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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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인 요코야마 히데오(橫山秀夫)는 2003년 사라진 이틀(半落ち)이라는 작품으로 일본 최고의 대중문학 상인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지만 "현실성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낙선했음에도 각종 미스터리 문학상 1위를 거머쥐며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자 평론가들은 독자까지 비판, 이에 요코야마 히데오 작가는 나오키상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런 작가가 10년동안 집필하여 2013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와 일본 서점 대상 2위를 따낸 작품이니 궁금할 수밖에...


 책을 처음 받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예상보다 두배는 무거운 무게, 700페이지에 달하는 페이지 수에 눈알이 핑글핑글 돌았다. 과연, 내용은 모르더라도 볼륨만큼은 정말 '10년'이었다. 펼쳐보기도 전부터 부담이 되어 현기증이 났다. 그래도 안 읽어볼 수는 없는 일이라 무겁게 표지를 넘겼다. 그런데 이 부담은 딱 50페이지 정도까지만 계속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책에 빠져들어 벗어날 수 없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정말 수준이 높다.'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와 언동을 신경쓰며 조심스럽게 진행되어 나가는 속 깊은 이야기가 정말 수준이 높다. 서로의 심리를 읽고, 언론과 대립하고 조화하며 과거의 미해결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홍보담당관이자 '진짜 형사'의 이야기이자 가출한 딸을 그리며 붕괴되어가는 가정과 그 속에서 아내를 신경쓰는 남편이자 아버지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그런 '속 깊음'이 빛난다. 이 소설은 단순히 볼륨만 '10년'이 아니라 그 재미와 깊이마저도 '10년'에 어울린다.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7일 만에 막을 내린 쇼와 64년은 새로 찾아온 헤이세이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신기루 같은 해였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범인은 그 쇼와 마지막 해에 일곱 살 소녀를 유괴, 살해한 뒤 헤이세이의 새로운 세상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64는 맹세와 다짐의 기호였다. 이 사건은 헤이세이 원년의 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범인을 쇼와 64년으로 데려와 무릎을 꿇리겠다.


 오랜 세월동안 형사부에서 실적을 올리며 형사로서 살아오던 '뼛속까지 형사'인 주인공 미카미는 어느 날 인사 이동을 당하여 형사부를 벗어나 경무부의 홍보담당관이 되어버린다. 홍보부는 언론과 직접적으로 마주보는 곳이기 때문에 밖으로는 언론의 의심을 받고, 안으로는 '한 가족'들의 의심을 받는다. 그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미카미는 항상 형사로서만 살아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홍보실에서 2년 정도 일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전과'는 다시 형사부로 돌아온 다음에도 그의 이름표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에는 지금 원하던 것과는 거리가 먼 홍보담당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아카마의 말을 따르면 홍보실은 2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이제야 조금씩 틀이 잡혀가는 개혁을 계속하고 싶었다. 물거품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바깥공기를 직접 쐬었기 때문이리라. 형사 시절에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찰과 사회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높은 벽이 존재한다. 홍보실은 바깥 세상과 이어진 유일한 '창'이었다. 아무리 언론이 편협하고 이기적일지라도 안에서 창문을 닫아버리면 경찰 조직은 완전히 사회성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개혁'을 이룰려고 한다. 기자들에게 솔직하게 다가서서 언론과의 대립을 최소화하고 사회로 이어진 '창'을 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미카미의 딸이 가출해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26만명의 경찰들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상사에게 '복종'을 하게 된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딸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며 언론을 향해 열어놓았던 '창'을 굳게 닫고 기자들은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식구였던 형사들에게도 의심을 받고, 같은 홍보실의 부하들에게도 손님 취급을 받으며 힘겨워한다.


