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열어주다 - 멋진 스승들
성우제 지음 / 강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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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참 행복하네, 나이 들어도 모르는 게 있으면 ‘여쭤볼 선생님’이 계실 터이니. 난 말야, 나이 50이 되니 모르는 게 있어도 이젠 여쭤볼 은사님이 안 계셔, 지금 모르는 것은 평생 모르는 것일 수 있어, 제자들이 가르쳐주면 모를까.”

 

1991년 8월, 갓 마흔이 넘어 대학에 전임이 되어 춘천으로 떠나기 전, 찾아뵌 평생 ‘젊은 스승’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젊은 스승’은 성우제 후배가 책의 맨 처음에 소개한 김화영 선생님이고, 선생님께서 염두에 둔 ‘여쭤볼 선생님’은 아마 이 책의 두 번째, 세 번째 장을 차지하는 내 ‘평생의 스승’ 강성욱 선생님과 ‘스승 같은 선배’ 황현산 선생이겠다.

 

1980년대 후반 앙드레 지드에 대한 좋은 논문으로 석사를 마쳐, 박사과정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던 성우제 후배(나는 69학번, 우제는 82학번)는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홀연, 창간한 주간지 〈시사저널〉 기자로 나타났는데, 그 후, 나는 우제 후배가 2천 년대 초 아이 교육문제로 카나다로 이민 갔다는 말을 들었고, 2006년 겨울에는 《느리게 가는 버스》(강)라는 산문집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구입해 읽었다. 김화영 선생님과의 아름답고 소중한 사제관계를 빼면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글 솜씨가 빼어나다, 역시 소설가 성석제의 동생답군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선생과 학생만 있고(요즘은 그 관계만 해도 어디냐 하는 생각이 든다) 스승과 제자는 없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곰곰이 따지면, 스승 한 분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우제 후배 말대로 대개는 스승을 잊고 있거나 누가 스승인지 모르고 사는 게 아닐까? 이 책을 읽다보면 세상에 스승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우제 후배처럼, 자기 삶의 스승을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제 후배에게는 삶의 국면들 마다 스승이 계시다. 고등학교 시절(전신재), 대학시절(김화영, 강성욱, 황현산), 언론계 시절(안병찬, 김훈), 취미생활(박이추), 카나다 이민생활(김종성), 이렇게 생활환경이 바뀔 때마다.

 

우제 후배가 소개하는 스승들의 면모를 읽으면서 나는, 그분들에게서 공통점을 본다. 스승들은 모두가, 당신들의 분야에서, 말이나 지침이나 주장이 아니라 ‘실천’으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몸소 보여 주는 분들이다. 참스승의 모습이겠다(앞으로 스승이 되고 싶은 독자들은 꼭 챙겨야 할 부분이다).

 

이 책의 미덕은 재미있고 쓸모 있다는 점이다. 어젯밤 나는 책을 편 자리에서 책을 다 읽고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만큼 재미있다. 잠자리에 든 뒤에는, 내게도 스승인 세 분 선생님은 물론, 며칠 전 강릉에 갔다 들른 사천면의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공장〉의 박이추 선생에 대해, 그리고 삶에서의 스승의 자리, 나는 제자의 자격은 있는가 등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을 설쳤다, 그만큼 쓸모 있다. 우제 후배 덕분에 다시 확인한 게 있다. 나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내 스승께서는 이런 경우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습관적으로 따져본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스승이 있어야 할 중요한 까닭의 하나이리라.

 

책은 우제 후배의 평생 스승들의 면모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좋은 제자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문득, 훌륭한 스승들의 좋은 제자, 우제 후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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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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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1959년 박이문의 번역으로 소개된 후, 정기수(1968년), 윤영애(1976/2008년), 박철화(2013년)의 번역에 이어, 이번에 황현산의 번역, 주해본이 나옴으로써, 드디어 진본과 다를 바 없는 한국어 판본을 갖게 되었습니다.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적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이라는 시인의 기적 같은 꿈이 빚어낸 이 산문시집은 19세기 유럽의 도시적, 현대적 시인의 예술론이자 시학입니다.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서 보들레르는 줄곧 미학과 윤리가 빚어내는 갈등의 한가운데 있다. 그는 윤리적 관점에서 책임 없는 미학을 증오하고 미적 관점에서 깊이가 결여된 윤리적 주장을 경멸한다.’(황현산, 222면)

 

이 번역본의 구성은 기왕의 번역본들과는 다릅니다. 특정 시어나 시구들에 주석을 다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시집을 번역하여 앞쪽에 놓고, 시 한편 한편을 통째로 주해註解하여 뒤쪽에 놓았습니다. 〈주해〉편은 각 시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세밀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주석 뿐 아니라 보들레르의 시세계, 산문시의 정신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깊은 학문, 그리고 디테일들을 엮어 한편 한편의 글을 만들 수 있는 스토리텔링 능력, 이 두 가지를 겸비한 학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문학성이 담보된 학문적 업적입니다. 주해부분만으로도 한권의 책이 될 만한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황현산판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쯤 될 듯싶습니다.

