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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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10명의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구덩이 삼면을 에워쌌다. 나머지 둘은 스키 폴만큼이나 긴 죽창을 쥐고 철장 문을 열었다. 덤프의 적재함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들이 구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몇 마리씩, 곧 무더기로 떨어진 개들은 곧장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누워 자빠진 동료의 몸을 딛고 서로의 머리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구덩이를 에워싼 군인들은 착검한 총 끝으로 개들을 찍어서 구덩이로 다시 떨어뜨렸다. 죽창 군인 둘은 철장 벽에 붙어 버티는 개들을 창으로 찍어 떼어냈다. 큰 개, 작은 개, 검은 개, 흰 개들이 눈을 찍히고, 뱃가죽이 뚫리고, 등이 꿰인 채 핏물을 내뿜으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구 한 마리가 창살을 발로 움켜쥐고 버둥거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피투성이가 돼서 구덩이로 떨어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선 굴삭기가 구덩이를 덮기 시작했다. 개들은 떨어져 내리는 흙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 울음이 윤주에겐 사람의 말로 들렸다.

 

살려주세요.

 

흙덮기가 끝났다. 굴삭기와 군인들이 떠났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는 벌판 밑에선 개들의 비명이 들끓었다. 땅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온 벌판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정유정, 《28》, 은행나무, 2013, 240-241면)

 

[북 리뷰]

 

《7년의 밤》의 작가 정유정이 신간을 냈습니다.

 

 

 

 

 

 

 

 

 

 

앞에 뽑은 [이 한 대목]으로 눈치 챈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선 2010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휩쓴〈구제역 사태〉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나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을 살처분(산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것)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데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그 동영상을 보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있었을 정도이니 그 끔찍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괴물과도 같은 전염병에 일격을 당함으로써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 차단된 도시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처절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가상의 도시 이름이 ‘눈부신 햇빛’[화양]이라는 것 때문에 ‘빛고을’인 〈광주〉를 또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페스트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도시 오랑시에서 동기야 어찌됐든 아름다울만큼 치열하게 구조활동을 벌이는 인간군들의 휴머니즘이 한껏 발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페스트》를 떠올렸습니다.

 

2014년 1월 말, 가상의 도시인 경기도 화양시에서,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없는, 걸리면 회복 불능인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발생하여 28일간 도시를 지옥으로 만듭니다.

 

화양華陽시.

다섯 개 산과 열두 개 봉우리 안에 들어앉은 분지도시로 도로 하나로 서울 북쪽과 내통하듯 몸을 맞댄 도시의 하늘이 갑갑한 도시입니다.

 

서재형(35).

알래스카의 개썰매대회에 참가한 서재형은 고립무원의 설원에서 굶주린 늑대떼를 만나 썰매를 끄는 개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목숨을 구합니다. 귀국한 서재형은 11년이 지난 지금 ‘드림랜드’라는 유기동물보호소 겸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가 돼 있습니다. 동물을 포함한 ‘생명을 향한 진정어린 애정’으로 여론과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어 후원단체까지 생겨납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28면)

 

김윤주.

쌩촌 닭집 딸로 자라 신문기자가 된 김윤주는 진정 동물을 사랑하는 서재형이 잔인하고 비인간적 개썰매 대회 참가자이며 개들의 죽음을 담보로 목숨을 구한 인간임을 말해주는 자료를 익명의 제보자에게서 받아 그것을 폭로해 서재형을 졸지에 비열한 인간으로 매도합니다.

 

박남철

화양의료원장이며 여러 마리의 개를 기릅니다. 집에서, 식구들에게는 그가 곧 법입니다.

 

박동해

박남철의 아들. 형과 여동생에 비해 똑똑하지 못하다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애정결핍자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끼는 개를 잔인하게 린치하여 죽이려 합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돼있습니다.

 

한기준

화양 동부소방서 구조팀장으로 부인(박은희)과 딸(한유빈)이 개떼에게 물려 죽는 참사를 당합니다.

 

만호공파 노기사, 노수진, 노현진.

노기사는 한기준이 설악산 등반 중 급거 귀대할 때 얻어 탄 화물차 기사이고 수진, 현진은 쌍둥이로 수진은 화양의료원 간호사이고 현진은 학사장교 출신으로 화양시에 투입된 11공수 장교입니다. 수진은 한기준의 아내와 딸이 개떼에게 물려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들을 병원으로 옮겨 왔습니다.

 

쿠키.

박남철의 개로 아들 동해가 린치를 가해 죽이려 하는 것을 서재형이 구해와 함께 지내는 썰매개입니다.

 

스타.

정신 나간 개 수집광의 지하실에서 구출한 썰매개로, 방향을 찾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링고.

챔프 투견장에 끌려가 너의 죽음이 곧 내 삶임을 터득한 팀버 울프로, 늑대의 야성을 지니고 있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개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 전염시키는 괴질, ‘빨간 눈’이 속수무책으로 인수人獸 구분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화양시에서 신기할 만큼 ‘촘촘하게’ 얽히고설키는 이들 사이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입니다.

 

《7년의 밤》때에도 그랬지만 역시 정유정 작가는 한편의 장편소설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7년의 밤》, 그 내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필연의 얼개를 갖추지 않고도 어쩌면 이렇게 소설을 짜임새 있게,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아주 〈재미있게〉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착착 들어맞는 게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왜 그렇지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젊었을 때 야구선수였고 자리가 바로 ‘포수’였습니다. 저렇게까지 용의주도할 수는 없을 텐데, 논리적일 수는 없을 텐데 하는 선입견을 내가 매번 떨쳐 낸 것은 바로 야구경기에서 ‘포수’가 하는 역할을 주인공이 사건/스토리의 흐름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계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게 아니라 포수였던 주인공이 스토리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28》도 전작 못지않은 짜임새를 갖추고 재미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순서를 트집을 잡는 데서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속에 나타난 서재형의 성격으로 보아 다큐멘타리를 제작할 때 개썰매 대회 이야기를 감췄다는 것이 많이 생뚱맞습니다. 그것이 꼭꼭 숨겨야 할 범죄행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를 살리자고 사람이 죽는다? 이게 권장할 일입니까. 사람과 개들 중 한 쪽은 죽어야 한다면 개들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었을까요?

