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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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다. 적나라한 표현들이 하나같이 소름이 돋는 걸 넘어서서 징그러워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피어싱에 관한 용어들을 처음 보면서 호기심이 드는 것도 잠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넘기고 주춤한다. 아니, 그 전에 책날개에 흑백으로 처리된 가네하라 히토미의 얼굴을 보며 '갸르'잖아? 라고 외쳤던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 순서일까.

 

 아무튼 이 책을 보면서 놀라게 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게 문화적 차이라는 것일까. 아니야, 일본 사람 모두가 이런 건 아니잖아. 분명 극소수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프리카 토인종도 아니고 어찌 이리 기괴한 일들을 일상으로 처리한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문화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을 때부터 등교 거부를 하고, 성인이 되기 전부터 집을 뛰쳐 나가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면 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가 쓴 인물들의 소유욕, 욕정들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은 하되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온 몸에 피어싱을 꽂고 뱀혓바닥처럼 갈라진 그것을 낼름대는 아마와 동거를 시작한 루이는 점점 그를 흉내내기 시작한다. 아마를 따라 찾아간 시바에게 혀를 뚫어 달라고 하고, 문신을 새겨 달라 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지불한 것은 다름아닌 섹스다. 물론 아마에게는 비밀로 한다. 날름대는 혀에 반했다는 루이는 아마의 아르바이트비를 축내며 기생한다. 아마는 루이를 못 견디게 사랑한다고 하지만, 루이는 아마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가 돈을 벌어와 편하게 생활하면 할수록 일상에 염증을 낸다. 곡기에는 입도 대지 않고 술만 마신다. 점점 알콜릭이 되어가는 루이는 마침내 아마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에게 열정을 다한다.

 

 아마가 사라진 뒤, 루이가 성의를 다해 그를 찾는 것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아마와의 생활이 거듭될수록 삶의 의미를 상실해가던 루이가 되살아난 것 같이 느껴진다. 아마에 대한 소유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 안에 녹아 들 것이지 왜 말도 없이 사라지느냐는 화를 내며 절망한다. 이것을 단지 루이의 성장으로 여기기에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루이에게는 아마의 실종이 단지 가지고 놀던 곰 인형을 잃어버린 상실로 밖에 치부되지 않는 것일까. 아마의 집에서 계속 그를 기다리던 루이는 그의 죽음을 알자마자 다시 기생할 곳을 찾는다. 바로, 문신을 하러 갈 때마다 섹스를 하곤 했던 시바와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루이가 정신을 차리고 차츰 밥을 먹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곧장 죽음으로 달려가던 그가 샛길로 빠져 나와 삶을 되찾는다. 아마처럼 시바까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마처럼 뱀혀를 만드는 것고 피어싱을 하는 것도 섹스를 하는 것도 모두 다 무의미하다고 토로하던 루이는 자신에게 되묻는다.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리고 그 무의미한 것에 이끌리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으냐고. 삶 자체에서 무의미를 느낀다고 했던 그 대신 아마가 죽은 것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가 아마를 죽였는가. 

 

 야산에서 아마를 사체로 발견했다는 경찰의 말을 들은 루이는 격분한다. 그리고 그 격분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시바에게 안긴다. 그 순간, 나는 의심한다. 그를 죽인 것은 시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루이조차 그것을 의심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루이는 또다시 기생할 곳을 잃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물론 돌연 삶을 다시 살려는 루이에게 그럴 듯한 계기를 부여할 수는 있다. 아마의 죽음이 그를 성장하게 했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 혹은 그가 남기고 간 애정의 증표를 보며 갑자기 그가 절실해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풍요를 지리해 하고, 행복을 귀찮아 하고, 또 삶을 내팽겨 치는 것들의 연속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까.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한 그 자체를 축복한다면, 오히려 낫겠다.

 

 루이는 문신을 새길 때 눈동자를 그려 넣지 말아 달라고 시바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날아 갈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그것들을 영원히 자신의 소유로 남기기 위해서다. 아마가 자신에게 녹아 들길 바랐던 것과 같은 이유다. 결말에서 루이는 다시 부탁한다. 용과 기린에게 눈동자를 그려 넣어 달라고. 이제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다시 삶에 생기를 부여하고 싶다는 뜻일까.

