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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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이너리티에게 경의를!

 

 이 한 문장이 바로, 내가 신윤동욱에게 바치는 찬사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어쨌든 <한겨레21>에서 자주 접했던 그의 이름으로 칼럼집이 나왔다니, 선뜻 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색색깔의 표지에 살짝 어리둥절 했던 마음을 접고, 펼쳐 든다. 그동안 접해 왔던 그의 칼럼들을 모으고 모아 보자니, 그렇게 동감이 갈 수가 없다. 내가 성적소수자라거나 특별난 진보적 정치주의자는 아니지만, 소외되어 있는 한 개인으로써 그의 이야기는 늘 동감이 간다. 게다가 내가 늘 강조해오거나 주변에 설파하고 다녔던 것이 바로 '다문화주의'라던가 '마이너리티 존중'이라던가 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를 외치며, 주말이면 이태원 뒷골목을 누비고, 해마다 비행기표 한 장을 끊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들어 온 청탁을 마다 않다가 골머리를 앓고, 운동(movement)과 운동(exercise)을 즐기고, 제 3세계의 경제를 위해 쇼핑을 해야 한다는 신윤동욱.

 

 <씨네21>의 편집장인 남동철의 말처럼 '세상을 쉽게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다수를 따르는 것(8쪽)'인데 그가 굳이 험한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택한 그 길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길만이 좋은 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저런 사람이 모두 모여 이루는 것이 세상 아닌가. 나 또한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라고 단언하고 싶지는 않다. 나 또한 때때로 '이건 아니잖아!'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 아닌가. 물론 말은 청산유수지만, 생각처럼 실천할 수 없을 때가 더 많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그는 대한민국 1퍼센트다. 돈 잘 쓰고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신바람내는 그 1퍼센트가 아니라, 그 자신의 말처럼 어찌 부르면 '또라이'라고 할 수 있는 소수자 1퍼센트다. 부모의 성을 함께 쓰고, 흑백논리에서 비켜나 회색지대에 서있으며,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고, 남들이 Yes를 외칠 때 No를 외치고 싶어하는 못 말리는 1퍼센트다. 역시 그것을 옳다, 그르다 라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 표현하기는 힘들다. 내가 타인의 눈치에 외면할 때, 그가 외쳤던 것들은 내가 항상 꿈꿔 왔던 것이니까. 단지 부러울 뿐이었다.

 

 특히 그가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난 얼마나 뜨끔해 졌던가. 때때로 고지식한 노인 흉내를 내며 원리원칙만 고수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근본부터 따지려 들지 않았는지……. 그야말로 '헉'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가지론자인 나는 종교의 근본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일상에서 내가 믿고 있던 근본들을 설파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문득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이야기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그를 비롯한 1퍼센트의 소수자들의 생각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너와 나의 마음 속에 꼭꼭 담아 두거나 비난만 하고 듣지는 않으려 했던 이야기다. 그의 칼럼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새롭다. 종종 그의 칼럼들을 읽어 왔지만, 이번처럼 그의 이름을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새겨 넣기는 처음이다.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 참 고맙다.

 

 마이너리티에게 존중을!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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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기념일
타와라 마치 지음, 신현정 옮김 / 새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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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타와라 마치가 스물에서 스무넷 사이의 사 년 동안 쓴 시들을 모은 시집이라 한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모두 기록한 듯한 이 시들 사이에서 그의 사랑법을 본다. 사랑할 때에는 조그만 것도 아끼고 기념하고 싶은 그의 마음, 끝낼 때에는 씁쓸하게 녹아버린 샐러드를 씹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안녕, 하고 인사하고 싶은 그의 마음.

 

- 「이 맛 좋은데」 네가 말한 7월 6일은 / 샐러드 기념일 (「샐러드 기념일」 144쪽)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들을 모조리 기념일로 만들어 버린다면, 언제나 행복한 날이겠지. 그가 샐러드 기념일을 말한 그 날은 매번 샐러드를 먹이고 싶을 테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난 후의 샐러드 기념일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별 시덥잖은 사랑놀음이겠지, 라는 생각에 책을 펼쳤을 때 놀랐다. 하이쿠인가, 라는 생각도 잠시뿐. 검색 끝에 와카(和歌)라는 것을 알아낸다. 일본 전통시의 5.7.5 리듬의 하이쿠에 7.7음이 덧붙여진 것이 와카란다. 한국어로 변역해서야 이 형태를 알 수 없잖은가, 라는 생각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여백도 많은데 그 자리에 원문을 실어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 끝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인상을 쓰며 후다닥 종잇장을 넘긴다. 몇 장을 더 넘긴 후, 순간 먹먹해진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뚫어져라 글자를 바라 봤다.