 

김윤주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썰매 대회의 참사를 제보 받고 그것을 숨긴 서재형을 못돼먹은 개장수로 전락시켜야 했을까요, 소설 속에 드러난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왜 그 사실을 서재형이 말하지 않았을까, 파렴치한이라서 이었을까, 드림랜드를 운영하면서 한 일로 보면 자기 방식으로 죽은 개들에게 속죄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 사고는 서재형의 비열한 인간성이 불러온 참사가 아니라 불가항력으로 다가온, 지울 수 없는 그래서 꺼내기 싫은 깊은 상처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을 것 같습니다.

 

소설을 알래스카 설원에서 열리는 개썰매대회라는 이국적이고 낯선 장면으로 시작하고 늑대의 공격을 받아 일어난 참극을 덧붙임으로써 작가는 독자를 단숨에 소설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작가는 이 참극을 주인공의 상처가 아니라 씻을 수 없는 파렴치한 죄과로 사용합니다. 〈착한 사람인지 알았는데 나쁜 과거가 있더라〉,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주 흔히 써먹는 통속적 수법입니다. 주인공의 상처가 드러날 때 독자들이 비극성을 느끼지 파렴치함이 드러나면 모멸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이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비가 걸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 알래스카 설원에서의 참사를 이렇게 쉽게, 통속적으로 사용했는지 나는 많이 아쉽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서재형에게 참사가 있었다-귀국하여 수의학을 전공해 동물병원을 차렸다-생명에 대한 진정한 애정으로 주변의 호감을 샀다-참사가 매도되는 바람에 파렴치한으로 추락하다’

 

‘빨간 눈’ 사태가 벌어지자 이런 과정이 있었으나마나가 됩니다. 참사를 폭로함으로써 서재형을 매도한 김윤주 기자와도 갈등하는 관계 설정 없이 그냥 사건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갑니다. 서재형에게는 일생일대의 문제가 작가에게는 흥미진진한 도입부를 위한 소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한기준은 화물차 기사 만호공파 노씨의 트럭을 얻어 타고, 노씨의 딸인 간호사 노수진은 한기준의 아내와 딸 참사를 목격, 그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으로 관계를 설정한 것이 우연 같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할 경우 특성상 등장인물을 느슨하게 늘리기보다는 최소한으로 해 관계를 얽히고설키게 하려는 치밀한 계산으로 읽힙니다.

 

아마 이러한 트집들은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준 다음의 뛰어난 업적에 비하면 사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한편에는 개들이 아내와 딸을 물어 죽인 ‘한기준’, 애정결핍자로 사이코패스가 돼 아버지가 아끼는 대상을 망쳐 놓으려는 ‘박동해’가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사랑하는 스타를 인간에게 잃은 야성의 늑대개 ‘링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오로지 ‘복수’입니다. 다른 점은 한기준과 박동해는 복수의 대상이 무분별합니다. 한기준만 해도 아내와 딸을 어느 개가 물어 죽였는지 제대로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링고는 복수의 대상이 선택적입니다. 스타를 해친 상대로 제한돼있습니다(물론 개들을 살처분하는 장면을 목격한 다음에는 링고의 〈분노의 절정〉내용이 달라져 개의 원수는 인간으로 설정돼 복수의 대상도 인간 일반으로 넓혀집니다). 또 하나 공통점은 모두가 ‘동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점은 한기준과 박동해는 ‘인간’이고 링고는 ‘개’라는 점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이 드러나는 게 바로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복수의 방식〉에서입니다.

 

북 리뷰의 시작에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2010-2011년의 〈구제역 사태〉,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고 했습니다(책 말미에 있는〈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시놉시스를 쓴 건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접하던 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제역 사태’를 연상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5월의 광주’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광주 전역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길과 비교할 때 화양에서 있었던 ‘빨간 눈’에 맞선 싸움의 내용이 지리멸렬한 게 아니냐 할 수 있고 틀린 지적도 아닙니다.

 

나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5월의 광주’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내비친 것으로 생각하며, 바로 그것을 통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을 읽습니다. 지금-여기의 현실세계에서 돈과 정치의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를 작가는 꿰뚫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폭력에 맞선 저항세력이 사라진 적은 없으나 결국은 〈구색 맞추기 용〉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 하는 뼈아픈 절망감에서 작가가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5월의 광주’에서 저항한 시민의 진정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판세는 결판 나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구제역 사태’에서 벌어지는, 살처분을 포함한 기가 막힌 일들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모멸감을 맛본 것 아닐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소설이 엮여지는 바탕 같습니다.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끔찍하지만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지금-여기의 인간세계에는 당위에 대한 성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로지 생존만이 남아 있다.”

 

등장인물 서재형을 소개하면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28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인용문입니다. 서재형은 이상향을 그려놓고 막상 자기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무리 짓습니다. 아마도 누구든 한 인간이라도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이미 그 세계는 〈꿈의 나라〉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겠지요. 한기준을 구하고 링고와 함께 죽는 서재형,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

 

서재형은 〈꿈의 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한 생명〉으로서 이었을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읽는 것도 재미있는 책읽기의 한 방식일 것입니다.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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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응 서정시학 서정시 107
이하석 지음 / 서정시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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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냇가에서 대 무늬진 돌을 주워 ‘동풍’이라 이름 짓고

 

속속들이 두근대는 동부새*에, 상기** 성깔 남은 소소리바람에, 짐짓 명랑한 듯 퍼덕이는 동풍에 휘는 - 꼿꼿하게 휘는 - 겨울, 대나무들. 누워서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마디마디 곧게 설레는, 동부새에 소소리바람***에 동풍에 눕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디마디 한 마디로 일어나는 대나무들의 푸른 물음들. 봄으로 쓸리는, 서걱대는, 헛될 수 없는 말의 카랑카랑한 잎사귀들. 동부새를 소소리바람을 동풍을 안으려 흰 겨울 비탈에 서는 이가 그렇게 온몸 흔들며 안간힘 하며 휘젓는 칼날의 춤. 마구, 또 기어이 일어나 제 온몸의 빗자루로 서서 성긴 적멸의 어둠을 쓴다.