 

 후텁지근한 열기 속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불쾌함이 온몸을 감싼다. 한 낮의 열기와 고통에 초조하기 짝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 불쾌함이 마냥 싫지는 않다. 그 불쾌함 또한 온전히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불쾌할 정도로 모나게 튀어 나와 날카롭게 찢어진 살결을 쓰다 듬고 싶다. 썩은 어금니가 흔들거려 뽑히자, 뱉지 않고 삼키던 루이의 말이 생각난다. 내 피와 살이 되어 달라던, 절실함이 너울친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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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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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를 처음 읽었다. 그의 소설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들께는 송구하나, 나는 그 정도로 온다 리쿠에게 몰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세기 초엽이라는 배경과 환상적인 분위기의 묘한 배합은 그럴 듯 했으나 그 정도로는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강렬히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코노 이야기의 첫번째인 <빛의 제국>을 읽지 못하고 읽은 점이 아쉽긴 하나, 그 때문에 이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라 다행이다. 어쨌든 최근 읽었던 일본 소설들을 비교해 보자면, <민들레 공책>이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일본 특유의 가벼움이 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만,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민들레 공책>은 '민들레'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서정적인 느낌이 무척 강했던 책이었다. 책을 덮자, 미네코가 조근조근 말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살풋 웃음을 터트리게 된다. 시대적 배경에서 오는 불안감과 소녀적 감성의 뭉클함 등은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와닿아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민들레 공책>에서 등자하는 도코노 일족은  누군가를 자신에게 '넣어' 기록하는 하루타 일가이지만, 초점은 그들이라기 보다 미네코다. 또한 미네코라기보다 사토코다. 미네코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인 마키무라 일가의 주치의이다. 그 탓에 마키무라가의 막내딸 사토코의 친구가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키무라가의 사람들은 마을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데, 태풍이 지나는 와중 미네코와 사토코가 마을 아이들을 구해낸다. 사토코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고 하지만,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미네코에게 큰 아픔이 될 수밖에. 그 이후, 전쟁으로 인해 마키무라가와의 인연이 끊어지게 되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안타까움으로 남게 된다.

 

 미네코는 그 좋았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하고 끝없이 회상한다. 일기장인 민들레 공책은 모두 사라지고 단 한 권만이 남았지만, 미네코의 기억은 그것들처럼 잃어버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잃을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추억의 상자를 고스란히 담은 <민들레 공책>은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안타까움을 풍긴다. 미래를 약속했던 인연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흩어져 버리고, 더 먼 미래조차 윤기없이 퇴색해 버린다는 것이 씁쓸한 입맛을 느끼게 한다.

 

 사토코의 스스로를 지칭할 때, '나'라고 하지 않고 '사토코'라고 했던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동시에 앞서 말한 것처럼 안타깝다. 사토코가 집안에 갇혀 자신만을 위안하며 지냈던 시간들이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 것 말이다. 그것은 마치 미네코가 옛 시절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유아기에 당연히 겪는 일이지만, 점점 자라나 자아확립과 동시에 정체성을 체득하게 되면 그 습관은 잊혀지게 된다.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주관이 없고 심지가 약하기 마련이다. 사토코가 아름다운 외모와 높은 지적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또래에 비해 성숙했다 하더라도 정체성을 획득해야 하는 시기를 원활히 넘기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미네코가 전쟁통에 아름다웠던 소녀 시절을 잊지 못하고 끝없이 회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은 그런 의미에서 비슷한 시대적 희생자다.

 

 미네코가 한국을 작은 반도라 칭하며 그곳을 두고 싸우는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일본인이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인이 어떻게 일본을 이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일게다. 하지만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나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이처럼, 시대가 격동할 때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숙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문득, 도코노 일족이 시대와 사람을 '넣는' 것처럼 우리도 그 시대와 사람들을 곡해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이 시대의 기록은 어떻게 남겨질까. 수없이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후대인들은 무엇을 믿을까. 부디 이 시대의 제대로 된 기억들도 도코노 일족들의 능력이 발휘되어 간직되어지길.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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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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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이산 정조대왕>을 다 읽고 난 후,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어울리는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정조 시대의 끝은 너무나 안타깝기 그지없고, 또 허탈하다.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그가 오랜 세월을 인고하며 개혁의 발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한순간에 스러졌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정조는 당파의 싸움을 피해 능력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던 탕평책, 금난전권을 금지하고 난전을 허용한 신해통공 등을 시행했다. 그 뿐이랴. 서얼허통과 노비제도의 혁파, 암행어사 제도의 확대, 국립도서관인 규장각 설치, 친위부대인 장용영 창설 등을 통해 막강한 개혁정치를 시행했다. 이 같은 제도의 시행 등으로 미약했던 왕권을 강화한 것은 그의 사리사욕을 채운 것이 아니라 바른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에 더욱 의의가 깊다.