 

- 에노시마에서의 하루 / 서로 다른 미래가 있다면 사진은 찍지 말자. (「야구게임」 40쪽)

 

 이별 후 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보면, 씁쓸해진다. 짧은 두 구절로 인해 이리도 초라해질 줄이야. 그래, 난 이제 헤어짐이 짐작되는 사람과 같이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어느새 잊고 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오를 때, 문득 슬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진 속의 대화들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얇은 종잇장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서럽다.

 

- 나를 버리고 갈 사람이 / 내 사진을 열심히 찍는 석양녘 (「사람 기다리기」 123쪽)

 

 시간이 지나면 추억은 언제나 옅은 분홍빛이다. 새파랗던 하늘도 바다도 초록빛 녹음과 강가도 모두 옅은 분홍빛이다. 하지만 사진은 언제나 그 시간 속의 선명한 색깔을 되돌려 놓는다. 그런다고 해서 더이상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사진첩을 들쳐 볼 때면, 그것이 모지게도 쓴웃음을 삼키게 한다. 그래서 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지나간 사진을 늘 들춰보지 않는다. 그 순간의 감정이 유지될 때까지만 사진은 내 눈 속에서도 늘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일 뿐, 그 뿐이다.

 

-  「먹고 싶지만 날씬해지고 싶다」라는 카피가 있다 /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하기는 싫다 (「바람이 된다」 77쪽)

 

 꼭 연인이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야 늘 결핍되어 있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부담일테지만, 사랑하기는 싫어질 때가 있다. 그것이 귀찮아 질 때가 있다. 더이상이 감정 소모는 사양하고 싶어질 정도로 지치고 부담스러운 감정이 바로 그것이기에.

 

 타와라 마치는 유쾌하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기억 언저리에 남겨두고 한 두번 곱씹어 볼 뿐 영원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세대의 특징이고 상처의 증거이리라. 그래서 도쿄에 혼자 살고 있는 그에게 어머니의 말은 따끔하다.

 

- 연애는 하지 말라신다 / 혼수품의 하나인가 나의 노래는 (「좌우대칭의 나」 157쪽)

 

- 다정함을 잘 표현 못하는 것 / 허락받은 일인지 모른다 아버지 세대는 (「아침 넥타이」 60쪽)

 

 어머니에게는 그의 노래가 혼수품의 하나로 취급되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실토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서툴고 모자란 표현을 애틋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언제나 일상 속에서 늘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을 절실히 느낄 때의 감정은 언제나 눈물겹다. 서로의 감정을 솔직히 나누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고, 때때로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내 머리를 세 번 자른 미용사에게서 / 「처음이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앉는다 (「좌우대칭의 나」 154쪽)

 

 유난히 향수병이 심하다는 타와라 마치는 그래도 도쿄에서 독신 생활을 한다. 늘 가는 미용실에서 처음이냐는 질문을 받아도 그 곳의 공허함이 오히려 그의 쓰라림을 치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회색빛 건물들이 답답하고 쭉 뻗은 도로가 짜증스럽다고도 하지만, 내게는 그 어느 곳이나 똑같다. 시골에서의 달큼함도 도시의 시금털털함도 모두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타와라 마치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는 어느샌가 한 구석에 쌓아둔 감수성을 찌르는 의표가 있다. 유쾌발랄하게 떠들어대다가도 의뭉스레 얄궂은 미소를 짓는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문득 그가 스스로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자신을 사랑한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사랑이 그의 사랑과 같지는 않다. 이기와 치기가 섞인 내 사랑을 그와 비교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내 삶의 일부이고, 사랑의 과정이며, 성장의 통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상큼한 상큼한 과일 샐러드가 먹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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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기 매매의 원칙 - 미국 최고의 데이트레이더 15인의 성공비밀
M.프레드퍼티그, G. 웨스트, J. 버튼 지음 | 황보윤 옮김 / 청아출판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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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머리에 소개되어 있는 것과 당시 미국 최고의 데이트레이더 15명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인터뷰 내용은 데이트레이딩 방법과 전략, 그들의 원칙이나 패턴 등의 소개이다. 미국 책이라 단위 등이 한 눈에 알아 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요즘 시세대로 말하자면 스캘퍼이다. 즉 하루에 50번 이상은 물론 심한 경우 500번 까지도 트레이딩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이보다 더 오래된 책들은 주로 스윙이나 장기투자에 대한 말들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보다 한 단계 앞서 있었던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들이 말하는 것은 늘 비슷비슷하다. 그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캐치해내는 능력은 그들이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가 찾아야 할 몫이다.