(이하석, 《상응》, 서정시학, 2011, 29면)

 

*동부새 : 농촌에서 동풍을 일컫는 말. 특히 첫가을 동풍을 ‘강뫼바람’이라 한다. 동풍의 뱃사람 말은 ‘샛바람’

**상기 : 아직

***소소리바람 : 이른 봄에 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맵고 찬바람. ‘소소리 + 바람’ 짜임새로 ’높이 휘몰아치는 바람‘이란 뜻도 있어 ‘회오리바람’이라고도 한다.

 

“어느 날, 청도 냇가로 탐석探石을 나간 화자/시인, 대나무 무늬가 박힌 문양석紋樣石을 발견합니다. 문양석 속으로는 대나무와 함께 그 대나무를 ‘꼿꼿하게 휘게 하는 동부새, 소소리바람, 동풍도 함께 들어가 박혔습니다. 바람들에 쓰러지는듯하지만 이내 마디마디로 일어나는, 쉴 새 없는 대나무의 푸른 물음들, 언제라도 기죽지 않는 대나무의 잎사귀들, 온갖 바람에 맞서 온몸으로 추는 칼춤도 문양석 속에는 선명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문양석 속의 대나무, 자기를 빗자루로 만들어 돌 속에 촘촘히 박혀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쓸어내고 있습니다.

대나무와 그 주변의 삶이 따라 들어간 수석壽石의 세계, 염결하면서 서늘합니다.”(정승옥)

 

[더 읽기]

 

품격 있고 단아한 시어/시문을 벗어나지 않으며, 구체적인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는(쉽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지만) 시를 쓰는 송재학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이 시의 시안詩眼으로 ‘두근대는’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동부새 뿐 아니라, 소소리바람, 동풍, 나아가 겨울 전체를 꾸민다고 했습니다(시집 65면). 동부새나 소소리바람, 동풍이 모두 바람이고 화자가 제안한 수석 안 풍경의 계절이 겨울이기에 겨울까지 꾸민다는 송 시인의 해설은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두근대는’은 동부새를 꾸미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속속들이 두근대는 동부새,

상기 성깔 남은 소소리바람,

짐짓 명랑한 듯 퍼덕이는 동풍,

 

이 세 가지 바람이 대나무를 휘게 합니다, 꼿꼿하게.

 

겁 많고 수줍은(속속들이 두근대는)/ 여전히 기죽지 않고 사나운(상기 성깔 남은)/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짐짓 명랑한 듯 퍼덕이는) 생물계의 성품들을 세 바람을 불러내 맡긴 것 아닐까요. 소소리바람은 그렇다 해도 같은 바람인 동부새와 동풍을 굳이 갈라낸 것을 보면 어떤 고의성이 엿보입니다.

 

이하석 시인은 자연과 나, 자연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꿈꾸고 시작을 통해, 자기가 쓴 시안에서 양자 간의 소통을 읽어내려 애씁니다. 이 시인은 자연에 비해 사람이 왜소한 존재라는 것은 진즉 알았기에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는 것으로, 자연을 닮으려 애쓰는 것으로 족해 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 시를 인간세계에 대한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모습 그 자체로 읽고 싶습니다. 빛과 그림자는 사람 세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도 스며있는 듯합니다. 두근대고 성깔 있고 명랑한 것 뿐 아닙니다. 안간힘으로 버티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한쪽으로 쓸리기도 하고 서걱대기도 하며 카랑카랑하기도 합니다. 비탈에 서기도 하며 바람을 감싸 안으려하는가 하면 “온몸 흔들며 안간힘 하며” 날카롭게 칼춤을 추기도 합니다. 쓸어내야 할 죽음의 어둠도 자연의 세계에는 존재합니다.

 

다시 한 번, 빛과 그림자.

 

젊은 시인

 

백지 같지만 아주 희진 않고

황촉규마냥 솟아 큰 꽃 환히 피울 듯 고개 들고 두리번거리며

무엇에건 잘 슬피 물들고, 그래도 늘 깨끗하게

보인다, 본다.

 

절망도 젊은, 약은 점쟁이 같으니라구.

그의 언어는 가슴에서 나오다가 어깨를 돌아 날이 서서

우리 뒷덜미 치며 바람처럼 머리칼 흩뜨린다.

어떤 말이든 무슨 강이건 막말로 맨몸으로 건너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하석, 《상응》, 서정시학, 2011, 40면)

   

“백지 같지만 아주 희진 않고

황촉규마냥 솟아 큰 꽃 환히 피울 듯 고개 들고 두리번거리며

무엇에건 잘 슬피 물들고, 그래도 늘 깨끗하게

보인다, 본다.”

 

순도 100퍼센트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삶의 때가 약간 묻었을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촉규 꽃처럼 환하게 활짝 피었다 싶으면서도 세상 물정에는 아직 한참을 멀었다 싶기도 합니다. 감동도 잘하고 눈물도 많지만 이해관계를 떠나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세상을 보고 또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도 합니다.

 

“절망도 젊은, 약은 점쟁이 같으니라구.

그의 언어는 가슴에서 나오다가 어깨를 돌아 날이 서서

우리 뒷덜미 치며 바람처럼 머리칼 흩뜨린다.

어떤 말이든 무슨 강이건 막말로 맨몸으로 건너간다.”