 

 이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세종만큼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세종보다는 평가절하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들어 이렇게 정조를 재조명하는 것은 참 고맙기 짝이 없다. 나처럼 국사에 무지한 이들도 친근하게 그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실로 엽기적이라 할만한 문체를 통해 풀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이 두서없이 횡행하여 난잡한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이같은 글쓰기 방법의 문제뿐 아니라 더 깊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모든 사건을 측면이 아닌 정면 돌파를 하고 있어 저자인 이상각의 사관만이 옳다고 여길만하게 짜여져 있다. 받아 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만, 이처럼 당황스러운 전개는 독자를 수렁으로 몰고 간다. 또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참고한 도서 목록이다. 이 목록들을 보면 이상각의 주관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이런저런 역사서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놓은 것으로 보일 밖에 없다. 참고 도서 목록을 잘 살펴보면 원저가 아니라 풀이서인 것이다. 그것도 대개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이었다.

 

 조선의 개혁가, 이산 정조대왕. 그를 살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어 내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정조와의 만남만은 즐거웠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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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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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탈해 졌다. 이 책에 실망했다는 말은 아니다. 재미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소재가 근원적인 고독과 단절을 말하고 있었고, 그것에 깊이 동의한 까닭이다.

 

 처음에는 올 해 고희인 이제하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말한다고 했던 것에 놀랐다. 반면, 그래봤자 노인네가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 얼마나 알겠어,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나서야 어리석은 나를 절실히 통감하며, 더불어 사죄하고 싶어졌다.

 

 각설하고, 이제 <능라도에서 생긴 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소설의 시작은 인터넷 사이트 <능라도>에서 친분을 쌓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총 한 자루를 발견한 그들은 이를 두고 신고할 것인지 파묻을 것인지 등에 대해 토의한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의 외국인들이야 이런 논의를 황당하게 여기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총기 소지에 대해 엄격한 나라에서는 민간인이 총을 소지한다는 것은 대경실색할만한 일이다. 총기 난사로 인한 사고가 외국에서 보도될 때에도 한국에서는 혀를 내두른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살인이라봤자 사고로 인한 과실 치사이거나 때려 죽이거나 식칼을 휘두르는 게 대부분인 탓이다. 특히 병역의 의무가 없는 여성이라면, 총기라고 해봤자 평생 TV나 인터넷 등 대중매체에서 보는 게 대다수이지 않은가.

 

 어쨌든 이 기발한 발상을 시작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차례로 돌아가며 총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오프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총이 발사된 것은 여러번이지만, 벽을 향하거나 하늘을 향하거나 하는 등 결국 누군가를 쏘지는 못한다. 정말 제 용도를 다해 살인을 한 적은 단 한 뿐이다. 살인을 한 사람은 '키티'라는 닉네임을 쓰는 62세의 노인, 장성일이었다.

 

 이처럼 내면에 감춰진 파괴력이 폭발하는 것은 바로 총이라는 물건이 생겼기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은 비인간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풀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총이 발사된 적이 단 한 번 뿐이듯 어떤 것을 빌리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 총으로 행한 살인도 장성일의 환상으로 처리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설정 자체를 애초에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지 모른다.

 

 <능라도>에서 만난 이들이 오프 모임을 통해서 만나서도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고, 가족처럼 서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달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 이들도 있으리라. 허나 가족 해체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위안받을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피치못할 상황이며 순서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기존의 체제를 떠올리게 하며, 그와 동시에 파벌을 이루어 물어 뜯고 싸우는 정치판이라던가 수백 수천만을 절벽으로 몰아 세운 이념의 대립이라던가 옳다 그르다 헐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학문과 사상의 길이라던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가상이며 기치인지를 보여준다. 합리적인 이성이 높이 떠받들릴수록 비합리적인 감수성이 폭발하듯 사람들은 가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나는 키치가 싫다. 리고리즘은 더욱 싫다. 허나 누군가를 무언가를 꼭 조롱하고 비하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심리는 어떤 사회에서든 팽배하게 작용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어째서 모든 것이 명확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언제나 한켠에 묻힐 수밖에 없는 논제였다.

