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동양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
정약용 지음, 노태준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민관인 아버지 슬하에 자란 다산 정약용으로서는 직접 체험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목민심서>를 지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닐까. 다산에게는 괴로웠을 18년 동안의 유배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이 씁쓸하다. 어째서 바른 것은 사장되어 왔는가. 어쨌거나 당시 목민관들의 생활상에 대한 모든 것을 일렀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들의 행실에 대한 실질적인 제시를 하고 있어 흥미롭다.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고 있기에 당시 정치제도나 사회상 전반을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약용의 애민심, 충정심 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목민관들은 물론 백성들의 태도나 사고 또한 잘 알려주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의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부러 원문이 실려 있는 것으로 고르다 보니, 홍신문화사의 것으로 읽게 되었는데 해의가 알차 읽기 편했다. 주석이나 주해는 말할 것 없고, 원문에 없는 내용들까지 같이 알려주는 해의가 있었던 것이다. 또 마지막에는 현대 사회와 연결시켜, 이러한 점은 요즘에 맞지 않으나 또 어떤 점은 현대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들이라며 역자의 의견을 덧붙여 인상적이다. 그래서 [동양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가 시리즈 명인가 보다. 다산이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정신을 지금이라도 실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만으로도 흐뭇하다. 무엇보다 그 시대에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하여, 그것은 그저 이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단념하지만 않는다면 분명 더 나아질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목민심서>를 읽으며, 그동안 품고 있었던 오해가 한가지 풀렸다는 점이 나로서 특기할만 하다. 목민관의 행실이나 행정에 대한 내용만 있는 줄 알았으나 그뿐 아니라 아전의 태도나 애국충정에 대한 내용들도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목민관의 옷차림 하나까지 매우 세심하게 다룬 것이 흥미롭다. 무지로 인한 어이없는 오해였으나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듯 하다.

 

 어쨌거나 다산은 목민관에 대한 윤리뿐 아니라 실무적인 부분까지 일관된 자세로 방향을 제시하고, 당시 목민관의 그른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다산의 정신이 살아 숨쉰다.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관리의 특권에 따른 방만한 태도는 존재하고 있지만, 다산과 같은 옳고 바른 정신으로 직무를 행하는 이들이 있기에 살만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른 것에 굴복하지 않는 올곧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하는 것,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가치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3
백문임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 대한 속사정을 깊이 들여다 보는 책이었다. 물론 '춘향'과 관련지어서 말이다. 우리 문화사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춘향에 대해 갖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이미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장이라 하겠다. 봉건적 신분제에 저항하는 투사로서, 사랑에 몸을 던지는 청순가련형 여성으로서, 정절을 지키기 위한 열녀로서, 춘향의 이미지는 줄기차게 재탄생 해왔다는 것이다.

 

 특히나 춘향이라는 인물의 이미지가 한국 여성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구성해 온 것인가, 에 대한 깊은 의문을 가지고 시작한다. 이것이 그저 대중적인 기호일 뿐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 말이다. 나 또한 대중문화 속에 형성되어 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긴 했지만, 춘향이라는 인물에 대한 변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굉장히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하고, 또 성적인 순수를 증명해내는 것이 중심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는 참으로 날카롭다.

 

 또 '팔려가는 딸'이라고 이름지은 이 모티프에 대한 설명은 마냥 웃으며 넘길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오빠, 그 오빠를 위해 몸을 파는 여동생, 이러한 '팔려가는 딸' 모티프는 근대 문학에서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고, 또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당시 시대상이 너무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절'과 '효'라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는 참으로 뜨끔하다. 어째서 여성에게 완벽을 요구하는가. 전통적인 남성 판타지의 주요 주제인 이 두 가지는 너무나 민족적이고, 또 폐쇄적이기에 그 민족적 무능과 불안이 눈에 띈다.

 

 수없이 리바이벌 되고 있는 <춘향전>은 여러가지 문학 작품과 드라마, 영화를 통해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여러 작품들이 논의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 지고 있는 것은 <장한몽>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일명 '홍도야 우지 마라')>, <무정> 등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앞서 말한 '정절'과 '효'에 대한 민족적 가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장한몽>의 경우,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를 한국적으로 번안한 것인데, 번안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작품과는 매우 다르게 변색된다. 그 차이점이 바로 우리 민족적 가치의 폐쇄성을 절실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이 사랑해 온 여성들은 너무나 씁쓸한 이면을 갖고 태어난다. 근대, 그리고 현대의 춘향들은 그렇기에 애절하다. 전통적 가치에 의한 피해는 무지몽매의 굴레 속에 살아 온 우리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이라 지어진 것일 게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편향적인 시선은 한 층 걸러낸 느낌이라 객관적인 면이 눈에 띄인다. 다만 뒤로 갈수록 그의 연구나 주장이 한 데 어우러지지 못하고 난잡스런 면이 드러나는 점, 결론에 이르러 자신의 입장을 애매모호하게 둘러대는 점이 안타깝다고 하겠다. 

