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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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을 떠날 때에야 내 드레스의 찢어진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놓아 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틈새의 하얀 모호함. 원을 그리며 도는 시계의 분 표시 사이에 있는 공간처럼 비어 있는 것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 매달리려고 애써 왔다. 유예된 세계, 피가 섞이지 않은 그 차갑고 추상적인 세계 속에서 존재하기 위해서였다.

조용히 죽은 채로 드러나는 삶의 본질, 한 조각의 영원.

양보하고 항복하고 싶었다. 이따금 그녀는 잘못된 방향으로 걸었고, 발걸음은 무거웠으며, 다리는 간신히 움직였다.

자신이 그동안 겪어 온 특정한 부류의 고통, 평온한 몰락, 아무 걱정도 없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생각지 않았던 것, 그 모든 게 마침내 주아나를 받아들이게 된 일과 불가사의한 논리로 연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든 아이, 내 아이, 잠든 내 아이, 정말이야. 아이는 따스하고 나는 슬퍼. 하지만 그건 행복한 슬픔이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벅차오르면서 평온하고 아득한 표정이 되지.

당신의 몸과 뇌가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데도 그게 불가능할 때 느낄 법한 무력감처럼. 아니, 그저 불가능하기만 한 게 아니다:

어쩌면 삶의 한 시기를 다른 시기와 가르는 건 고요한 찰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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