.

신학자가 쓴 『대학의 몰락』은 낮고 묵시록적이다. 인문학적 성찰(패배에 대한 성찰!) 이 돋보이는 이 책은 전자와 달리, 중세의 교회(신학) 와 결별하면서 태어난 대학은 애초부터 국가나 민족이라는 세속적 가치와 거리를 두지 못했고, 국가나 민족이 효력을 잃자 기업과 밀착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대학의 몰락』은 그 시기를 1980년대 중반으로 보며, 전자가 원인을 외부에서 찾은 것과 달리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런 차이의 원인은 부실한 르뽀가 그렇듯이 『대학 주식회사』의 지은이도 미국 대학의 기업화를 현상적으로만 파악하고자 할뿐, 정치적이거나 이념적 분석을 극구 피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몰락』에 따르면 미국 대학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게 된 시발점은 보수적인 시사주간지 『US 뉴스 앤 월드 리포트』가 ‘전국 대학 순위평가’를 처음으로 발표한 1984년부터인데, 이 책의 지은이는 그 배경을 보수 세력의 좌파 척결과 연관 짓는다

해마다 대학 평가 결과를 발표하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를 소개한다. 이 책은 ‘기업자유주의와 미국 고등교육의 개조 1894~1928’이라는 부제가 가르쳐주듯이, 미국 대학의 기업화가 거의 100년 전에 완수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매는 없다』
엘리스 밀러, 양철북, 2005

2000년 9월, 독일 연방 의회는 교사뿐 아니라 부모의 체벌권 마저 단호히 박탈했지만, 똑같은 시기에 미국의 23개 주에서는 여전히 교사의 체벌을 허용한다.

어떤 보고서는 프랑스의 부모 80퍼센트가 육체적 폭력을 교육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폭로한다. ‘너 더 잘되라’는 뜻에서 행해진다는 체벌. 과연 그럴까?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 6~8)

『엑소더스』
무라카미 류, 웅진닷컴, 2001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1999
『내일은 도시를 하나 세울까 해』
O.T. 넬슨, 뜨인돌, 2007
『나무공화국』
샘 테일러, 김영사, 2006

무라카미 류의 『엑소더스』는 짧게 요약하면, ‘일본에는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열네 살짜리 중학생들이 집단 등교거부를 거쳐 홋카이도에 ASUNARO라는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드는 이야기이다.

『파리대왕』은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다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소년들이 주인공이다. 핵전쟁이 벌어지려는 순간, 영국 정부는 한 떼의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워 안전한 장소로 후송한다. 그 가운데 한 비행기가 명확하지 않은 원인으로 태평양 가운데의 무인도에 불시착하고, 조종사가 모두 죽은 상태에서 아이들만 살아남는다.

『나무공화국』의 주인공들 역시 이제 막 십대 중반에 도달한 세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다. 집에서 가출한 그들은 숲 속에 들어가, ‘나무공화국’이라는 자신들만의 공화국을 만든다. 장 자크 루소를 신으로 추앙하며 『사회계약론』에 성경의 지위를 부여한 그들은, 서로를 시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 쌍의 형제와 남매로 이루어진 공화국에 균열을 낸 것은, 한 소녀를 사이에 놓고 벌어진 두 형제의 ‘감정’이었다. 거기에 스스로 입법자임을 자처하는 조이라는 또 다른 소녀가 합세하면서, 숲은 폭력으로 물든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슬라보예 지젝, 창비, 2010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그때 미국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적 조처의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었다면서, 자본가들이 그토록 질색을 하는 ‘사회주의화’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원하는 일에 복무할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용인되고, 또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가능한지를 명료하게 분석한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이후, 2010

인간과 동물의 우열을 이성적으로 구분하려고 한 논의를 모으면 저절로 책 한 권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아주 흔한 예로 우리는 언어·도구·불·옷·웃음·눈물·예술·이념 등의 온갖 개념과 사물들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불려나온 사실을 알고 있다.

『미디어 카르텔』
이은용, 마티, 2010

2010년 여름, 일사부재리의 원칙과 1인 1투표의 원칙을 깨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미디어법이 통과됐다. 한나라당은 외국의 다국적 미디어 산업에 대항하는 토종 미디어 그룹을 양성하고 방송의 다양성을 위한다는 구실을 댔지만, 액면을 고스란히 믿을 사람은 없다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사회평론, 2010

흔히 선구자라면 후세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만리장성과 책들』, 열린책들, 2008) 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진정한 선구자란 후세(미래) 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까지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카프카는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카프카레스크’의 기원이 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그와 유사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재발굴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희의 생일잔치에 그의 직계 가족은 프랑스에서 막 공수해온 푸아그라를 먹고 손님들에겐 냉장 푸아그라를 먹인다는 삼성가의 고약한 손님 접대는 널리 알려졌다.