 

 어쨌든 이처럼 백문임은 대중물의 의미심장한 영역을 굉장히 섬세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 노력 속에는 현대사회에서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춘향의 아픔이 더이상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이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식민지 시대 민족의 운명, 전통적 가치의 타락 속에서 변질된 우리 고유의 문화가 더이상은 끌려 가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주체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언론, 무엇으로 다시 살 것인가 - 손석춘의 미디어 혁명, 새로운 사회를 여는 지식 캠프 001
손석춘 지음 / 시대의창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 언론,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 문제에 대한 제기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 사회, 경제 면에서 관련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소지식인이라 불리우는 대학생들조차 그 문제에 대해 외면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언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보완해야 할 문제점은 아마 의식은 전환, 혹은 개혁이리라. 물론 나조차 그 무지의 물결 속에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나, 때때로 나에게조차 심각해 보이는 경우에는 참으로 답답해진다.

 

 그렇다면 우리 언론,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다시 살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보기에 앞서 그 문제부터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인가.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언론사 세무조사, 불완전한 신문법, 개혁 철학 혹은 개혁 정책의 부실, 미디어의 폭증, 소유구조와 편집의 자율성 등 다양하다. 특히나 책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자율적인 편집권의 부재이다. 이것은 사주가 인사권을 쥐고 흔들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언론의 자유를 외쳐 대어도 실상 목숨을 갖고 휘두르는 데야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한 기자들, 저널리스트들은 찾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책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가장 신뢰성이 가는 신문이라는 한겨레조차 판매부수와 무가지 비율등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조중동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가장 신뢰성이 높고, 공정성이 있는 신문조차 회사 투명성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니 다른 신문들은 오죽하겠는가. 더불어, 조사 결과 기자들 사이에서 한겨레의 신뢰도가 가장 높다고는 하나, 일명 진보 신문이라는 한겨레의 부수는 조중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앙신문들이 이 모양이니, 지방 신문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 대선에만 보더라도 확연하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 분석이나 이행 가능성, 혹은 그들의 비리나 성향 등을 분석하는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보기 힘들다. 대개 그들의 동향, 즉 어느 지역을 순회하며 손을 잡았나 등의 홍보 일색인 기사뿐이다. 기자들이 각 대선 주자의 홍보 비서나 다름없게 되버린 것이다. 정책이나 공약에 대해서도 띄워주기 식의 단순 중계에 그칠 뿐이다. 그렇잖아도 눈이 어두운 대중들이야, 그저 신문에서 읊어주는 공약이나 외면 유식해 보이니 그 이상의 관심은 없다. 도대체 이런 사태는 어느 나라의 본보기를 받은 것인가. 그렇게 좋아하는 미국인가, 유럽권 국가들인가.

 

 더군다나 몇 달 전 KBS 모 프로그램(아시는 분은 아시리라)에서 신문에 올라 온 기사들의 문제점에 대해 방송했을 때, 조중동은 마음껏 떠들어 댔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방송이 신문을 두들겨 패는 경우는 없다고. 그것도 모잘라 몇날 몇일을 그 프로그램의 문제점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 프로그램은 그들을 비웃듯이 여러 나라의 실질적인 사례를 조사해 왔다. 신문기자들은 과연 조사나 취재는 해보고 기사를 쓰는 것인가, 에 대한 의문제기와 함께.

 

 우리의 언론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쓰는가. 최근에도 S그룹 비자금 파문으로 인해 들썩거리고 있으나, 실제로 조중동에서 그 기사를 찾아 보기는 어렵다. 한겨레나 경향에서는 1면에 터트리는 반면, 조중동에서는 찾아 보기 어려운 곳에 작게, 그것도 다른 기사와 섞어 한 두 줄에 그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제는 그 비자금 자체보다 조중동이 더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도대체 왜 S그룹에 약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토픽과 함께.