 

첫 행이 재미있습니다. 젊은 절망이니 바닥없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머지않아 벗어날 절망이고 약은 점쟁이이니 치명적인 앞날을 예고하나 (복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반드시 헤쳐 나갈 길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 시인의 시어/시문, ‘초고草稿는 가슴에서 만들어져 따뜻하고 감성적이나 퇴고推敲과정을 거치면서 “날이 서고 뒷덜미를 치며 바람처럼 머리칼을 흩뜨”리는 시문, 막말 수준으로 거칠기도 하지만 꼿꼿하고 거침없는 완성본으로 만들어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 무엇도 이해 못할 게 없다는 듯,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없다는 듯, 이제 그의 시는 관조적이 되었고 세파에 초연해지고 무슨 일에도 놀라는 일이 없게 됐지만 그게 눈이 밝아지고 시야가 넓어진 덕분이 아니라 삶의,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탓입니다.

 

젊은 시절, 다신 되찾지 못합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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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예술 -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길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심보선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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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프랑스에서 점점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은 늘어나는데 이들은 되도록 대학의 연구실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이 생산하는 비판 담론은 이들의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 의해 정당화되고 역으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할 뿐 정치적 실천과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교수들인 신문 칼럼니스트들의 논조는 우파든 좌파든 매우 자유롭고 비판적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비판적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대해 열을 올리며 비판하는 것은 봤지만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에서 지지 연설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요컨대 이 시대에 지식인의 신화는 미디어에서 ‘클릭’ 수에 따라 소비되는 신화에 불과하며, 이 신화조차 사실은 환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웹이나 미디어에서 활동적인 저자를 실천의 장에서 맞닥뜨릴 때(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는 그의 세련된 대화술이 현장의 wjdclwjr 열정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것이다. 저자는 이제 자율적 주체라는 고풍스러운 신화를 걸치고 소비되는 미디어 이벤트에 다름 아니다.”

(심보선,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136-137면)

 

[북 리뷰]

 

이 책은 예술사회학자 - 시인인 심보선의 산문/논문 모음집입니다. 이런저런 현장과 연결된 글들이 많다보니 “통일된 주제와 대상과 문체로 모아지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공통분모는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과 삶”입니다.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Incendies화재/폭발〉(2011)의 우리말 제명 〈그을린 사랑〉, ‘그을린’이 절묘하게 들어앉았다, 생각했습니다. 예술사회학자이기도 한 심보선 시인의 《그을린 예술》, 제목 옆 에는 부제처럼, 제사題詞처럼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 길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가 표지, 속표지 모두에 있고 프롤로 그의 제목은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 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입니다. 심보선 교수가 책 제목에서 ‘예술’에 왜 한정사 ‘그을린’을 붙였는지, 심보선 시인이 지향하는 ‘예술’이 어떤 예술인지 벌써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을린〉, 주름 속에 감추고 있는 느낌, 곡절, 뉴앙스가 간곡하고 미묘합니다.

‘고귀한 의식’이 아니라 ‘비천한 의식’이 주류가 된 사회, ‘초연함’이 아니라 ‘속물성’이 세상을 리드하는 시절입니다. 어느 때까지는 비천함과 속물성이 고귀함과 초연함을 음해하고 밀어내면서도 그것들의 진정성, 타락/타협 불가능성을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확 변했습니다. 비천과 속물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고귀와 초연은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전례 없이, 명실 공히 비천하고 속물적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과 불화하는 것 또한 비천한 의식이고 스노비즘입니다. 그리고 스노브는 합리적/비판적/룸펜 스노브로 분화하며 피차간 갈등합니다. 스노브는 진화하여 스모브(snob+mob)가 돼 순간적이고 우발적이나 정치적, 문화적, 미학적 파괴력을 지닙니다. 용두사미가 된듯하나 큰 흔적을 남긴 이런저런 촛불시위들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런 스노브 주류사회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스노브에게 문화는 여가도 취미도 교양도 아니다. 토털 키치의 세계에서 스노브에게 문화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 간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인간을 동물로 분리시킨 그 문화가 이제 인간을 다시 동물로 퇴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속에서 스노비즘의 엔트로피가 증폭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하이데거적 세계-내-존재로서의 불안이 아니라, 생존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화/동물적 불안을 느끼고 있다......그 불안을 조절하고 배려할 것인가?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행복의 정치를 창안할 것인가? 아니면 관조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윤리적,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69면)

 

심보선은 학자로서도, 시인으로서도 구체적 선택지를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경험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단 하나의 절대적 방안이 있을 리 없는 터 이리저리 선택지를 만들어보는 게 중요한 일이겠지요,

 

이 책의 공통분모를 ‘문학과 예술과 삶’이라 했습니다. 문학/예술 또는 문화의 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면성과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틀린 주장은 아니나 오로지 개인의 내면성으로만 파고들고 그곳에서, 공동체 또는 타인을 의식함 없이, 뿜어져 나오는 문학이 있고, 개개인들에 대한 배려 없이 공동체 단위에서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표상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좋은 문학/예술이냐 나쁜 문학/예술이냐 일 뿐입니다. 아마 심보선의 전제도 이런 문학/예술을 부정하는 수준은 아닐 겁니다.

2008년 12월 일어난 용산참사로 만들어진 〈6 · 9 작가선언〉활동과 홍대앞 칼국수집 두리반 철거에 맞선 작가/예술가들의 농성현장, 중계인moderator이 두 시인의 시 한 편씩에서 임의로 30~40개의 단어를 뽑아 상대 시인에게 그 단어들을 넣어 시를 쓰게 한 작업, 이 세 가지 경우를 통해 심보선 시인은 문학/예술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내면을 타인 또는 공동체에 투사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존재감을 한 개인의 내면이 빨아들이게 해 개인의 내면세계와 융합시키고, 변형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6 · 9 작가선언’은 《이것은 사람의 말》(2009),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2009)를 만들어냈으며,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미술인들’은 《끝나지 않는 전시》(2010)을 출간했습니다. 두리반 철거에 맞선 농성팀들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연주회, 심포지움을 열었습니다. 자립의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 귀중한 현장들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시인의 시에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시를 만들어보는 작업을 통해 문학은 관계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인은 확인합니다.

