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예술 -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길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심보선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한 대목]

 

“프랑스에서 점점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은 늘어나는데 이들은 되도록 대학의 연구실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이 생산하는 비판 담론은 이들의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 의해 정당화되고 역으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할 뿐 정치적 실천과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교수들인 신문 칼럼니스트들의 논조는 우파든 좌파든 매우 자유롭고 비판적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비판적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대해 열을 올리며 비판하는 것은 봤지만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에서 지지 연설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요컨대 이 시대에 지식인의 신화는 미디어에서 ‘클릭’ 수에 따라 소비되는 신화에 불과하며, 이 신화조차 사실은 환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웹이나 미디어에서 활동적인 저자를 실천의 장에서 맞닥뜨릴 때(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는 그의 세련된 대화술이 현장의 wjdclwjr 열정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것이다. 저자는 이제 자율적 주체라는 고풍스러운 신화를 걸치고 소비되는 미디어 이벤트에 다름 아니다.”

(심보선,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136-137면)

 

[북 리뷰]

 

이 책은 예술사회학자 - 시인인 심보선의 산문/논문 모음집입니다. 이런저런 현장과 연결된 글들이 많다보니 “통일된 주제와 대상과 문체로 모아지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공통분모는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과 삶”입니다.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Incendies화재/폭발〉(2011)의 우리말 제명 〈그을린 사랑〉, ‘그을린’이 절묘하게 들어앉았다, 생각했습니다. 예술사회학자이기도 한 심보선 시인의 《그을린 예술》, 제목 옆 에는 부제처럼, 제사題詞처럼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 길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가 표지, 속표지 모두에 있고 프롤로 그의 제목은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 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입니다. 심보선 교수가 책 제목에서 ‘예술’에 왜 한정사 ‘그을린’을 붙였는지, 심보선 시인이 지향하는 ‘예술’이 어떤 예술인지 벌써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을린〉, 주름 속에 감추고 있는 느낌, 곡절, 뉴앙스가 간곡하고 미묘합니다.

‘고귀한 의식’이 아니라 ‘비천한 의식’이 주류가 된 사회, ‘초연함’이 아니라 ‘속물성’이 세상을 리드하는 시절입니다. 어느 때까지는 비천함과 속물성이 고귀함과 초연함을 음해하고 밀어내면서도 그것들의 진정성, 타락/타협 불가능성을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확 변했습니다. 비천과 속물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고귀와 초연은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전례 없이, 명실 공히 비천하고 속물적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과 불화하는 것 또한 비천한 의식이고 스노비즘입니다. 그리고 스노브는 합리적/비판적/룸펜 스노브로 분화하며 피차간 갈등합니다. 스노브는 진화하여 스모브(snob+mob)가 돼 순간적이고 우발적이나 정치적, 문화적, 미학적 파괴력을 지닙니다. 용두사미가 된듯하나 큰 흔적을 남긴 이런저런 촛불시위들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런 스노브 주류사회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스노브에게 문화는 여가도 취미도 교양도 아니다. 토털 키치의 세계에서 스노브에게 문화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 간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인간을 동물로 분리시킨 그 문화가 이제 인간을 다시 동물로 퇴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속에서 스노비즘의 엔트로피가 증폭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하이데거적 세계-내-존재로서의 불안이 아니라, 생존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화/동물적 불안을 느끼고 있다......그 불안을 조절하고 배려할 것인가?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행복의 정치를 창안할 것인가? 아니면 관조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윤리적,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69면)

 

심보선은 학자로서도, 시인으로서도 구체적 선택지를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경험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단 하나의 절대적 방안이 있을 리 없는 터 이리저리 선택지를 만들어보는 게 중요한 일이겠지요,

 

이 책의 공통분모를 ‘문학과 예술과 삶’이라 했습니다. 문학/예술 또는 문화의 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면성과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틀린 주장은 아니나 오로지 개인의 내면성으로만 파고들고 그곳에서, 공동체 또는 타인을 의식함 없이, 뿜어져 나오는 문학이 있고, 개개인들에 대한 배려 없이 공동체 단위에서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표상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좋은 문학/예술이냐 나쁜 문학/예술이냐 일 뿐입니다. 아마 심보선의 전제도 이런 문학/예술을 부정하는 수준은 아닐 겁니다.

2008년 12월 일어난 용산참사로 만들어진 〈6 · 9 작가선언〉활동과 홍대앞 칼국수집 두리반 철거에 맞선 작가/예술가들의 농성현장, 중계인moderator이 두 시인의 시 한 편씩에서 임의로 30~40개의 단어를 뽑아 상대 시인에게 그 단어들을 넣어 시를 쓰게 한 작업, 이 세 가지 경우를 통해 심보선 시인은 문학/예술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내면을 타인 또는 공동체에 투사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존재감을 한 개인의 내면이 빨아들이게 해 개인의 내면세계와 융합시키고, 변형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6 · 9 작가선언’은 《이것은 사람의 말》(2009),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2009)를 만들어냈으며,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미술인들’은 《끝나지 않는 전시》(2010)을 출간했습니다. 두리반 철거에 맞선 농성팀들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연주회, 심포지움을 열었습니다. 자립의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 귀중한 현장들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시인의 시에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시를 만들어보는 작업을 통해 문학은 관계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인은 확인합니다.

