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를 읽는 하루
포루그 파로흐자드 - 입맞춤
입맞춤
그의 두 눈에서 죄악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달빛이 빛나고 있었다
말 없는 그의 입술 위에서
사랑의 불꽃이 숨김없이 웃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 채
취기 어린 두 눈으로
나는 그의 두 눈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말한다
“사랑에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법”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밤의 모처某處에서
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껴안았다
한 사람의 숨결이 상대의 뺨으로 스며들었다
두 입술 사이에 뜨거운 입맞춤이 이뤄졌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신양섭 옮김, 문학의숲, 2012, 99면. 번역은 수정)
“이 시는 열여섯에 결혼해 아이를 낳고 열아홉에 이혼한 이란의 요절한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1935-1967)가 1955년, 스무 살에 발표한 시 입니다. 우선 에로틱한 시로 읽어봅니다.
불륜이 끝까지 가는 어느 날 밤의 현장을 묘사한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연에 있습니다. 1연,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의 모습이 느끼하기까지 합니다. 2연, 유혹 앞에서 여자는 수동적입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여자를 남자는 계속 감언이설로 꼬입니다. ‘사랑에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법’. 3연에서는 그 관계가 모호해집니다. 1-2연에서는 동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한데 3연에서는 한 그림자와 다른 그림자 중, 한 사람의 숨결과 상대의 뺨 중, 어느 게 남자 것이고 어느 게 여자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반전이 일어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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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열여섯 살의 파로흐자드는 열다섯 살 연상인 먼 친척 풍자만화가셔푸르와 결혼하고 셔푸르의 직장이 있는 소도시 아흐버즈로 갑니다. 1950년대 이란, 서구화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시절이지만 이는 대도시에서만 통하는 일, 테헤란을 떠나 그녀가 살림을 차린 소도시 아흐버즈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히잡을 안 쓰고 짧은 치마를 입으며 파마를 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일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일을 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혼 1년 후에는 아들 컴여르를 낳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결혼 3년 후 그들은 이혼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넓은 세계를 날고 싶은’ 파로흐자드는 동시에 ‘상처투성이 영혼’이 됩니다.
32년의 삶 가운데 시인으로서의 삶은 1955년에서 1967년까지 12년이었습니다. 그동안 파로흐자드는 128편의 시를 썼고 이를 다섯 권의 시집으로 엮었습니다(한권은 유고시집).
앞에 소개한 시 〈입맞춤〉은 첫 번째 시집 《포로》(1955)에 있는 시입니다. 1950년대 중반의 이란, 결혼을 해 애를 낳고 벌써 이혼을 한, 짙은 화장에 파마머리의 스무 살짜리 여자 시인, 이것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데 불륜현장을 묘사한 시를 쓰다니 심상치 않습니다. 남자의 유혹 - 주저하는 여자 - 뜨거운 성애 장면, 충분히 에로틱한 시이지만 이 시의 진수는 그 너머에 있습니다. 성적 관계는 대체적으로 주종관계를 보입니다. 이 시의 경우에도 1, 2연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이 남자의 몫입니다. 3연에서는 달라집니다.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밤의 모처某處에서
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껴안았다
한 사람의 숨결이 상대의 뺨으로 스며들었다
두 입술 사이에 뜨거운 입맞춤이 이뤄졌다
‘한 그림자’와 ‘다른 그림자’, ‘한 사람의 숨결’과 ‘상대의 뺨’, ‘두 입술’, 어느 게 남자의 것이고 어느 게 여자의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파로흐자드는 아마도 평등한 남녀관계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 시의 3연에서는 그 모호성으로 오히려 남녀 주종관계가 역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2연의 마지막 “사랑에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법”, 남자가 〈꼬임의 절정〉으로 한 말이고 그 성적 암시가 충분한 말이지만 한 편으로는 시인이 읽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기회를 주려고 인용한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죄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쾌락 가득한 죄
격렬하고 뜨거운 껴안음 속에서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두 팔에 안겨서
뜨겁고 무쇠이고 복수하는 두 팔에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나는 비밀에 가득한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필요한 걸 요구하는 그의 눈에 답하기 위해
내 가슴 속 심장은 조급하게 흔들렸습니다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나는 그의 곁에 흐트러지듯 주저앉았습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격정을 쏟아 부었으며
나는 미친 내 마음의 슬픔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그의 귀에 사랑이야기를 속삭였습니다
나는 그대를 원해 오, 내 생명이여
나는 그대를 원해 오, 생명을 주는 포옹이여
오, 사랑에 홀딱 빠진 내 연인이여, 그대
욕정으로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붉은 포도주가 술잔 안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부드러운 침대 위 내 몸은
술에 취해 그의 배 위에서 요동쳤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쾌락 가득한 죄
황홀감에 빠져 흔들어주는 몸 곁에서
신이여,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신양섭 옮김, 문학의숲, 2012, 104-105면. 번역은 수정)
〈죄〉는 두 번째 시집 《벽》(1956)에 있는 시입니다.〈죄〉는 〈입맞춤〉처럼 에로틱한 시인데 더 노골적이며 더 구체적입니다. “쾌락 가득한 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시의 제목도 ‘죄’이지만 화자/시인이 정말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쾌락 가득한 죄
황홀감에 빠져 흔들어주는 몸 곁에서