 

“창작은 언어들과 재료들을, 그토록 비밀스러운 사유와 감각들을 선물처럼 타인과 나눠 갖는 것이다. 창작은 기계적인 동시에 상상적이고 상상적인 동시에 관계적이다. 예술적 새로움은 외부와의 긴밀한 접석과 친밀한 교환 속에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105면)

 

이 책에서 심보선 학자-시인의 성향이 두드러지는 곳은 문학에 ‘평등’ 개념을 도입해 문학과 정치를 하나의 도면 위에 올려놓고 살핀 제4부 〈‘누구나’의 정치〉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천사’에서 ‘무식한 시인’〉이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를 내세워 전개한 논지는 피에르 부르디외의〈아비투스habitus〉와 충돌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그 점을 감안하면, 문학의 영역을 한층 넓히고, 천사의 선물인 문학적 천재성의 벽을 허물고 열린 문학의 장을 만들고 싶어 하는 심보선 시인의 바람을 한껏 내보인 글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인의 자격을 제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문맹을 벗어나기 위한 한글공부에서 시를 짓는데 까지 이른 할머니들(무식한 시인)을 사례로 삼아, 그 글쓰기, 시작詩作을 문학행위의 일환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인데 좋은 발상이고 움직임이겠습니다.

 

시인/독자, 문학/비문학, 사유/노동, 지식인/대중, 정신노동/육체노동, 전문가/비전문가를 분리하는 치안적 질서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에는 진즉부터 그 절실함에 공감하지만, 이 주장이 모두가 시인, 문학자, 사유하는 인간, 지식인, 정신노동자, 전문가일 수 있다는 억지로 비칠 수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시인 말라르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대표적인 노동자-시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임지 동네에서 왕따 당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학교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냥’ 시인이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는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제대로 된 시인은 동시에 제대로 된 독자이고 동시에 제대로 된 시민이어야 합니다. 심보선 시인은 무식한 시인-할머니의 제대로 된 독자이지만 무식한 시인-할머니는 심보선 시인의 제대로 된 독자는 못 될 겁니다.

아마 심보선 교수도 이 점을 의식하고는 있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신학적] 평면에서 저[내재적]평면으로 말과 사유와 삶을 자리 옮김 하는 일이다. ‘자리를 옮겨라.’, 이것은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정언명령이다. 우리가 〈딴 자리〉로 옮겨갈 때, 지상의 수많은 틈새들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때, 평등에의 옹호는 ‘등단을 했건 안 했건, 시를 쓰는 이들은 모두 시인이다.’라는 식의 태도, 흔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 불리는 안이한 태도와 단호하게 결별한다.”(227면)

 

이어서 심보선 시인이 옥타비오 파스와 보르헤스를 인용하면서 한 말, “우리 모두가 동시에 활 쏘는 이, 화살, 과녘”이고, “팽팽하고 날카롭고 정확한 다수성들이어야 한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 지은 것은 틀린 말은 아닌데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음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한충자 무식한 시인-할머니의 시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해설이 필요한 시(시이기는 한 것인지요?)가 아닌데 반해 심보선 시인의 시들은 시작 과정에서의 감동은 알려진 바 없지만 읽고 또 읽을 만한 좋은 시입니다. 시작과정까지의 우여곡절도 문학행위의 하나이지만 문학 감상의 대상은 그 과정이 아니라 시 자체가 무엇보다 먼저라는 점이 새삼스러워서는 안 될 겁니다.

 

[이 한 대목]에 올린 글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현택수 옮김, 동문선, 1998)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대중매체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한 말인데, 텔레비전의 교양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교수들이 사계斯界의 최고 권위자거나 대학자일 필요가 없다, 과장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 대략 이런 말이 그 책의 어딘가에 나옵니다. 텔레비전의 시청자들은 일반인이지 전문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최고 수준의 내용들이 소개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로서는 그런 수준의 내용은 이해할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교양은 교양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시청자들이 먹기 좋게 당의정으로 가공하는데 이때 내용의 부분적 왜곡이 피할 수 없으면 피하지 않습니다.

[이 한 대목]에서 심보선 학자-시인이 밝힌 주장과 부르디외의 이 대목을 함께 놓고 보면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교수들이 하는 현실 문제에 대한 주장은 그의 삶의 비전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 문제에 대한 주장인데 당사자의 비전과 어떻게 상관이 없느냐, 양심은 어디 갔느냐 할 지 모르겠으나 ‘양심’ 도 이미 소비되기를 기다리는 상품일 수 있겠습니다.

 

텔레비전 뿐 아니라 언론 매체는, 지식, 이념, 양심, 사명감, 문제의식, 온갖 감정, 슬픔, 기쁨, 분노, 행복, 불행, 명예, 범죄, 구출, 살인 모든 것을 소비지수를 매긴 상품으로 분류, 시청자/독자-소비자에게 보라고 유혹하는, 천박한 장사꾼으로 전락할 위험에서 한시도 벗어나기 힘든 게 지금-여기의 현실입니다.

 

《그을린 예술》은 해당 전공자들을 겨냥한 단순한 예술사회학 논 문집이 아닙니다.

 

문학, 예술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일상적 삶이 아니라 상처 받는 삶, 그래서 ‘그을린’ 삶이 바로 참된 예술의 원 동력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고 쉽게 풀어놓은, 독자를 십분 배려한 〈고마운 책〉입니다. 이 분야에 목말라 하 는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머지않은 기회에 [시를 읽는 하루]를 통해 학자가 아닌 시인 심보선의 시를 함께 읽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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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시선 지만지 고전선집 582
파블로 네루다 지음, 김현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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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침묵은 삶의 온상이지 죽음의 무덤이 아니다

 

침묵하기

 

이제 우리 열둘을 세고

그리고 우리 모두 침묵하자.

 

한 번만이라도 이 대지 위에서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

우리 한순간이라도 멈춰,

그리고 팔을 너무 많이 흔들지 말자.

 

돌진도 없고 엔진도 잆는,

이국적인 한 순간이 되리라,

갑작스런 낯선 상황에

우리 모두 함께 빠지리라.

 

차가운 바다의 어부들은

고래를 해치지 않고

그리고 염전의 일꾼은

자신의 상한 두 손을 보리라.