 

33 취하라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황현산 옮기고 주해, 문학동네, 2015, 99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공분야도 아닌 프랑스 시 강의를 평생 다섯 학기 정도 했습니다. 강의 때마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원문으로 시들을 외울 것을 주문했는데, 졸업 후 만난 학생들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프랑스어로 시를 외우느라 애를 먹던 그 시절의 고생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들끼리 모여 선생에게 툴툴거리던 이야기까지. 십년이 지나서도 외울 수 있다며 외워보는데 압도적으로 많은 시가 바로 〈취하라〉입니다. “앙니브레 부, 일포떼트르 뚜주르 이브르, 뚜떼라, 쎄 뤼니크 께스티옹…” 취하라, 무엇에? 술에, 시에, 미덕에… 사랑에, 살에, 정신에, 책에, 그림에, 영화에, 혁명에… 또는 무엇에든! 그러나 어떻든 취하라. 《인공낙원》어딘가에 보면 술 취해 길에 누운 술꾼, 하늘을 보며 주절주절 대는데, 술주정 같고 헛소리 같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모두가 시더라는 대목이 있을 겁니다. 도취상태에서의 고양감 그리고 집중력을 말하는 것일 텐데, 이 시도 언뜻 보기에는 도취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도취상태 또한 빛과 그림자를 갖고 있어 이중적, 양면적이라는 것을. 도취상태는 집중력을 끌어 모으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고 아픈 현실에 눈 감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시간〉, 취한 우리에게 찾아드는 게 〈시간〉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 〈시간〉을 피할 수는 있다는 위로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오늘 제 설명은 여기서 멈춥니다.

 

더 좋은 해설은 황현산 선생의 번역/주해본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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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 아저씨 문학과지성 시인선 3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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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기]

 

유신체제, 광주항쟁 이후의 전두환 독재시대, 노골적인 저항시가 없다고 해서 정현종 시인이 그 시기를 편하게 지낸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이 창피하고 치욕스러웠습니다. “그런 정치적인 분위기가 작품에 알게 모르게 작용한 게 틀림없을 것입니다. 억압의 상태를 쓸 수는 있지만, 억압의 원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요. 고전적인 명제가 예술이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이라면, 그런 흔적들이 명백하게 정치적인 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배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정치적 억압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한 시들에 대한 정 시인의 생각. “그것은 일종의 체질이나 개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그때의 문제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나의 체질은 아닙니다. 70년대 80년대 정치적 상황에서는 노골적으로 비판한다거나 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정치권력과 매체, 그리고 쓰는 사람 자신이 3중으로 검열을 했으니까요. 모두 자기 방식대로 그런 것을 뚫고 나오려고 하는 노력들은 했다고 봅니다. 좀 더 직설적인 경우는 화제가 되었을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고, 예술가의 삶의 배경과 체질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나쁜 정치 환경 때문에 안으로 꼬여들어간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좀 더 복잡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는 물론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작품을 쓴 적은 없지만,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있기는 합니다.”(이상 인용은 《정현종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9, 33/34면) 앞서 말했듯이 〈최근의 밤하늘〉그런 정치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를 산문으로 바꿔 서사화 합니다. 우선 첫 연.

 

옛날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빵 하나 나 하나

빵 둘 나 둘이 있을 뿐이다

정신도 육체도 죽을 쑤고 있고

우리들의 피는 위대한 미래를 위한

맹물이 되고 있다

 

별 하나, 나 하나...에서 !빵 하나, 나 하나...의 나라로. 꿈을 노래하는 동화의 나라에서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의 세계로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밥을 짓는데 죽이 됐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잘 되는 게 없습니다. ‘위대한 미래’, 전제의 냄새가 짙게 풍깁니다. 독재자의 시대가 찾아 왔습니다, ‘위대한 미래’를 건설한다며, 내 피를 빼앗아 갔지만, 제대로 쓰이는 게 아니니, 내 피는 맹물이나 마찬가지가 됐습니다.

둘째 연.

