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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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여름의 그 여자아이가. 그녀는 나를 휩쓸고, 숨을 멎게 하고, 순간적으로 내가 스크린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실재라는 것이 사전이 정의하듯 작용하고, 어떤 결과들을 낳는 것이라면, 이 여자아이는 내가 아니지만 내 안에서는 실재다. 일종의실재하는 현존.

근시 안경을 쓴 탓에 눈이 작아 보이지만 안경이 없으면 안개 속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바라보는 건 어머니, 근심과 의심, 불만이 뒤섞인,‘불의에 사태에 대비하는’ 어머니의 평상시 표정이다.

내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기억은 우리가 발음한 말들을 소리 없는 형태로 다시 베껴 쓸 뿐이다.

말할 것. 그녀는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다. 한 번도 자기 굴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바깥세상은 그녀에게 금지된 건 아니었지만,(아버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어머니에게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녀가 아는 세상은 책과 여성지를 통해 배운 것이다.

나는 다르다는 자부심:

노동자인 친척들은 명절 식사를 할 때면 그녀가 배움의‘재능’을‘누구로부터 물려받았는지’ 궁금해하곤 한다.

전축으로 글로리아 라소나 이베트 오르네가 아니라 조르주 브라상과 골든게이트 콰르텟을 듣는다는 점
〈우리 둘〉 대신 『악의 꽃』을 읽는다는 점
일기를 쓰고, 시와 작가들의 문장들을 필사한다는 점

다르다는 데서 기인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욕망들에 대한 자부심:

그녀는 일정한‘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흘러가는 여럿의‘나’를 가질 뿐이다.

처음으로 혼자, 자유롭게, 약간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과 닮은 부류와 만나기를, 닮은 부류일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갈망하면서. 그들도 자신이 그들과 닮은 부류라는 걸 알아채줄 사람들을.

『레미제라블』의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첫날밤을 함께 보내는 장면을 외우다시피 했다

‘천사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채 초야의 문지방에 미소 지으며 서 있다. 사랑을 축하하는 이 성스러운 장소 앞에서 영혼은 사색에 잠긴다.’

내 기억은 욕망과 금기, 신성한 경험에 대한 기대와‘처녀성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뒤얽혀 있던 심리 상태를 복원하는 데 실패한다. 처녀성을 잃는다는 표현이 지녔던 놀라운 힘은 내 머릿속에서, 프랑스인 대부분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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