 

녹색 전쟁, 가스 전쟁,

불의 전쟁, 생존자 없는

승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그늘 속을 거닐리라.

 

내가 바라는 것이 완전한 무위無爲

혼동돼서는 안된다.

삶이란 이제 막 일어나려는 것들

난 죽음과는 어떤 거래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삶이 계속 움직이도록

우리가 한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한번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거대한 침묵이

이 슬픔을 중단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해 생긴 슬픔을,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위협해서 생긴 슬픔을.

모든 것이 죽은 듯이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모든 것이 살아 있듯이

아마도 대지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제 내가 열둘을 세리라

그대는 계속 침묵하고 난 떠나리라.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 시선》, 김현균 옮김, 지만지, 2010, 206-207면. 번역은 수정)

 

“설득력과 저항 또는 불복종.

말이 아니라 막말이, 주장이 아니라 억지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우격다짐이, 행동이 아니라 호들갑과 광란이, 호소가 아니라 협박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숱한 말들이 있지만 꼭 필요한 말, 해야 할 말은 자취가 없고 하나마나한 말들, 해서는 안 되는 말들만 쓰레기더미처럼 범람합니다.

 

침묵과 웅변.

웅변이 더 분명하게 설득력이 있고 더 강력한 저항과 불복종의 표시인 사회/시대가 있고 침묵이 더 분명하게 설득력이 있고 더 강력한 저항과 불복종의 표시인 사회/시대가 있습니다. 침묵보다는 웅변이 더 분명하고 더 강력한 표시인 사회/시대가 더 정상적인 사회/시대일 것입니다. 지금-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시대는 아마 웅변보다는 침묵이 더 강력한 사회/시대인 듯합니다. 누군가들은 지나치게 떠드는데 어느 시인은 침묵하겠다고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두렵습니다.〉”(정승옥)

 

[더 읽기]

 

침묵보다 웅변이 더 설득력이 있는 사회가 더 정상적인 사회일 거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비틀어서 말하지 않고 꼬아서 말을 듣지 않는 사회, 있는 그대로 말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말한 것입니다. 말이라는 게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인 구석이 많아서 안 하느니만 못한 데가 많기는 합니다.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자 네루다는 기뻐하였다. 호르헤 에드워즈에 의하면, 소련 문학의 고립 상태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 소식을 네루다는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뒤 크렘린 당국이 《의사 지바고》의 출간을 금지하고 수상식을 위해 파스테르나크가 스톡홀름에 가는 것도 막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네루다는 ‘당연히 이 조치에 항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심각한 정치적 파장이 일고, 당시 사람들의 표현대로 〈적의 논리에 탄약을 제공해 주는〉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감격을 잠잠 숨기고 불편함 침묵을 철저히 지키는 쪽을 택했다.’

이 침묵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루다는 우익의 적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냉전시대의 게임 규칙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파스테르나크를 탄압한 소련 당국의 태도를 그가 침묵으로 용인한 것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애덤 펜스타인,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최권행 옮김, 생각의나무, 2005, 515-516면)

 

소련의 태도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구 진영의 편을 들 것도 아닌 네루다의 침묵을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침묵하기〉가 이런 처지에서 쓰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 웅변보다는 침묵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더 필요한 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완전한 무위無爲와

혼동돼서는 안된다.

삶이란 이제 막 일어나려는 것들

난 죽음과는 어떤 거래도 원치 않는다.

 

‘침묵’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네루다는 알고 있습니다. 침묵은 ‘무위’가 아닙니다. 침묵하는 까닭은 새롭게 시작하는 삶 때문이지 죽을 날이 가까워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 아등바등, 티격태격, 우격다짐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으면 아마도 깊은 침묵이 우리의 슬픔을 씻어 줄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죽은 듯이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모든 것이 살아 있듯이

아마도 대지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리라.

 

깊은 침묵, 참된 침묵은 삶의 온상이지 죽음의 무덤은 아닙니다.

 

한마디.

21세기 들어서도 이 땅은 내내 말말말의 홍수입니다. 처음에는 놀랍게도, 안 해도 좋을 말들만 골라 주고받으며 시비를 그치지 않더니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해서는 안 되는 말로 감쪽같이 왜곡시켜 말의 무덤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성장을 멈춘 어른인 어린애들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주무르는 세상 같습니다.

아마 절제의 미덕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이런 시절에는, 침묵이 개선까지는 몰라도 더 악화되게는 하지 않는 길 아닐까 합니다.

 

최근 문단에서 일어난 일들,

 

한국시인협회에서 발간한 《사람 - 시로 읽는 한국근대 인물사》가 일으킨 시시비비-시집 회수-유관순 유가족과 유관단체에서 요구한 정호승 시인의 시 〈유관순〉삭제 및 사과-정호승 시인의 사과문 게재 및 연작시 〈유관순〉영구히 삭제 약속,

 

그리고 안도현 시인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은 절필, 정확하게 절필이 아니라 시만은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일과 그것이 마땅치 않아 미주알고주알 까발린 조선일보 문화부장 박은주 기자가 쓴 칼럼,

 

모두가 할말과 헛말을 구분하지 않아 일어난 부끄러운 일들 같습니다. 〈침묵〉이 절실한 세상 같습니다.

 

인어와 술꾼들의 우화

 

그녀가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들어왔을 때

그 고매하신 양반들은 모두 술집 안에 있었다

그들은 술을 퍼마시다가 그녀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다

이제 막 강에서 올라온 그녀는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그녀는 길 잃은 인어였다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 위로 욕설이 흘렀고

음란한 짓거리가 그녀의 황금빛 젖가슴을 뒤덮었다

그녀는 울 줄 몰라 울지 않았다

그들은 담뱃불과 불에 탄 코르크 마개로 그녀를 지져댔다

그러고는 낄낄거리며 술집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말할 줄 몰랐기에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아득한 사랑의 빛이었고

그녀의 두 팔은 한 쌍의 황옥으로 빚어졌고

그녀의 입술은 산호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갑자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강에 들어서자 그녀는 금세 깨끗해져

빗속의 하얀 돌처럼 빛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헤엄쳤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갔다.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 시선》, 김현균 옮김, 지만지, 2010, 208면)

 

이 시도 앞의 시 〈침묵하기〉처럼 《에스트라바가리오Estravagario》(1958)에 실려 있습니다. ‘에스트라바가리오’는 네루다가 만든 신조어인데 ‘extra별난+vagar방랑하다’의 합성어로 ‘별난 방랑’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인어〉와 ‘고매하신’ 〈술꾼들〉.