신이여,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은밀한 장소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누가 알겠냐는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죄를 뉘우치는 일과는 거리가 한참 먼 시입니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가부장제 이란 사회, 종족유지가 아니면 성문제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단지 죄를 짓는 일일 뿐인 성적 쾌락을 시로 읊는 일은 전략적인 일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말할 때면 으레 정치적 자유를 말하지만 파로흐자드는 간파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적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공개적인 성담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성, 성적 쾌락, 껴안음, 사랑에 빠짐, 황홀함, 욕정 같은 표현들이 시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욕정으로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붉은 포도주가 술잔 안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부드러운 침대 위 내 몸은
술에 취해 그의 배 위에서 요동쳤습니다
노골적인 성애장면을 묘사한 이런 시들을 폭 넓게 아름다운 시로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이미 인간의 자유에서 한 단계 상승한 사회일 것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적인 행위들이 들키면 가차 없는 단죄를 받아야 하는 일들로 추락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게 아마 성과 관계된 일들일 것입니다. 스스로는 성적 자유를 구가하는 것인데 방탕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비난 받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파로흐자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성애장면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켜, 에로틱하면서도 끈적거리지 않게, 자유로우면서도 당당하게 형상화한 시이며, 성적 자유가 인간의 자유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회성이 강한 시입니다.
〈포로〉는 첫 번째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합니다.
포로
그대를 열망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코 그대를 흡족하게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맑게 갠 빛나는 하늘이지만
나는 새장 구석에 갇힌 한 마리 새라는 것을
춥고 어두운 철창 뒤에서
놀라 애처로운 내 시선이 그대를 쫓는다
나 생각 중이다 그대가 한 손을 내밀어 줄지도 모르고
내 날개를 펼쳐 그대에게 다가갈 수도 있으리라고
나 생각 중이다 감시가 소홀한 틈에
이 침묵의 감옥으로부터 날아올라
간수 노릇하는 사람 생각하며 웃으며
그대 곁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나 이런 생각 중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결코 이 감옥에서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을
설령 간수가 그것을 원한다 해도
나를 날게 할 숨결과 바람이 내게 없다는 것을
어김없이 찾아오는 눈부신 아침
철창 뒤의 한 아기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내가 환희의 노래를 흥얼거리면
아기는 입맞춤으로 내 온 존재를 껴안는다
하늘이여 어느 날 내가
이 침묵의 감옥으로부터 날아가길 원할 때면
우는 아기의 눈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잊어라, 나는 포로가 된 한 마리 새일 뿐이라 할까?
나는 포로인 새의 심장의 불로
이 폐허를 밝히는 촛불
침묵 속의 어둠을 선택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나 이 둥지를 폐허로 변하게 할 수 있으리라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신양섭 옮김, 문학의숲, 2012, 13-14면. 번역은 수정)
이 시가 쓰일 당시의 파로흐자드의 사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입니다. 포로인 새는 시인 자신이고 시인을 포로로 잡고 있는 ‘그대’는 시인의 남편입니다. 그러나 남편인 ‘그대’가 나를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를 열망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코 그대를 흡족하게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맑게 갠 빛나는 하늘이지만
나는 새장 구석에 갇힌 한 마리 새라는 것을
포로인 내가 ‘그대’를 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흡족하지 않을 뿐입니다) 내가 그대를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는 맑게 갠 빛나는 하늘인데 나는 새장 속에 갇힌 한 마리 새에 불과한 것은, 그렇다면 그들 사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문제 때문입니다. ‘사회’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내가 맞서고 있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다른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맞서는 것은 ‘사회’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사회와 맞서는 한 개인의 〈무력감〉입니다. 사회와의 관계에서의 〈무력감〉은 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 무력감은 내가 아이 앞에서 맛보는 ‘환희’로서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감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포로인 새의 심장의 불로
이 폐허를 밝히는 촛불
침묵 속의 어둠을 선택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나 이 둥지를 폐허로 변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새의 심장의 불” 정도로 내 촛불은 별 게 아니지만 그래도 이 둥지를 밝혀주는 게 바로 그 촛불입니다. 이 촛불마저 포기한다면 내 삶의 터전은 이내 폐허로 변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의 존재이유입니다.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포로이지만 ‘나’는 내 둥지를 지켜냅니다. 스무 한살의 시인은 사회의식에 눈 뜹니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사랑이면 사랑, 불륜이면 불륜, 욕망이면 욕망, 사회의식이면 사회의식, 모든 면에서 그 성숙의 속도에는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시 언어를 고르고 그것을 구성해내는 현대적인 감각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번에 계속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시를 읽는 하루>에도 올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