공식행사를 빙자한 약 10억 원 상당의 생일잔치 비용이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회사 금고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또 자신의 전용기를 안전 운항하기 위해 대한항공에서 다섯 명의 베테랑 조종사를 스카우트해 놓고 2명으로 구성된 2개 조를 구성한 다음 한 명은 여분 인력으로 대기시켜 놓았다는 얘기하며, 온 가족이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다가 이건희가 명품을 만들겠다고 손 댄 사업마다 족족 망해 먹었다, 등등. 참 낯설었던 한 재벌 총수의 사생활과 언행 가운데 내 눈을 확 잡아끈 것은 이런 거였다.

회장님은 돈 주는 걸 좋아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받는 사람에게 ‘감동’을 함께 전달할 수 있는지를 늘 골몰하신다. 아깝다. ‘되돌아올 더 큰 대가’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건희는 ‘포틀래치의 제왕’이 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무노조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협조처에 뇌물을 쓰지 않았다면, 대명천지에 그게 어떻게 계속 가능했겠는가? 이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김용철을 욕하는 보수언론과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김용철이 삼성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 책이 가리키는 문제의식과 아무 상관없다.

책에도 새삼 언급되어 있듯이 "삼성은 비자금 없이 지낸 적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정관계에 돈을 뿌려왔던 게 삼성"이다. 그런데 이재용 자신의 입으로 "비자금이나 차명계좌는 모든 기업이 공공연하게 갖고 있는 것인데, 왜 삼성만 문제 삼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재벌(기업) 의 역사에서 비자금과 정경유착은 면면히 이어져 온 악습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삼성을 생각한다』는 대한민국 우익들이 은폐해 온 ‘재벌 신화’의 기원을 조명하도록 촉구한다.

지은이의 양심선언과 『삼성을 생각한다』를 응원하기 위해 뒤따라 나온 또 다른 편저 『굿바이 삼성』(김상봉·김용철 외, 꾸리에북스, 2010) 은 물론이고, 그동안 태무심했던 ‘삼성 공화국’의 비리에 대해 시민들이 ‘삼성 제품 불매 운동’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현재의 사태는, 이 책의 지은이가 과거의 조명자일 뿐 아니라 미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마이크 데이비스, 대니얼 버트런드 멍크, 아카이브, 2011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는 자신을 만든 인간들에게 자유로 보답했다. 하지만 마이크 데이비스와 D. B. 멍크가 함께 편집한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보면, 현대의 도시는 부자유와 불평등의 온상이다.

『도시의 역사』
조엘 코트킨, 을유문화사, 2007
『도시에 대한 권리』
강현수, 책세상, 2011

어느 대륙과 문명에서든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었는데, 인간이 도시를 만드는 이유와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요소는 세 가지다. 첫째, 사원과 연결된 성스러운 장소. 둘째, 약탈로부터 안전한 피신처. 셋째, 활발한 시장. 하지만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 국가들을 제외하고 나면, 도시가 종교적 이유 때문이나 신성함을 목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란 현재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갖은 방법으로 적국의 대도시부터 초토화시키는 현대전의 양상을 보면, 작금의 도시는 안전과도 크게 상관없다.

『다른 누군가의 세기』
패트릭 스미스, 마티, 2011

19세기는 유럽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그러면 21세기는 서구와 백인이 아닌, 또 다른 문명이 주도할 새로운 세기가 될 것인가? 패트릭 스미스의 『다른 누군가의 세기』는 ‘탈서구 시대, 이제 아시아가 답할 차례다’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21세기가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후마니타스, 2010

스탈린이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자신의 정적을 무수히 감옥에 처넣던 시대. 앞서 끌려 간 피의자가 고문을 당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온 얼마 뒤에, 옆 방 사람들이 통방을 하기 위해 주먹으로 벽을 두드린다. 모르스 부호 같은 신호를 통해, 옆 방 사람이 알고자 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오늘은 어떤 새로운 고문이 나왔느냐?’라는 것.

아는 게 중요했다. 조만간 자신이 당해야 할 고문이나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고문을 미리 파악하고 나면, 무시무시한 고문도 일종의 ‘외과 수술’처럼 받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40년 동안 혁명가로 살면서 당의 무오류성을 철저히 믿어온 루바쇼프가 스탈린의 선한 믿음을 끝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결말이다. 루바쇼프는 자신의 유죄 인정이 당에 대한 "마지막 봉사"가 되기를 소원하며, 선한 믿음을 유지하는 데 항상 필요한 "자발적 희생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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