 

최근의 밤하늘을 보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별들은 자기들의 빛으로

가슴 깊이 감싸주고 있다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하여

유언流言 같은 별빛을 던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 사달이 난 게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이, 참담한 비극이 찾아왔으나, 그를 막아내기는커녕, 사람들은 그를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직 밤하늘의 별들만 그 빛으로 이 비극을 감싸주고 있으나, 별들조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애매모호한, 유언 같은 희미한 빛만을 던지고 있습니다.

정 시인은 김지하 시인과 엮여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가 고초를 겪은 일이 있습니다.정 시인의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이런 조그마하고 사적인 삽화가 1970년대 씌어진 정치시에 드리워져 있는 무거움과 괴로움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느끼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다.” 같은 시기, 같은 상황, 창피하고 치욕스런 몸과 맘의 상태에서 쓴 시들입니다.

 

통 사 초痛史抄

 

옛날옛날에 덫과 올가미가 살았습니다. 덫은 올가미를 노리고 올가미는 덫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돌뿐이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쇠뿐이었습니다

우리야 돌 속의 돌이요 쇠 속의 쇠였습니다

덫이 올가미를 덮치는 순간 그야 올가미는 덫을 얽었습니다.

아, 덫과 올가미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1994, 28면)

(정현종, 《정현종 시전집 I》, 문학과지성사, 1999, 124면)

다시 정현종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한국과 그 국민의 한심한 운명에 대해 써본 것인데, 1974년 9월부터 약 6개월 동안 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에는, 군사독재 아래 참담한 상태에 있는 한국에 대한 연민에 휩싸여, 눈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동안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쓴 작품이 〈술잔을 들며〉와 〈다시 술잔을 들며〉다.”(이상 인용, 정현종 산문집, 《두터운 삶을 향하여》, 문학과지성사, 2015, 82/83면) 두 시를 싣습니다.

 

술잔을 들며

― 한국, 내 사랑 나의 사슬

 

1

불행이 내게 와서

노래 부르라 말한다

피 흘리는 영혼 내게 와서

노래 부르라 말한다.

내 인생은 비어 있다, 나는

내 인생을 잃어 버렸다고 대답하자

고통이 내게 와서 말한다―

내 그대의 뿌리에 내려가

그대의 피가 되리니

내 별 아래 태어난 그대

내 피로 꽃 피우고 잎 피워

그 빛과 향기로 모든 것을 채우라.

 

2

우리들의 고통을 헤아려 보겠다고?

모래알을 헤아리면 된다

모래알 하나에서 우주를 본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수 많은 우주를 갖고 있다.

 

3

김씨 이씨네의 한 많은

두부찌게들이 보고 싶습니다

보면 먹지 않고

한없이 바라만 보겠습니다

고통의 별 아래 태어난 우리들,

한국을 사랑하는 것은

그 별빛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새의 날개를 만든 뒤

더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겨드랑이에서 눈물이 돋습니다

돋으면서

슬픔으로 날자 상처로 날자 외칩니다

 

4

꽃들 좀 피어나거라

지식 국화, 농부 진달래

학생 장미, 노동 패랭이

제값으로 피어나는 소리 좀 열려라

남도창, 정선 아리랑

천안 삼거리, 명동 블루스

부채춤, 강강수월래, 구고무九鼓舞, 불놀이

북, 꽹과리, 가야금, 기타아……

이쁜 가슴 비벼 이는

푸른 빛의 메아리 속에

자유 있는 육체와 육체 있는 자유로

일과 춤을 섞고 사랑한다 말하며

농부들은 씨뿌리고

시인들은 노래하며

학자들은 생각하고

애인들은 사랑하는 땅

아 우리들의 명절이 있어야겠다

한국, 내 사랑 나의 사슬아!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1994, 46-48면)

(정현종, 《정현종 시전집 I》, 문학과지성사, 1999, 142-44면)

 

다시 술잔을 들며

― 한국, 내 사랑 나의 사슬

 

이 편지를 받는 날 밤에 잠깐 밖에 나오너라

나와서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을 바라보아라

네가 그 별을 바라볼 때 나도 그걸 보고 있다

(그 별은 우리들의 거울이다)

네가 웃고 있구나, 나도 웃는다.