 

 먼저 스캘퍼이든 스윙어든 장기투자가든간에 그들이 가져야 할 능력 중 하나는 주가변동을 예측하는 것이다. 또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있는 심리적 측면을 잃는 것이다. 또 손절매에 있어서 과감해질 수 있는 법, 시세가 오르락 내리락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특히 손절매에 관해 과감해지기란 쉽지 않은 법이라 흥미롭다. 먼저 그 방법은 실로 간단하다. 매수한 종목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세운 원칙이나 알고 있던 이론에 대입하지 않는 그래프를 그릴 경우 과감히 매도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론이 맞든 맞지 않든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이고, 일단 자신의 예측을 벗어나 손익을 보기 시작한다면 과감히 팔아 버려야 한다. 이론의 재적립은 차후에 생각할 문제라는 것이다.

 

 또 스스로를 아는 것은 늘 중요한 법이다. 자제력과 인내심, 겸허함 등은 투자뿐 아니라 세상살이에 있어서 큰 덕목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실수를 인정한 것이다. 앞서 말한 손절매의 원칙과 비슷하다. 자신의 이론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재수립해야 한다.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가타부타한 변명 즉 시세가 잘못되었다느니 종목이 이상하다느니 주가가 미쳤다느니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럴 줄 알았어'라고 어림직작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주가의 오르내림의 결과를 보고서 오를 줄 알았다느니 내릴 줄 알았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은 믿지 말라. 그런 사람들은 흔히 내일은 저 종목이 잘 될거야, 저 종목은 금방 내릴걸, 등의 말을 주절거리기 십상이다. 그 정도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게다가 직접 실천, 즉 투자한 후에 감정의 변화를 절제할 줄 알고 제때에 매수 매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그 자체는 해보지 않고서 모른다. 다음 그래프, 다음 시세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수백 수천 수만 수억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 끝에 내리는 결정들을 그 누가 종합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99% 정확한 이론이라 해도 한 번 비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원칙에 준한 자제력, 그에 따른 자신감이다.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실 지키기가 쉽지 않다. 특히 앞서 말했듯 손절매는 늘 고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순간 바로 주가는 널뛰기 시작한다. 그쯤되면 본전 찾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 농반진반으로 말하길, 투자에 성공하려면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절제력이 뛰어 나야 한다는 말이다. 내 돈이 눈 앞에서 나타났나 사라졌다 하는데,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투자를 하는 사람이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 한다는 전제가 마련되어 있기에 당연한 이치다.

 

 언제나 그렇듯 말은 쉽지만, 행동은 쉽지 않다. 알면서도 안 될 때, 속이 탄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란 사실. 물론 마냥 그것으로 위안하며 안심할 수는 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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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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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검색하다가 카프카를 두고 독일의 '이상'이라고 칭한 댓글을 보았다. 아, 그런가. 그제서야 문득 이 기묘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깨닫는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난해한 문장의 연속이다. 문득 내가 초등학생일 때 카프카의 <성>을  읽고 나서 화를 내면서 도서관에 반납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더 어린 시절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겠어, 라며 변명한다. 그리고 칭찬 한마디도 해줘야 겠다. 나 참 용감했구나, 라고.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나를 누군가 봤다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금세 눈물을 그렁거린다 싶으면, 이번에는 화를 내고, 다음에는 비식거리며 웃다가, 끝내는 인상을 쓰고, 음울한 눈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처럼 단시간내에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후 끝내 사체가 되고 말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소통의 단절과 그 속에서 오는 고독, 역겨울 정도로 쉰 내 나는 타인의 눈초리와 비난 속에서도 가정을 걱정하고 가족을 변명했던 그의 착각 속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야 평화로워진 잠자씨 가정은 끝까지 안온할 수 있을까. 사실 고백하건대, 벌레에 한센병을 자꾸 대입하게 되어서 그들의 가정사가 더 서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센병뿐 아니라 인간들이 모두 두려워하거나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대입해 보아도 좋겠다. 그러나 오해마라. 내가 지금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들이 아니다. 물론 그레고르도 아니다. 그렇게 만든 현실이다.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현실.