 

 어쨌건 책에서는 이런 이슈보다 그 구조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니, 다른 문제 제기는 이쯤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렴 그런 문제들이야,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마는.

 

 책에서는 현재 공론장을 '분단 공론장'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진정한 언론개혁의 시작을 '해방공론장'이라는 명칭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해방공론장'을 일궈낼 정책을 제안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주요 초점이다. 사주의 소우제한 및 겸영금지나 주식 소유한도의 제한을 더 낮춘다든지, 편집위원회의 실질적인 활성화, 미디어개혁위원회 구성 등을 대안으로 내놓는다.

 

 이 책이 무엇보다 재미있는 까닭은 이처럼 문제 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전에 언론에 대한, 정치에 대한, 사회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부터 고쳐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자유를 보장하라, 라고 외칠 수 없는 우리 언론의 현실. 참으로 안타깝지만, 더이상 안타까워 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지 않을까. 霖

 

뱀발1) N 포털은 대선뉴스 댓글을 허용하라. 대중은 당신네들의 입 없는 종이 아니다.

뱀발2) UCC를 규제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말고 또 어디 있을까. 가질 수 없다면 버려라?

뱀발3) 도대체 '임시조치'는 누구를 위한 정통법인가. 명예훼손의 기준은 어디에, 잣대는 누가? 쌍방향 미디어의 발전은 우리나라 언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개혁 희망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거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어가는 대한민국 - 저출산 고령화의 시한폭탄 SERI 연구에세이 4
이현승·김현진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사람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늙어가는 대한민국>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답은 당연히 '오래 버틸 수 없다' 이다. 책에서 왜 이런 화두를 먼저 끄집어 내고 있느냐.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챘으리라. 중고등학교 사회 수업때부터 이미 줄기차게 보아 왔던 인구피라미드를 떠올리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종형이니 방추형이니 하는 따위의 것들 말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방추형에서 더 발전해 나가 역피라미드형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나아가면,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해 쓰러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세계는 점점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 비생산인구가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나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 일선에서 물러나게 될 시점에서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한 쪽 귀로 듣고 흘려 버렸던 파탄 난 국민연금제도나 노인 의료비 부담, 저출산의 문제 등은 더이상 먼 미래의 일일 수가 없다. 이제부터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세계, 즉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벌어질 문제들은 보지 않아도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본과 우리나라는 가장 빠르게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비책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제도는 나라의 뿌리까지 흔들 정도로 파탄 난 상태이다. 비생산인구의 증가에 따라 경제 침체 또한 예상된 수순이다. IMF 이후 절망적인 경제 상태였던 우리나라는 이제 간신히 그 위기를 벗어난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앞에 더 큰 적이 놓여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은 사실 불투명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늙어가는 대한민국>에게 희망의 빛은 참으로 멀지만, 지금이라도 대비책을 생각한다면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이를테면  복지 부문의 선진화를 이룩해내는 것이다.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의 개혁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초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복지 부문의 발달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또한 적당한 논의를 거친 후, '임금피크제'의 도입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에 앞서 정년에 대한 담론 형성부터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현재 국고 부족으로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출산 장려 정책 또한 보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적인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세대의 인식 변화일 것이다.

 

 나 어릴 적만 하더라도 둘만 나아 잘 기르자로 가더니, 어느새 하나만 나아 잘 키우자 외치던 우리나라. 하지만 이제는 가임 여성 1인당 1.17명이라는 출산율은 가히 무서울 정도로 목을 죄고 있다. 그렇기에 인구 보너스기를 꿈꾸는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 역시 조만간 그들의 목을 죄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책에서는 중국 뿐 아니라 일본, 미국, 유럽 지역의 나라들의 현실과 대책에 대해서도 논의하며,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가르키고 있다. 책 제목처럼 <늙어가는 대한민국>,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젊어질 방법을 찾아봐야 되지 않을까.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의 자연사 대우고전총서 10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아카넷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흄을 접하는 것이 두번째다. 덕분에 첫 만남보다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철학에 더욱 깊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흄은 광신을 지양하고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모든 의례와 신화를 거부한 철학자였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기 각 종교가 가진 교리나 믿음을 거부하고, 자연적 성향을 수용하면서 중용을 주장했다. 특히나 종교의 타락과 불합리성, 모호함, 광신 등을 거부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에 기성 종교인들의 반감을 샀다. 종교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바로 세우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불신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연사>는 흄이 주장하는 종교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종교는 어떤 양식으로 발전해 왔는가, 근대 종교는 어떻게 시작하였는가, 등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같은 원시 신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만, 다신교와 일신교, 근대 종교의 발전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다신교가 인류 최초의 종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할 종교인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유일신교의 뿌리가 다신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반발을 사리라.