너는 울고 있구나, 나도 울고 있다.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1994, 49면)

(정현종, 《정현종 시전집 I》, 문학과지성사, 1999, 145면)

 

정현종 시인은 앞의 인용문에서 참담한 현실에 직접 대응하는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정치적인 의미를 담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들에서 우리는 ‘삶의 현실’을 시인이 어떻게〈시적 현실〉로 바꾸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두드러지는 게 〈시적 유희성〉의 문제입니다. 이는 다음으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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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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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 만에 《발원 - 요석과 원효》 1, 2권을 들고 나타난 시인 아니 작가 김선우에게 건넨 내 첫마디는 반갑다거나 애썼다가 아니라 “어디 아파?” 일만큼 그는 말라 있었습니다. 1년 넘게 작품을 퇴고하느라 5kg. 빠졌다는 게 답이었습니다. 얼굴은 병색은커녕,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의 근심은 탐욕에서 나오고 사람의 즐거움은 만족에서 나오나니 만족을 모르면 즐거움이 없나니라.”(1권, 214면)

 

그의 얼굴 표정은 이 작품에 원 없이 공 들였음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시인으로서든 소설가로서든 김선우는 문학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는 드문 작가 중 하나입니다. 김선우의 시 쓰기는 대학생 시절 어느 날,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담은 다큐멘타리를 보고 받은 충격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시를 통해,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지만, 〈근본적 치열성〉의 미학을 대표하는 최승자, 김혜순 등 이전 시대와는 다른 〈유희적 치열성〉이라는 자기 나름의 시의 미학성을 확보함으로써 1970년 즈음에 태어난 시인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시 〈내 몸 속에 잠드신 이는 누구신가〉를 보면, 이만큼 시적 완성도를 실현한 에로틱 포에지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은데, 출발점이 어디였든 김선우는 폭 넓은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자기 시를 어딘가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있습니다(자기가 왜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지적해 둬야 합니다).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이 권한 소설가의 길

 

시인 김선우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난쏘공〉의 조세희 선생님의 권유 때문입니다. 현실의 감춰진 민낯을 들춰내는 게 소설이 해야 할 공적 사명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선생님이 보기에, 김선우가 그런 소설을 쓰기에 적격인 글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이는 김선우가 쓴 글에도 있지만 2010년 5월, 조세희 선생님과의 전화통화로 내가 직접 확인한 일입니다.

김선우가 발표한 그 동안의 소설들, 《캔들 플라워》는 촛불시위의 의미를, 공저 《구럼비를 사랑한 별이의 노래》는 제주도 구럼비 마을 강정의 비극을, 《물의 연인》은 4대강 사업이 저지른 생명/자연 파과의 참혹한 현장을 배경/주제로 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현장/현실을 고발한 소설인지 알아채기 힘들만큼 문학적으로 변용된 소설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소설가로서의 김선우가 지닌 남다른 장점입니다.

‘요석과 원효’라는 부제가 달린 《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불시위, 강정마을의 끈질긴 투쟁, 4대강 사업 반대,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결국 정의는 이긴다’ 하는 진실을 증명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지개벽할 정도로 일거에 정의가 실현돼 천국이 찾아오려는 것일까, 세상은 변함없이 개판인 시절, 2012년 봄, 김선우는 〈불교신문〉으로부터 신문연재를 청탁 받습니다. 청탁내용은 간단합니다.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주십시오”.

2013년 봄, 김선우는 연재를 끝냅니다. 그리고 1년이 넘게 작품을 매만지던 중인 2014년 봄, 304개의 생명을 바다 속 깊숙이 처박는 일이 일어남으로써 대한민국은 야만국가임을, 아니 국가도 아님을 만천하에 알립니다. 그리고 이 참사는 소설의 완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 영향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느라 또 1년이 지나, 2015년 봄, 7백면짜리 장편소설 《발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대가였을까, 김선우의 살 5천그램이 고스란히 사라졌음을 다시 한 번 여기 적습니다.

 

소설 《발원》은 김춘추, 신라 29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과 원효대사의 사랑이야기를 기본 플롯으로 한 연애소설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원래 요석공주와 가약을 맺었던 보현랑이 있습니다. 세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사랑이야기, 플라토닉한 사랑(요석과 원효), 《슬픈 카페의 노래》의 카슨 매컬러스가 지고의 사랑으로 여기는 아가페적 사랑(원효와 요석에 대한 보현랑의 사랑)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쿨하게, 고상함 밑에 숨겨진 터질 듯한 사랑의 격정으로 숨 막히게, 독자들을 한눈팔지 못하게 하며 끝까지 끌고 갑니다.