 

 이처럼 현실의 부조리는 「판결」이나 「시골의사」 「학술원에의 보고」 「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늙은 아버지가 익사형이라 판결을 내리자 그 명령에 따라 자살해 버리는 아들, 야간 비상종 덕분에 한시도 쉴 새 없이 모든 것을 억압당한 채 혹한 속에 맨몸으로 내쳐진 시골의사, 옭아맨 현실 속에서 좋을대로 정의내린 자유에 속박당하는 원숭이, 평생을 굴 파는 것에 소모하며 출구를 찾는 짐승 한마리.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억압되어 있다.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카프카. 그 탓인지 그가 쓴 글들은 대체로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상한 것은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다. 규칙과 법 등도 포함한 그 억압을 당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순종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규칙을 어기고 억압에 반항했을 때 쏟아질 비난과 고독이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문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곳곳에서 드러난다. 개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 타인과 맞설 수 밖에 없는 개별 존재에 대한 사유는 늘 고독하다. 그 개인의 결정은 언제나 스스로 정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마는 현실이야말로 카프카가 우려하던 세계가 아닌가. 이런 의구심을 못내 지우기가 어렵다.

 

 그가 토로하는 비애는 언제나 무겁고 격렬하지만 내부의 것으로 침잠되기만 하기에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째서 개인은 다수에 따라가야 하는가. 억압에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진리는 어째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가. 공동의 관심사와 공동의 선, 공동의 사상 등에 동조해야 하는가.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무섭다. 진실로, 소수를 외면하는 다수는 언제나 옳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이 못내 서글프다. 나는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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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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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검색하다가 카프카를 두고 독일의 '이상'이라고 칭한 댓글을 보았다. 아, 그런가. 그제서야 문득 이 기묘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깨닫는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난해한 문장의 연속이다. 문득 내가 초등학생일 때 카프카의 <성>을  읽고 나서 화를 내면서 도서관에 반납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더 어린 시절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겠어, 라며 변명한다. 그리고 칭찬 한마디도 해줘야 겠다. 나 참 용감했구나, 라고.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나를 누군가 봤다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금세 눈물을 그렁거린다 싶으면, 이번에는 화를 내고, 다음에는 비식거리며 웃다가, 끝내는 인상을 쓰고, 음울한 눈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처럼 단시간내에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후 끝내 사체가 되고 말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소통의 단절과 그 속에서 오는 고독, 역겨울 정도로 쉰 내 나는 타인의 눈초리와 비난 속에서도 가정을 걱정하고 가족을 변명했던 그의 착각 속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야 평화로워진 잠자씨 가정은 끝까지 안온할 수 있을까. 사실 고백하건대, 벌레에 한센병을 자꾸 대입하게 되어서 그들의 가정사가 더 서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센병뿐 아니라 인간들이 모두 두려워하거나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대입해 보아도 좋겠다. 그러나 오해마라. 내가 지금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들이 아니다. 물론 그레고르도 아니다. 그렇게 만든 현실이다.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현실.

 

 이처럼 현실의 부조리는 「판결」이나 「시골의사」 「학술원에의 보고」 「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늙은 아버지가 익사형이라 판결을 내리자 그 명령에 따라 자살해 버리는 아들, 야간 비상종 덕분에 한시도 쉴 새 없이 모든 것을 억압당한 채 혹한 속에 맨몸으로 내쳐진 시골의사, 옭아맨 현실 속에서 좋을대로 정의내린 자유에 속박당하는 원숭이, 평생을 굴 파는 것에 소모하며 출구를 찾는 짐승 한마리.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억압되어 있다.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카프카. 그 탓인지 그가 쓴 글들은 대체로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상한 것은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다. 규칙과 법 등도 포함한 그 억압을 당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순종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규칙을 어기고 억압에 반항했을 때 쏟아질 비난과 고독이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문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곳곳에서 드러난다. 개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 타인과 맞설 수 밖에 없는 개별 존재에 대한 사유는 늘 고독하다. 그 개인의 결정은 언제나 스스로 정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마는 현실이야말로 카프카가 우려하던 세계가 아닌가. 이런 의구심을 못내 지우기가 어렵다.

 

 그가 토로하는 비애는 언제나 무겁고 격렬하지만 내부의 것으로 침잠되기만 하기에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째서 개인은 다수에 따라가야 하는가. 억압에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진리는 어째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가. 공동의 관심사와 공동의 선, 공동의 사상 등에 동조해야 하는가.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무섭다. 진실로, 소수를 외면하는 다수는 언제나 옳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이 못내 서글프다. 나는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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