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 시선 지만지 고전선집 582
파블로 네루다 지음, 김현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침묵은 삶의 온상이지 죽음의 무덤이 아니다

 

침묵하기

 

이제 우리 열둘을 세고

그리고 우리 모두 침묵하자.

 

한 번만이라도 이 대지 위에서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

우리 한순간이라도 멈춰,

그리고 팔을 너무 많이 흔들지 말자.

 

돌진도 없고 엔진도 잆는,

이국적인 한 순간이 되리라,

갑작스런 낯선 상황에

우리 모두 함께 빠지리라.

 

차가운 바다의 어부들은

고래를 해치지 않고

그리고 염전의 일꾼은

자신의 상한 두 손을 보리라.

 

녹색 전쟁, 가스 전쟁,

불의 전쟁, 생존자 없는

승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그늘 속을 거닐리라.

 

내가 바라는 것이 완전한 무위無爲

혼동돼서는 안된다.

삶이란 이제 막 일어나려는 것들

난 죽음과는 어떤 거래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삶이 계속 움직이도록

우리가 한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한번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거대한 침묵이

이 슬픔을 중단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해 생긴 슬픔을,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위협해서 생긴 슬픔을.

모든 것이 죽은 듯이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모든 것이 살아 있듯이

아마도 대지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제 내가 열둘을 세리라

그대는 계속 침묵하고 난 떠나리라.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 시선》, 김현균 옮김, 지만지, 2010, 206-207면. 번역은 수정)

 

“설득력과 저항 또는 불복종.

말이 아니라 막말이, 주장이 아니라 억지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우격다짐이, 행동이 아니라 호들갑과 광란이, 호소가 아니라 협박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숱한 말들이 있지만 꼭 필요한 말, 해야 할 말은 자취가 없고 하나마나한 말들, 해서는 안 되는 말들만 쓰레기더미처럼 범람합니다.

 

침묵과 웅변.

웅변이 더 분명하게 설득력이 있고 더 강력한 저항과 불복종의 표시인 사회/시대가 있고 침묵이 더 분명하게 설득력이 있고 더 강력한 저항과 불복종의 표시인 사회/시대가 있습니다. 침묵보다는 웅변이 더 분명하고 더 강력한 표시인 사회/시대가 더 정상적인 사회/시대일 것입니다. 지금-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시대는 아마 웅변보다는 침묵이 더 강력한 사회/시대인 듯합니다. 누군가들은 지나치게 떠드는데 어느 시인은 침묵하겠다고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두렵습니다.〉”(정승옥)

 

[더 읽기]

 

침묵보다 웅변이 더 설득력이 있는 사회가 더 정상적인 사회일 거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비틀어서 말하지 않고 꼬아서 말을 듣지 않는 사회, 있는 그대로 말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말한 것입니다. 말이라는 게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인 구석이 많아서 안 하느니만 못한 데가 많기는 합니다.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자 네루다는 기뻐하였다. 호르헤 에드워즈에 의하면, 소련 문학의 고립 상태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 소식을 네루다는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뒤 크렘린 당국이 《의사 지바고》의 출간을 금지하고 수상식을 위해 파스테르나크가 스톡홀름에 가는 것도 막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네루다는 ‘당연히 이 조치에 항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심각한 정치적 파장이 일고, 당시 사람들의 표현대로 〈적의 논리에 탄약을 제공해 주는〉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감격을 잠잠 숨기고 불편함 침묵을 철저히 지키는 쪽을 택했다.’

이 침묵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루다는 우익의 적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냉전시대의 게임 규칙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파스테르나크를 탄압한 소련 당국의 태도를 그가 침묵으로 용인한 것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애덤 펜스타인,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최권행 옮김, 생각의나무, 2005, 515-516면)

 

소련의 태도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구 진영의 편을 들 것도 아닌 네루다의 침묵을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침묵하기〉가 이런 처지에서 쓰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 웅변보다는 침묵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더 필요한 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완전한 무위無爲와

혼동돼서는 안된다.

삶이란 이제 막 일어나려는 것들

난 죽음과는 어떤 거래도 원치 않는다.

