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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동화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GOTH>로 시작했고 얼마 전 <ZOO>로 접하게 된 오츠이치(乙一)이지만 사실 그에 대한 이미지는 '범작을 뽑아내는 작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바꾸게 만든것이 2001년에 간행한 이 <암흑동화(暗黑童話)>라는 작품이다.
16세의 나이에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로 데뷔한 이래 출간하는 작품마다 '상상을 불허하는', '유래 없는'이라는 수식이 따라다닌 천재 작가 오츠이치의 첫 장편소설. 문장이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상미가 느껴지는 필치, 공포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애수가 깃든 감수성으로 정평이 난 젊은 작가가 이번에는 공포와 함께 처연한 슬픔이 느껴지는 유래 없는 ‘동화’로 우리 곁을 찾는다.
갑작스러운 사고의 쇼크로 기억과 왼쪽 눈을 잃어버린 여고생 나미는 반의 중심이었던 예전과 달리 학교에서 지독한 소외감에 시달리는 한편, 사랑받아야 마땅한 어머니에게서조차 완전한 타인으로 취급받는다. 그녀는 망가진 외모를 회복하기 위해 이식 수술을 받게 되는데, 새로 얻은 눈은 놀라운 영상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던 나미는 새로운 왼쪽 눈동자가 떠올리는 놀라운 풍경에 전율하며 빠져드는데….
이전 <GOTH>나 <ZOO>의 몇몇 단편에서도 생각했지만 오츠이치(乙一)는 단순히 어두운 이야기보다는 어두운 소재를 가지고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즐기는 듯 하다. <GOTH>, <ZOO>에서도 느꼈지만 이번 <암흑동화(暗黑童話)>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로테스크한 소재와 싸이코패스, 어두움을 다루고 있으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단순히 호러 소설이라는 느낌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초반에는 <암흑동화(暗黑童話)>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루하고 무언가 식상하고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면 이 이야기는 너무나 달라진다. 기억 상실을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주변의 시선과 일그러진 현실에서 고통받는 주인공 나미와 '나와 다른 나'를 맛있게 표현한 오츠이치(乙一)의 색다른 심리 묘사가 좋다. <눈의 기억>이라는 소설 속 소설로 표현한 범인의 심리 묘사나 표현력이 훌륭하다. 상황을 착각하도록 독자를 유도하다가 후반에 반전에 반전을 만들어내는 테크닉이 너무나 놀라워 뒤집어질 정도다. 판타지, 그로테스크, 사이코패스 소재가 섞인 사건 자체와 반전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이 책의 주제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눈을 이식받은 소녀가 눈에 담긴 기억을 따라가며 느끼게 되는 '무언가'이다. 따뜻함, 행복, 사랑. 이미 죽은 자를 그리워하며 느끼는 상실감과 그리움. 그 애절함과 감동을 책에 담아냈다.
몸에 말뚝을 박고, 칼로 째고, 내장을 몸의 바깥으로 벗겨서 안쪽과 바깥쪽을 반대로 바꾸고, 팔다리를 잘라버리기도 하고, 유혈이 낭자하지만 누가 이 책을 읽고 누가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상과는 다른 <암흑동화(暗黑童話)>에 감탄했다. <GOTH>가 2002년. <ZOO>가 2003년에 출판되었으니 출판 순서를 생각하면 퇴화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 슬퍼지기도 하지만 이 순간 오츠이치(乙一)의 글이 더욱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