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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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얼음과 다디단 팥의 맛, 작고 단단한 찹쌀떡의 맛, 마지막에 바닥에 남은 것을 마실 때의 시원함 같은 것들이.

넌 이름 없는 고양이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봉투를 뜯는, 이름 없는 고양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기도 하는 그 길가의 애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우린 서로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겠지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나는 다그치는 사람,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 오해하고 단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 누구보다도 모래에게 마음을 기댔던 사람, 이 모든 사실을 부정했던 사람……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자신을 담은 물빛만큼만 반짝이고 완전한 구를 이루지는 못하지만 둥그렇고 부드러운 진주.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미주는 그 착각의 크기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가기를,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음이 무뎌지기를 미주는 바랐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이런 차가운 방식으로 네가 나를 버리다니, 나를 떠나다니. 아무 말도 없이, 유서 한 줄도 없이, 쓰고 또 써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을 주다니. 나에게 너의 유서를 쓰게 하는 벌을 주다니. 가지 말라고, 한 번 붙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니.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다시 만날 수 없어 후회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여자와 여자의 친구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테이프를 틀어놓고 춤을 추던 모습도 혜인은 기억한다.

엄마가 눈앞에서 웃고 있어도 그리웠다.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노력했던 기억은 난다.

엄마는 언제나 혜인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엄마 앞에서 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울면서도 머릿속은 텅 빈 채로 오히려 고요했다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주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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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1 1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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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1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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