 

막 강에서 올라온 영문을 모르는 알몸의 ‘인어’,

길 잃은 매끄러운 살결, 황금빛 젖가슴의 ‘인어’,

말할 줄 몰라 말이 없으며, 아득한 사랑의 빛을 담은 두 눈의 ‘인어’,

황옥으로 빚은 두 팔에, 산호 빛 입술을 지닌 인어.

 

술 퍼먹고 침 뱉고 욕하는 ‘술꾼들’,

음란한 짓거리와 담뱃불 등으로 그녀를 지져대는 ‘술꾼들’,

좋다고 낄낄거리며 술집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술꾼들’.

 

〈술꾼들〉을 못 견뎌 강에 들어서 금세 깨끗해져,

하얀 돌처럼 빛나 다시 헤엄치는 〈인어〉.

 

옮긴이 김현균 교수는 “〈인어〉와 〈술꾼들〉은 각각 시인 네루다와 순수를 잃어버린 타락한 세상 사람들에 대한 알레고리로 등장한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관능적 순수함’, ‘순수한 관능’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빛나는 ‘인어’인데 ‘술꾼들’은 못된 짓만 골라서 합니다. ‘술꾼들’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잃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갔다.

 

미래 또는 따른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갔”습니다. 고약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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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초상
김원우 지음 / 강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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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아, 이 풍요로운 선남선녀의 물결, 촌스러운 딜레탕트들, 설마 이런 설익은 딜레탕티슴이 이 지방 도회지에만 넘실거릴까. 두텁다. 뻔뻔하다, 안팎이 요란하다, 반지빠르다, 의뭉스럽다, 어여쁘다, 갑신다. 이런 대규모의 조직적인, 합심협력의 세련이 이 땅에서나 있는 일인가.

아, 이 도도한 딜레탕트의 세상, 영원하라. 더불어 양손으로 돈 ․ 생업 ․ 남자 ․ 시심詩心 같은 여기를 마음껏 굴리면서도 천지간의 명암을 지 혼자서 다 아는 치하는 여자의 씩씩한 생명력에 영광 있으라. 그렇게나 만만히 보고 알 만큼 안다고 치부한 이 세상이, 또 그 속의 인간이 이토록 난해한 줄 이제사 알다니. 그야말로 유구무언이다. 그렇게나 흔전만전으로 글을 ‘써제낀’ 잡문가 주제에 감히 무슨 말을 더 보탠다 말인가.”

(김원우, 《부부의 초상》, 강, 2013, 455면)

 

[북 리뷰]

 

《모노가미의 새 얼굴》(솔, 1996), 《새로운 천사》(세계사, 2005), 《돌풍전후》(강, 2011), 김원우의 신작 《부부의 초상》을 읽고 생각난 그의 작품들입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의 세상임에도 일부일처제라는 포장으로 덧씌워진 세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까발린 《모노가미의 새 얼굴》, 교수사회의 부끄러운 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나머지 두 작품, 이번 신작도 그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번지르르한 겉포장과는 달리 쇄말주의, 속물주의에 흠뻑 물들어있는 언론계와 화단이 그 대상입니다.

 

소설의 화자인 언론인 출신 안모는 언론의 실체/한계를 세 가지로 정리하는데 신문이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언론인들은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망원경으로 세상을 봅니다.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입니다. 또 하나는 다 털어놓을 수 없다는 기밀 고수주의인데 이는 직무유기이며 “그로 인한 가짜 권위의식과 자기중심주의도 큰 병폐”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천부당만부당하게도 걸핏하면 다 안다는 시건방진 오만함”입니다. 기자들은 다 아는 것 같지만 대충일 뿐 제대로 아는 것은 단 한 분야도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신문기사는 진짜 현실과는 일정하게 유리되고 말아서 어떤 피상적인 세계의 재현에 그치고” 맙니다.

 

화단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여느 화가들은 이상하게도 ‘세상’에 대해서는 말이 많고, ‘사물’을 보는 자기만의 시각에 대해서는 좀체 입을 떼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그림으로만 말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 “내 작업의 실체는 언어로 옮겨 놓기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말을 많이 하라는 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가 얼마든지 지 그림을 설명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 반대로 말이 많은 부류는(이를테면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전혀 얼토당토않은 견강부회에다 동어반복으로 가탁假託을 일삼는다. 그런 억지스런 핑계는 엉성한 거짓말처럼 밑바닥이 훤히 보여서 청자를 무안하게 하게 만든다. 그러니 저희들끼리 나누는 말도 가식이기 십상이고, 조명을 받으려고 기자에게 부려놓는 말속은 온통 횡설수설에 가깝다.”

 

