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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실망스러웠다. 총 173페이지.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뺀다면 이야기는 149페이지. 150페이지조차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의 몰입도는 상당하다. 짧은 글이기에 활자들은 더욱 폭풍처럼 몰아친다. 아버지를 시작으로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가 25년 전에 은퇴한 70세의 연쇄살인범 김병수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오고 그의 딸인 은희의 주위에 그녀를 노리는 연쇄살임범 박주태가 등장한다. 김병수는 과연 알츠하이머를 이겨내고 딸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야기가 스릴 있게 펼쳐진다.
난 시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내 살인의 과정을 정직하게 썼다. 첫 시의 제목이 '칼과 뼈'였던가? 강사는 내 시어가 참신하다고 했다. 날것의 언어와 죽음의 상상력으로 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듭하여 내 '메타포'를 고평했다.
"메타포라는 게 뭐요?"
강사는 씩 웃더니ㅡ그 웃음, 마음에 안 들었다ㅡ메타포에 대해 설명했다. 듣고 보니 메타포는 비유였다.
아하.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비유가 아니었네. 이 사람아.
간결하고 남성적인 문체의 속도가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철학적인 연쇄살인범의 일기는 인상적이다. 또한 날카로운 유머까지 담겨있다. 그러나 흥미롭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급정지 해버린다. 연쇄살인범의 회복기이자, 알츠하이머를 통한 인생의 회고이자, 딸아이를 지켜내는 스릴러인줄 알았던 소설은 충격적인 반전과 그에 이은 허무한 결말을 남기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살인자의 기억법에 눈에 띄는 단점이 있다면 이 소설이 '너무' 잘 읽힌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결말이 허무하게 느껴졌다면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문장들을 모두 인지하며 읽었음에도 나에게 이 소설은 너무나 '허무'했다.
'빛의 제국'을 쓸 당시에 김영하 작가는 말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르소설을 주로 파헤치는 나로서는 의견이 다르다.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너무' 잘 읽히는 것이 단점이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잘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일단 독자에게 재미를 안겨줘야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잡문이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철학이 아니라, 가독성을 통하여 독자들을 작품의 스크린 앞에 데려와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작품이 널리 읽히길 바라는 작가라면 응당 '어떻게 하면 잘 읽힐지',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재미있을지'를 생각하고 이야기를 그려내야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독자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을 바로 그때에 전해지는 것이다.
혼자 고고하게 존재하고 싶은 어려운 문학성이라면 아무래도 괜찮다. 그러나 '이해받기를 원하는 문학성'이라는 고고한 산 위에 머물며 누군가가 산을 올라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 위에서 스스로 내려와 산 아래의 대중들과 마주보고 널리 읽혀야 한다. 가독성과 문학성.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문학성이 이해받기 위해서는 그보다 가독성이 먼저이다. 가독성이 이야기의 구성이라면, 문학성은 그 구성 속에 담긴 메시지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에 빠져들게 만들었었던 첫 인상과 다르게 나는 이 작품이 아무래도 아쉽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겠지만, 온전한 이야기로서 마무리 지어진 것 같지 않다. 말하자면 마지막까지 탄탄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구성이 실망스러웠다.
처음 접하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는 여러모로 놀랐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심리와 반전을 통하여 독자에게 공포를 끼얹었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소설 같은 구성 속에 철학과 삶을 담아내었다. 문장은 거칠면서도 유머러스하여 악질적인 농담 같은 문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속에 담긴 오디세우스, 톨스토이의 일화를 생각나게 만드는 일종의 패러디 역시 김영하 작가의 센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좋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가 아쉽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타인의 피를 이해하지 못한 책 읽는 게으름뱅이다. 그러나 책 읽는 게으름뱅이가 없다면, 책을 쓰는 초인도 없다.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