 

“창작은 언어들과 재료들을, 그토록 비밀스러운 사유와 감각들을 선물처럼 타인과 나눠 갖는 것이다. 창작은 기계적인 동시에 상상적이고 상상적인 동시에 관계적이다. 예술적 새로움은 외부와의 긴밀한 접석과 친밀한 교환 속에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105면)

 

이 책에서 심보선 학자-시인의 성향이 두드러지는 곳은 문학에 ‘평등’ 개념을 도입해 문학과 정치를 하나의 도면 위에 올려놓고 살핀 제4부 〈‘누구나’의 정치〉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천사’에서 ‘무식한 시인’〉이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를 내세워 전개한 논지는 피에르 부르디외의〈아비투스habitus〉와 충돌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그 점을 감안하면, 문학의 영역을 한층 넓히고, 천사의 선물인 문학적 천재성의 벽을 허물고 열린 문학의 장을 만들고 싶어 하는 심보선 시인의 바람을 한껏 내보인 글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시인의 자격을 제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문맹을 벗어나기 위한 한글공부에서 시를 짓는데 까지 이른 할머니들(무식한 시인)을 사례로 삼아, 그 글쓰기, 시작詩作을 문학행위의 일환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인데 좋은 발상이고 움직임이겠습니다.

 

시인/독자, 문학/비문학, 사유/노동, 지식인/대중, 정신노동/육체노동, 전문가/비전문가를 분리하는 치안적 질서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에는 진즉부터 그 절실함에 공감하지만, 이 주장이 모두가 시인, 문학자, 사유하는 인간, 지식인, 정신노동자, 전문가일 수 있다는 억지로 비칠 수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시인 말라르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대표적인 노동자-시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임지 동네에서 왕따 당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학교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냥’ 시인이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는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제대로 된 시인은 동시에 제대로 된 독자이고 동시에 제대로 된 시민이어야 합니다. 심보선 시인은 무식한 시인-할머니의 제대로 된 독자이지만 무식한 시인-할머니는 심보선 시인의 제대로 된 독자는 못 될 겁니다.

아마 심보선 교수도 이 점을 의식하고는 있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신학적] 평면에서 저[내재적]평면으로 말과 사유와 삶을 자리 옮김 하는 일이다. ‘자리를 옮겨라.’, 이것은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정언명령이다. 우리가 〈딴 자리〉로 옮겨갈 때, 지상의 수많은 틈새들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때, 평등에의 옹호는 ‘등단을 했건 안 했건, 시를 쓰는 이들은 모두 시인이다.’라는 식의 태도, 흔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 불리는 안이한 태도와 단호하게 결별한다.”(227면)

 

이어서 심보선 시인이 옥타비오 파스와 보르헤스를 인용하면서 한 말, “우리 모두가 동시에 활 쏘는 이, 화살, 과녘”이고, “팽팽하고 날카롭고 정확한 다수성들이어야 한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 지은 것은 틀린 말은 아닌데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음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한충자 무식한 시인-할머니의 시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해설이 필요한 시(시이기는 한 것인지요?)가 아닌데 반해 심보선 시인의 시들은 시작 과정에서의 감동은 알려진 바 없지만 읽고 또 읽을 만한 좋은 시입니다. 시작과정까지의 우여곡절도 문학행위의 하나이지만 문학 감상의 대상은 그 과정이 아니라 시 자체가 무엇보다 먼저라는 점이 새삼스러워서는 안 될 겁니다.

 

[이 한 대목]에 올린 글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텔레비전에 대하여》(현택수 옮김, 동문선, 1998)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대중매체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한 말인데, 텔레비전의 교양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교수들이 사계斯界의 최고 권위자거나 대학자일 필요가 없다, 과장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 대략 이런 말이 그 책의 어딘가에 나옵니다. 텔레비전의 시청자들은 일반인이지 전문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최고 수준의 내용들이 소개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로서는 그런 수준의 내용은 이해할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교양은 교양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시청자들이 먹기 좋게 당의정으로 가공하는데 이때 내용의 부분적 왜곡이 피할 수 없으면 피하지 않습니다.

[이 한 대목]에서 심보선 학자-시인이 밝힌 주장과 부르디외의 이 대목을 함께 놓고 보면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교수들이 하는 현실 문제에 대한 주장은 그의 삶의 비전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 문제에 대한 주장인데 당사자의 비전과 어떻게 상관이 없느냐, 양심은 어디 갔느냐 할 지 모르겠으나 ‘양심’ 도 이미 소비되기를 기다리는 상품일 수 있겠습니다.

 

텔레비전 뿐 아니라 언론 매체는, 지식, 이념, 양심, 사명감, 문제의식, 온갖 감정, 슬픔, 기쁨, 분노, 행복, 불행, 명예, 범죄, 구출, 살인 모든 것을 소비지수를 매긴 상품으로 분류, 시청자/독자-소비자에게 보라고 유혹하는, 천박한 장사꾼으로 전락할 위험에서 한시도 벗어나기 힘든 게 지금-여기의 현실입니다.

 

《그을린 예술》은 해당 전공자들을 겨냥한 단순한 예술사회학 논 문집이 아닙니다.

 

문학, 예술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일상적 삶이 아니라 상처 받는 삶, 그래서 ‘그을린’ 삶이 바로 참된 예술의 원 동력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고 쉽게 풀어놓은, 독자를 십분 배려한 〈고마운 책〉입니다. 이 분야에 목말라 하 는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머지않은 기회에 [시를 읽는 하루]를 통해 학자가 아닌 시인 심보선의 시를 함께 읽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