 

- 세계가 진화, 분열을 가속하고 사회가 분업, 전문화를 거듭 촉구하더니 부모와 자식이 통하지 않고 우인과 연인들끼리도 소통이 끊겼습니다. 일월과 성신이 빛이 바래고 땅과 하늘도 점차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나마 그런 처방,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대화 재개와 그 회복은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50쪽)

 

 장성일은 <능라도>라는 사이트를 개설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허나 이같은 가상 현실 속에서 속내를 나눈다는 것은 명확한 현실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의 소통만을 재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비현실을 사모하고 그 속을 헤매다니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 허나 그 고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 죽는다는 것은 잠을 잔다는 뜻이고 잠을 잔다는 것은 또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그건 셔터를 누르고 포착된 대상이 현상, 인화돼 다시 태어나는 과정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번데기가 되어 잠자던 애벌레가 나비로 다시 태어나듯이요. 그 순환과 꿈을 버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252쪽)

 

 장성일은 꿈꾸는 자였다. 그 꿈을 이미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죄악을 부른 것은 아닌가. 개인을, 그리고 그 개인의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에 반항한 댓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닌가. 흔히 가치 기준으로 삼던 사랑과 우정, 믿음, 진실 등은 그 가치를 다하고 빛을 잃은 것인가. 그래서 장성일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 되버린 게 아닌가.

 

 유토피아는 도원경과 비슷한 말로 '이상향'을 뜻한다. 허나 그 이면의 숨은 뜻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 그리스어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장성일이, <능라도>의 회원들이 찾던 유토피아는 현실이 아닌 가상 속에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찾는 생의 본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간절한 것이라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 또한 간단하다. 욕망을 버리라고? 그것이 가능하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대답이 아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일치시키면 된다. 그 사이의 괴리를 줄여가면 된다. 그것이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라고, 이 생에서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의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평가로 정의될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다. 삶의 위상은 자신의 건설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의 고독을 인정하고, 타인과 발맞춰 나갈 때 그 고통을 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가 아닐까. 끊임없는 탐색만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내 혼은 아무도 강탈하지 못한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다. 삶을 대면하라. 삶의 고통을,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혼마저 스러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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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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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을 드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엘리 위젤은 그뿐 아니라 중립도 죄악이라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것이 바로 죄를 더 크게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친구 S의 말이 생각난다. 급진주의자인 S는 나에게 너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보수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모르면 알아라. 모르는 것은 죄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죄다. 그 말이 하나 틀릴 것은 없다. 하지만 막상 나서기에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것을 누가 모르랴. 하지만 그것이 죄인 것은 분명하다. 나 또한 죄인인 것이다. 침묵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죄인.
 

 엘리 위젤은 대다수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것 또한 죄라며 외치며 이 책을 냈다. 하지만 많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과유불급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고 또한 많은 부분을 처내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는 고통 한가운데에 살면서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낱낱이 드러낸다.

 

 600만명이 넘는 유대인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고, 타오르는 불에 집어 던지고, 가스실에서 피를 토하게 하고, 인간의 기름을 짜내 비누를 만들고, 그 시체를 연료로 사용했던 나치 정권. 아우슈비츠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것들에 대한 표상이라 할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나치에 대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고, 관련 소설들도 제법 보았다. 보면 볼수록 지지부진한 이야기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읽어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내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엄청난 부정이자 학살이며, 죄악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그리고 그와 관련한 소설과 영화 등을 보면서 늘상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측면이다. 역사적 사명감이라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난 그 당시의 세대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도 간접적 경험에 의한 얄팍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깨우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후대의 사람으로써, 인간으로써 그 죄악들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돌이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내 생각을 비웃는 이들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이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의 가족, 친구가 그러한 죽음을 당해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면 그들은 또 반박한다. 어쨌든 지금은 그 세대가 아니잖아.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날리도 없고, 라는 말들도 둘러 댄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다면, 결국 그런 죄악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 어제 침묵을 지킨 사람은 내일도 침묵을 지킬 것이다. (19쪽)

 

 내가, 당신이, 온 세상이 어제 침묵했다면 오늘도 침묵할 것이고 내일도 침묵할 것이다. 그 당연한 이치를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고 해서 나의 생각이나 당신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좋다. 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해 다오.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도 있지만, 당신이 그 계기가 되었다면 어느 곳에서라도 당신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을까. 전능도 구원도 거짓이냐고 신을 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울부짖던 엘리저의 울음을 당신이 외면할 수 있을까.

 

 결국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모두 죽어갈 것이기에. 하지만 그들의 증언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잊는 순간 그 비극은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지금 당장이든 먼 훗날이든 언젠가는 다시 돌이켜질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약은 죄악의 과실이다.

 

 감동하지 않아도 좋다.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그 비극을 기억해다오. 엘리 위젤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닐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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