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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오 리 길에 하늘만 푸르러."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다 부르고 나서도 가슴이 꽉 막혀서 나는 한동안 숨을 쉬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가 내 등을 투닥거렸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물었다.
"갈 데는 있어?"
"없어요."
나도 소근거렸다.
"그럼 여그서 그냥 우리랑 살자."
할머니가 조금 전보다 더 은밀하게 속삭였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다. 그냥 눈물이 핑글 돌았다.
"좋아요."
"이름이 뭐여?"
나는 이름을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말했다.
"누가 물으면 인자부터 영란이라고 해불제 뭘."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씨익 웃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남은 파를 마저 다듬기 시작했다.
아들을 사고로 잃고 연달아서 남편까지 잃어버린 여자는 빵과 막걸리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나날을 보낸다. 집도 없어져 이제 있어야 할 곳이 없어져버린 그녀는 남편의 지인이었던 소설가 이정섭을 만나 얼떨결에 목포까지 따라가게 되어버린다. 이정섭과 헤어지고 도착하게 된 '영란여관'에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남편과 아들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려고 하던 그녀에게 영란여관의 식구들은 웃어주며 '영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렇게 그녀는 영란이 되었다.
정섭은 완규가 제 마음의 갈래를, 제 마음의 길을, 제 마음에 부는 바람을 가만히 응시하길 바랐다. 가만히 응시하면서, 제 마음에 이는 변화를 사랑하기를, 그 사랑의 기운으로 그의 삶이 늘 아름답기를,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고 이 세상 누구에게도 타인의 아름다운 삶을 훼손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남편과 아들을 사고로 잃고 다가오는 사랑에 설렐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여인. 아내와 딸아이에게 신뢰를 잃고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되어버린 남자. 어머니 없어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녀, 자신을 사랑하던 친구를 배신하고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삶을 수렁으로 몰고 간 남자..... 이들은 모두 삶의 힘겨움과 과거의 상처에 가슴이 먹먹해지게 울고 슬퍼하면서도 '목포'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 책은 슬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지를 그려낸 소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고 바로 그런 순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끝내 미움보다는 사랑을 선택하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선옥 작가의 문장이 콕하고 가슴을 파고든다. 이 작품에는 온갖 상처와 고통의 삶이 들어있다. 사별의 상처 때문에 다가오는 사랑에도 설레지 못하고, 남을 상처 입히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는 영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울적함과 슬픔이 밀물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결코 슬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수하고 정겨운 목포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 를 지택하는 모습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영란의 모습을 보며 위로와 구원을 받는다. 밀물처럼 들어온 슬픔은 아련한 애특함을 남기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나는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기를 바란다.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슬픔을 방치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다. 내 글의 독자들이 슬픔을 돌보는 동안 더 깊고 더 따스하고 더 고운 마음의 눈을 얻게 된다면,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더욱 굳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슬픔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으로서, 많이 기쁠 것이다.
- 작가의 말 -
문장 그 자체에 감탄한 작품은 오랜만이었더.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가슴속에 애틋함을 남겨놓았다.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았던, 때로는 정겹고, 때로는 유쾌하기도 하였다. 최근 읽은 어떠한 힐링 소설보다도 힘들고 지친 마음을 뒤흔들어 위로해준 소설이다. 결국 사랑 하나 얻지 못한 영란의 모습을 보면 아쉬움도 느껴지지만, 결말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 재회가 상처받은 두 사람에게 구원이 되기를....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