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핏빛 자오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8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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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어둠에 묻힌 모든 세상과 얼룩진 모든 위대한 제단을 가리키듯 손짓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술을 붓고는 다시 주전자 물을 더했다. 노인은 아껴 가며 술을 마셨다.

동트기 전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감쌀 때가 되면 소리가 다가올 광경을 생생히 드러낸다

야영장이 일렁인다. 차츰차츰 고여 드는 빛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마을 아이들이다. 잠에서 깨어난 군인들은 아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과 침묵 속에서 기다렸는지 알 수 없다.

인디언 할멈의 시체는 사라지고 없고, 흙바닥은 비질로 깨끗해졌다

아침나절 부대는 약탈당한 인디언 마을을 통과했다. 거뭇해진 살코기가 덤불 위에 널려 있거나 기묘한 검은 빨랫감처럼 장대에 매달려 있었다.

태양이 제물을 불태우듯 가라앉는 서녘 땅에는 자그마한 사막 박쥐가 줄지어 날아다녔고, 세상의 흙먼지가 요동치는 북쪽 지평선에는 아득히 멀리 진을 친 적군이 피워 올린 연기처럼 모래가 휘날렸다.

화들짝 놀란 눈을 한 머리가 왼쪽으로 데구르르 굴러 전직 신부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모닥불이 김을 내뿜으며 거뭇해지더니 회색 연기 다발이 뭉게뭉게 치솟았다.

군인 하나가 일어나 낡은 들보의 썩은 끄트머리를 뜯어 내 모닥불에 던졌다

축 처진 들보를 따라 연기가 번지더니 가느다란 흙탕물 줄기가 흙을 얹은 지붕에서 낙하했다

문간에서 새어 나온 모닥불빛이 구경거리를 기다리며 길가에 늘어선 행인처럼 우뚝 선 말들을 따라 얕은 바다 위로 창백한 띠를 드리웠다.

판사가 벌거벗은 채 담 위에 올라가 있다고 누군가 알린 것이다

옛 서사시를 낭독하며 담 위를 성큼성큼 걷는 거대하고도 새하얀 몸을 번개가 드러냈다.

아이는 자그마한 흙집에 벌거벗은 채 엎드려 있었다. 흙바닥에는 수많은 오래된 뼈가 나뒹굴었다

무단 거주자들은 초라한 무기를 편히 쉬어 자세로 든 채 명예로운 누더기 호위병인 양 죽은 꼬마 곁에 서 있었다.

시내 상류로 올라 여전히 빗물에 젖은 나지막한 향나무 숲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노래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크기와 빛깔이 제각각인 늑대 대여섯 마리가 일렬로 뒤를 따르며 각자 자기 순서를 잘 지키고 있는지 서로 어깨 너머로 경계했다.

불로 장난을 치는 존재가 과거에 그랬듯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데다 지난 여행의 어떤 불변적 존재가 책략을 부려 인간들을 거짓 방향으로 이끄는 것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행자란 으레 다른 이가 이미 걸어간 길을 끝도 없이 가야 하는 운명이기에.

네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거야 상관없어. 하지만 판사는 못 하는 게 없단다. 손대는 일마다 다 기가 막히게 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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