 

‘침묵’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네루다는 알고 있습니다. 침묵은 ‘무위’가 아닙니다. 침묵하는 까닭은 새롭게 시작하는 삶 때문이지 죽을 날이 가까워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 아등바등, 티격태격, 우격다짐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으면 아마도 깊은 침묵이 우리의 슬픔을 씻어 줄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죽은 듯이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모든 것이 살아 있듯이

아마도 대지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리라.

 

깊은 침묵, 참된 침묵은 삶의 온상이지 죽음의 무덤은 아닙니다.

 

한마디.

21세기 들어서도 이 땅은 내내 말말말의 홍수입니다. 처음에는 놀랍게도, 안 해도 좋을 말들만 골라 주고받으며 시비를 그치지 않더니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해서는 안 되는 말로 감쪽같이 왜곡시켜 말의 무덤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성장을 멈춘 어른인 어린애들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주무르는 세상 같습니다.

아마 절제의 미덕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이런 시절에는, 침묵이 개선까지는 몰라도 더 악화되게는 하지 않는 길 아닐까 합니다.

 

최근 문단에서 일어난 일들,

 

한국시인협회에서 발간한 《사람 - 시로 읽는 한국근대 인물사》가 일으킨 시시비비-시집 회수-유관순 유가족과 유관단체에서 요구한 정호승 시인의 시 〈유관순〉삭제 및 사과-정호승 시인의 사과문 게재 및 연작시 〈유관순〉영구히 삭제 약속,

 

그리고 안도현 시인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은 절필, 정확하게 절필이 아니라 시만은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일과 그것이 마땅치 않아 미주알고주알 까발린 조선일보 문화부장 박은주 기자가 쓴 칼럼,

 

모두가 할말과 헛말을 구분하지 않아 일어난 부끄러운 일들 같습니다. 〈침묵〉이 절실한 세상 같습니다.

 

인어와 술꾼들의 우화

 

그녀가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들어왔을 때

그 고매하신 양반들은 모두 술집 안에 있었다

그들은 술을 퍼마시다가 그녀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다

이제 막 강에서 올라온 그녀는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그녀는 길 잃은 인어였다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 위로 욕설이 흘렀고

음란한 짓거리가 그녀의 황금빛 젖가슴을 뒤덮었다

그녀는 울 줄 몰라 울지 않았다

그들은 담뱃불과 불에 탄 코르크 마개로 그녀를 지져댔다

그러고는 낄낄거리며 술집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말할 줄 몰랐기에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아득한 사랑의 빛이었고

그녀의 두 팔은 한 쌍의 황옥으로 빚어졌고

그녀의 입술은 산호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갑자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강에 들어서자 그녀는 금세 깨끗해져

빗속의 하얀 돌처럼 빛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헤엄쳤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갔다.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 시선》, 김현균 옮김, 지만지, 2010, 208면)

 

이 시도 앞의 시 〈침묵하기〉처럼 《에스트라바가리오Estravagario》(1958)에 실려 있습니다. ‘에스트라바가리오’는 네루다가 만든 신조어인데 ‘extra별난+vagar방랑하다’의 합성어로 ‘별난 방랑’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인어〉와 ‘고매하신’ 〈술꾼들〉.

 

막 강에서 올라온 영문을 모르는 알몸의 ‘인어’,

길 잃은 매끄러운 살결, 황금빛 젖가슴의 ‘인어’,

말할 줄 몰라 말이 없으며, 아득한 사랑의 빛을 담은 두 눈의 ‘인어’,

황옥으로 빚은 두 팔에, 산호 빛 입술을 지닌 인어.

 

술 퍼먹고 침 뱉고 욕하는 ‘술꾼들’,

음란한 짓거리와 담뱃불 등으로 그녀를 지져대는 ‘술꾼들’,

좋다고 낄낄거리며 술집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술꾼들’.

 

〈술꾼들〉을 못 견뎌 강에 들어서 금세 깨끗해져,

하얀 돌처럼 빛나 다시 헤엄치는 〈인어〉.

 

옮긴이 김현균 교수는 “〈인어〉와 〈술꾼들〉은 각각 시인 네루다와 순수를 잃어버린 타락한 세상 사람들에 대한 알레고리로 등장한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관능적 순수함’, ‘순수한 관능’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빛나는 ‘인어’인데 ‘술꾼들’은 못된 짓만 골라서 합니다. ‘술꾼들’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잃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갔다.

 

미래 또는 따른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갔”습니다. 고약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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