 

 흄은 고대 그리스, 로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을 빌려 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자신이 그것을 강하게 믿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원시신앙 등의 미신이 이성적으로 자연물을 관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부터 인간이 가진 부조리를 말한다. 고대인은 자연에 대한 경외나 존경, 신에 대한 자연스런 믿음으로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공포, 두려움을 '불완전한 신'들의 변덕스러운 섭리 탓으로 여겼기에, 그 신들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제례 의식을 시작했고 그것이 종교의 기원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에 생겨난 원시 종교는 태양이나 바람, 혹은 동물들에까지 신심을 바친다. 종교란 이처럼 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두려움, 무지로 인해 생겨난 것이기에 인간의 지식과 이해가 증진된다면 자연적으로 축소되어야 하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현대인 또한 생로병사, 빈곤, 풍요, 자연재해를 예측하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종교의 힘이 존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고대인들보다 수많은 발전을 거듭하기는 하였으나 자연적인 사건의 궁극적 기원이나 원인들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여전히 종교를 존속케 했고, 여러 자연물을 숭배하던 원시 종교는 차츰 나아가 더 발전된 모습의 신으로 존재하기에 이른다. 고대 그리스나 유럽의 신화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나 유럽의 신들은 하나같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은 인간보다 좀 더 발달한 존재, 이성적 존재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신들은 아직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자연에 대항하는 것을 신에 모독을 행하는 길이라 생각치 않았다. 오히려 신들과 경쟁했다. 그렇기에 신들의 장난이나 실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제례 의식의 필요성을 증가시켰고, 이것은 종교적 아부의 극치에 다다른다. 마냥 신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장난치고 실수하지 않도록 회유하기 위한 아부를 떨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이해가 발전함에 따라 신들도 발전한다. 신은 언제나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이라야 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마침내 완벽한 힘과 지성, 이해를 지닌 존재로 격상되었고 그에 따라 유일신교가 등장한다. 신이 완벽하려면 오직 유일한 존재라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종교 교리에 철학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종교 철학의 발전은 그들의 교리를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아부와 찬사를 부풀리다 못해 더이상 부풀릴 수 없는 무한자, 절대자라는 개념으로 도달시킨다. 종교에 철학이 유입함으로써 종교는 비로소 한 단계 발전하였고, 그것을 근대종교라 부른다. 이같은 근대 종교는 미신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체계화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신학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독단적인 길로 들어섰고, 상이한 종교들 간에 또는 동일 종교 안에서도 파벌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철학의 유립으로 인해 서로 다른 것끼리의 양립이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유일신의 교리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로간의 종교적 탄압과 박해,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일신의 등장은 다신교가 가지고 있던 장점을 전혀 수용하지 못 했다. 다신교는 여러 신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했고,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았다. 다문화적인 성향과 관용의 정신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신교는 유일신만이 신앙의 대상이므로 타종교와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박해하거나 박해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자연히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고, 일신교 스스로가 만들어 낸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과 같이 자연에서 생겨난 존재라고 여겨졌지만, 일신교의 유일신은 그 스스로가 창조주이며 절대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물론 자연을 창조해 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태초에 자연이 준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지만, 마침내 신이란 존재를 절대자로 숭상하게 되며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또한 자연재해는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준 것이므로 거부할 수 없으며, 생로병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신에 의해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이므로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믿게 된다. 병을 앓아도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광신은 대중종교에 만연했고, 보다 더 새로운 찬사를 개발하고, 새로운 믿음의 증거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만들어서라도 보여낸다.

 

-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일신교는 분명 다신교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였지만, 그 믿음이 지나쳐 결국 타락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든 신이든 절대적 권위가 남용되는 경우, 그보다 더 악행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유일신을 창조해 냈지만, 그 유일신의 권위를 남발하게 되는 기만을 보게 된다. 대중중교의 기만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고 할 것이다.

 

 종교의 시작이 지성적 창조주가 아닌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 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허나 그가 주장하는 대중종교의 신관이 감각과 상상에 의한 산물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나약성이라는 점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나 해석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흄이 제시한 주장의 부산물들, 즉 대중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과 종교의 난제에 대한 반성과 발전에 대한 길을 모색하는 것에는 종교인들도 수용하고 연구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