자기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무슨 형상을 어떤 이유로 구도화 하는지를 반쯤이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게 화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게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되는 게 세상의 현실이라서 과대평가된 엉터리 그림들이 버젓이 행세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언론계와 화단의 부끄러운 이면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김원우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 쯤 되면 이미 다 아는 사실이기에 김원우가 이 소설을 쓴 까닭 가운데 이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내가 이 작품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제목도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부쩍 늘어난 부부관계, 주말 부부가 그들의 사이를 항상 붙어사는 부부에 비해 어떻게 달라지고 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며 또 하나는 대책을 세우기에는 이미 늦지 않았나할 정도로 범람하는 말, 말, 말의 홍수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도 ‘말’과 무관하지 않은데, 사투리를 ‘대화’ 뿐 아니라 소설 문장에 정식으로 채용하고 있는 일과 만연체의 사용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대구 지방 신문기자 출신 안모입니다. 화가 노옥배의 전시회 초대를 받는 게 소설의 시작이고 며칠 후 열린 전시회개막 축하모임자리가 소설의 끝입니다. 4백면은 족히 될 그 중간은 주로 화자 안모가 기자 생활하면서 20년이 넘도록 자주는 아니지만 끊어지지 않고 교유를 유지한 화가 노옥배와 시인으로 막 등단한 신인 작가 시절 신문 칼럼을 맡기면서 알게 된 필명 고은미 부부에 대한 회고로 메워집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생활여건이든 취향 때문이든 두 집 살림을 하거나 각 방을 쓰는 부부들의 모습이 한 방에서 살을 부대끼며 사는 부부들과는 사뭇 다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은 우선 돈에 관한 한 따로따로일 가능성이 큽니다. 두 집 살림 하는 부부의 실상을 알아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의 하나인데 자세한 사정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산다는 것은 인간을 정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때를 덕지덕지 묻혀가는 여정일 겁니다.‘친정으로 마누라까지 쫓아버린 대처승’ 같이 속기를 한결 덜어낸 인상의 노화백, “못생기고, 옷꼴도 까짓것 허름한 주제임에도 말을 똘똘하게 하니 대번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뿌듯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에서 부걱부걱 괴어오르게 하는” 고은미 시인, 화자는 그 둘 다에게 호감을 갖고 지내왔는데 노화백의 환갑 기념 전시회인 마지막 장면에 이르니 화백이나 시인이나 예외 없이 속기俗氣 만발입니다. 그런 노화백을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단새 사람이 너무 변했네. 청렴한 판사가 옷을 벗자마자 돈맛 알고 팔을 걷어붙인 변호사 짝이 났네.” 고시인도 마찬가지, 그동안 써온 시를 추려 “한 80편쯤으로 시집을 한 권 묶”으면 한이 없습니다. “나이도 있고 한이 인자는 부끄럽다 뻔뻔스럽다 그런 말 다 집어치아뿌고 누가 뭐라 카든 말든 지 말, 지 눈이 이렇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말의 범람, ‘할말’이 아닌 헛말의 홍수, 한 줄도 제대로 못 채우는 단문의 남용, 작가는 이 시대의 병폐의 하나로 이를 꼽는 듯합니다. 책의 끄트머리 〈작가의 말〉로 미뤄(“원고 입력에서 책이 나오기까지 신세를 많이 진 여러분”) 작가는 여전히 원고를 ‘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작가가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지만 신변잡기식 수다와 단문으로 일관하는 작금의 우리 소설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기도 했습니다. 개인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달 때문이겠지만 말말말의 홍수는 대책이 없습니다. 풍자, 유머와 막말이 구분되지 않고 침묵의 언어는커녕 절제된 언어는 사라지고 수다로 꽉 찼으나 내용은 텅 빈 헛말들만 만발합니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언어의 마술사이어야 할 작가들조차 뭣에 쓰려는 건지 자기도 모르면서 공허한 수다를 늘어놓습니다. 문장의 길이가 사고의 길이, 호흡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단문의 남용은 하드 보일드 터치, 헤밍웨이를 거론하며 반길 일만은 아닙니다. 아마도 작가의 만연체는 작의적이기도 한 듯합니다.

 

“이쯤에서 덧붙이고 싶은 그의 프로필에 대한 내 정서는 언젠가부터, 다른 종교들이 그 창시자나 사도들까지 전 생애를 시종일관 헐레벌떡 싸돌아다니며 선교에 전념하는 데 비해 불교 쪽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따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조의, 정 좀이 쑤시거들랑 잠시잠시 탁발승 노릇이나 하다가 다시 ‘지 자리 지키기’에 매진하라는 그런 이미지를 노모 화백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비쳤다는 사실이다.”

 

마침표가 마지막에 한번만 찍힌 한 문장입니다. 이 정도 길이의 문장이 이 소설에는 면마다 넘칩니다(오탁번 시인이 창간한 시 전문 계간지 《시안》의 창간사가 생각납니다. 1675자 2백자 원고지 8.5매 분량의 창간사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돼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문학이야기〉를 열어보세요).

 

작가는 경상도 사투리를 정식으로 채용, 소설 도처에 깔아놓았습니다. 이는 표준어를 무시하고 사투리를 애용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투리의 적극적 사용도 충분히 작의적인데 내용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 문체를 찾아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현해본 것입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는 내가 사용하는 세련된 중산층의 언어의 기원이 실은 내가 그렇게 피하고 싶고 창피하게 여기는 밑바닥 삶을 산 부모님의 거칠고 천박하기도 한 언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경상도 토박이는 경상도 사투리가, 전라도 토박이는 전라도 사투리가 가장 몸에 익은 언어입니다. 동향사람들을 만나 긴장을 풀면 자기도 모르게 옛날에 쓰던 동네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옵니다. 하고 싶은 말과 하는 말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김원우는, 수다는 그만 떨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그것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언어, 문체, 형식을 찾아 애쓰라는 메시지를 말만 많은 작가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상파, 종편 가릴 것 없이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이걸 내가 왜 봐야지 하는 예능프로가 부지기수이고 그런 식의 자기계발 치유를 내세운 산문집 역시 널려있습니다만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이걸 내가 왜 읽었어야지 하는 낭패감을 안겨주는 기대했던 작가들의 쓸데없이 말만 많은 소설들입니다.

 

김원우의 작품들은 단문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부담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익숙해지면 중얼중얼 대듯 잘근잘근 씹듯 여운이 긴 뒷맛을 쉽게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다이기 십상인 단문 위주의 소설 편식에 빠진 독자들에게 균형감을 회복하기 위해 강추하는 좋은 소설입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1990년 전후, 어디에선가 김원우는 좋은 서사의 필수조건인 화자의 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점을 한국소설가들의 약점으로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시점이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치밀한 계산 아래 이뤄져야 한다, 허나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었을 겁니다. 서사의 측면에서 이 작품을 보는 일은 문학평론가 김인환 명예교수(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훌륭한 〈작품해설〉을 읽으면 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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