 그렇게 언론과 대립하는 사이에 '경찰청장의 방문'이라는 D현경 전체를 뒤흔들만한 예정이 생긴다. 청장의 방문을 이루어내기 위해 홍보담당관으로서의 일을 하던 미카미는 14년전 미해결 사건으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쇼와 64년에 일어난 일명 '64'라는 사건과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들쑤시고 다니는 동기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파헤쳐나가며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이 드러난다면 형사부는 물론 D현경 전체가 무너질만한 숨겨진 진실, 그리고 그것을 노리고 형사부와 D현경을 파헤쳐 장악하려는 청장의 의도, 형사부와 경리부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져 D현경의 내부는 혼란스럽게 뒤얽힌다. 그 사이에서 과거에는 뼛속까지 형사였고, 지금은 홍보담당관인 미카미는 고심한다. 자신의 행동 하나로 형사부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과거 미해결 사건인 '64'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64(ロクヨン)라는 소설은 범인을 잡아내는 형사가 등장하는 형사 소설이 아니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범죄 수사나 사회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다른 형사 소설과 달리 그는 형사 개인의 이야기보다 '경찰'이라는 조직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구성원들의 고뇌를 세심하게 그려낸다. 범죄 소설 속에 조직의 폐부와 갈등을 녹여내며 그 복잡하고도 어려운 갈등과 사건 속에서 점점 성장해나가 결국 '바깥'과 진심으로 마주하게 되는 '진짜 형사'. 미카미의 성장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찰 소설의 고리타분함을 지금까지 뼈아프게 느껴왔던 개인으로서는 범인 검거와 사회문제 고발과 같은 것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관계와 갈등을 중점적으로 다룬 속 깊은 이야기를 펼쳐내는 이 '64'라는 소설에 일종의 문화적 충격까지 느꼈다. '이렇게 탄탄한 소설이 있을 수 있구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미카미는 무슨 생각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가? 형사부가 숨겨 온 진실과 그동안 믿어왔던 형사부장에게 분노하는 것보다 먼저 '내가 형사부로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한다. '징악'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익을 탐한다. 2년 정도 홍보담당관 자리에서 버티다가 다시 형사부로 복귀하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인의 이기심을 얼마나 섬세하게 그려내는지 놀랍다. 숨겨온 진실에 대한 증오와 사회 정의 실현이 '소설에서 조차' 떠오르지 않은 것은 굉장히 아쉽지만, 그렇기에 이후에 보여지는 미카미의 성장이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왜 신경을 쓰느냐고?

 "저는 올봄까지 형사부에 있었습니다. 24년 동안 형사고 살았고, 그러한 경험에서......"

 "아, 그래서......"

 형사부를 편드는 거였군. 그런 말을 들은 줄 알았는데 환청이었던 모양이다.

 "구두 말이야, 자네 구두. 처음에 들어왔을 때 무척 지저분하다고 생각했어."

 구두? 지저분하다고?


 장래의 경찰청장에게 쳐들어간 미카미가 들은 '구두'에 대한 지적은 이 책에 담긴 주제 중에 한가지를 꿰뚫는다. 이 질문이 마지막 장의 '새것은 아니었지만 정성껏 닦은 검은 가죽 구두'로 이어지는 구성은 얼마나 감탄스러운가.


 호리호리한 뒷모습이 옥상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나서 미카미도 걸음을 내디뎠다. 구두는 비들비들했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의 무게 역시 그러하리라.


 위에서는 '형사 소설'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이것이 형사 소설일지도 모른다. 형사에서 벗어났음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소명을 다하는 '진짜 형사'들의 모습이 정말 멋지게 그려진다.


 익명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벽 너머에서는 아무리 기상천외한 이야기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당당하게 걸어 다닐 수 있다. 그 어떤 전개도 용납된다.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익명이란 전능한 신이며, 무한의 선택지를 허용하는 구조는 망상 그 자체다.

 실명의 무게.

 단순히 홍보실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의심을 먹으며 수없이 증식하는 '익명'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더는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회 고발'적인 요소조차 빼놓지 않는다. 가해자를 보호하는 '익명'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홍보담당관인 미카미에게 쏟아지는 기자들의 의심과 경찰 내부의 편협함을 통해서 강렬하게 보여준다.


 '64'라는 유괴살해사건으로 시작했던 이 소설은 마지막에 다시 한번 유괴 사건으로 수렴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그 구성 또한 감탄스럽지만 '64'라는 미해결 사건을 쫓아가면서 예상할 틈 없이 등장하는 반전과 미카미의 자식을 잃은 오열이 깨닫게 한 마지막의 충격적인 진실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14년 동안 범인을 잡기 위하여 보는 사람마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당신이 64의 범인인가?"라고 묻고 다니던 형사와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피해자. 안타까움에 가슴이 미어진다.


 "다시 같이 일해보지 않겠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카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대답했다.

 "때가 되면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그 복잡한 인간관계와 갈등을 헤쳐나가며 느낀 재미도 재미지만, 그 속에 담긴 깊은 내용과 주제, 그리고 탄탄한 이야기 구성이 감탄스러운 책이다. 정말 수준이 높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불완전한 마무리에는 큰 아쉬움도 느껴졌다. 의도는 알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징악과 행복한 결말을 바랬기에...


 '64'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모두 읽고나니 사건과 반전은 머리속에서 사라지고 그 뒤의 인간군상과 깊은 여운만이 남게 되는 이 '64'라는 소설은 근래에 읽은 소설 중 최고의 깊이를 지닌 작품이라고 감히 말하고싶다. 그렇기에 더욱 무겁고, 언듯 부담스럽게 보일 수 있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모두 읽고 난 후에 느껴지는 깊은 사색과 감동은 거짓이 아니기에.


◇ 이 64는 2013년 서점 대상 2위를 수상했는데, 이전부터 그랬지만 왜인지 서점 대상 작품은 1위보다도 2위에 더욱 큰 관심이 생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지는 나 자신도 명확히 대답할 수 없지만. 최근에는 왜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많은지, 몸이 너무 바쁘다. 행복한 고민ㅋㅋ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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