 

고상하면서 숨 막히게 하는 연애소설

신기하도록 에로틱한 장면 묘사

 

권력을 걸머지기 위해 김춘추는 딸 요석을 정략결혼의 제물로 삼습니다. 궁내의 실력자 알천공의 며느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김춘추는 무열왕이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요석의 남편인 알천공의 아들 소파용은 전사하고 요석은 과부가 됩니다. 소설의 끝에 이르면 과부인 공주 요석과 온 백성이 우러러 보는 스님 원효는 잠자리를 함께 하고 이제 원효는 파계하고 평복을 입은 불교 신자가 돼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동시에 ‘실천’합니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은 참으로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만으로도, 아가페적 사랑만으로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로틱한 사랑이 함께 해야 드디어 인간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함께 해야만 진짜배기 사람의 사랑은 이뤄진다는 점을 이 소설은 스토리텔링 면에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석과 원효가 한 몸, 한 마음, 한 정신이 되는 장면의 묘사, 나는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이만큼 고상하고 격정적인, 숨 막히며 숨길이 확 트이는, 서로가 자유로우며 동시에 서로가 하나 되는, ‘신기하게’ 에로틱한 묘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길지만 인용합니다. 

 

‘저는 성심을 다해 넘어지고 성심을 다해 일어날 겁니다. 곁에 있든 없든 제가 언제나 당신과 함께임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내 사람입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저는 당신 사람입니다.’

모든 지나간 일들이 아득했으나 요석의 숨결만은 그날보다 더욱 생생했다.

머뭇거리던 원효의 입술이 열린 순간, 요석의 더운 숨길이 원효의 몸으로 밀려들어 왔다. 삽시간에 온몸에 자욱한 열기가 휘돌았다.

안아 주십시오. 더, 더 꼭 안아 주십시오. 원효의 품을 파고들며 요석이 입속에서 궁굴린 말들을 원효는 마음으로 전해 들었다. 눈물이 배어나오며 심장이 아팠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한 말들이 요석의 몸을 더욱 뜨겁게 이끌고, 몸속에서 회전하던 말들이 격류가 된 숨결로 원효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오래전 죽은 고목처럼 저는 텅 비었습니다. 이 텅 빈 몸이 원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오직 님입니다. 요석은 격렬하게 원효의 몸을 탐했다. 이 마음을 삿되다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오직 내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바닥까지 내려간 삶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바닥이었다.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는 바닥, 떨어진대도 받아줄 이 아무도 없는 바닥이었다. 혼불 없이 그저 텅 빈 몸으로 살았습니다. 죽어서 살았습니다. 요석이 울었다. 원효의 등을 꽉 껴안은 채 벼랑에 매달린 듯 온몸을 붙여 오며 요석이 흘리는 눈물이 원효의 심장을 찢었다. 이렇게는 아니 되겠습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안아 주십시오. 더 꼭 안아 주십시오. 요석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뜨겁게 원효의 몸을 원했고, 가두어 둔 시간의 지층 속으로 온몸을 밀어 넣듯이 원효의 몸으로 자욱하게 밀려들었다. 봉인된 시간을 풀어헤쳐 살과 피와 뼈로 가져오려는 듯 격렬하고 아득한 요석의 몸을 원효가 받아 안았다.

몸이 영혼과 다르지 않았다. 불일불이했다. 원효의 몸은 원효의 영혼이었다. 사랑해 주십시오. 다 가지겠습니다. 지난 세월과 앞으로의 세월까지 모두 이 밤에 가지겠습니다. 이 순간이 저의 영원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쳐 오듯 격렬히 원효에게 내달려 오는 요석을 껴안으며 원효는 온몸, 온 마음으로 요석에게 화답했다. 영혼이라 일컬을 수 있는 시공의 모든 인연들이 요석의 몸과 함께 새로워졌다. 처음 만나는 밤이었고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수만 년 거듭 만나 온 밤이기도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원효는 푸른 바다처럼 자신을 펼쳐 포말을 일으키며 내달려오는 요석의 온몸, 온 영혼을 껴안았다. 온 정성을 다해 만지고 쓰다듬고 입 맞추었다. 살과 뼈와 사랑의 액체들이 뒤섞인 불일불이한 몸의 우주 속에서 몇 번이고 빛이 폭발했고 충만한 어둠이 태어났다. 비리고 달큰한 파도가 수차례 물마루를 이루며 넘실거렸고, 몸이 펼쳐 준 길을 따라 요석이 가슴에 쌓아 둔 이야기들이 은하처럼 풀어져 흘러갔다. 한 물마루에서 다른 물마루까지 포말의 수평이 아득히 펼쳐지고 요석의 신음과 숨결과 환희에 찬 탄성이 물방울들로 흩어져 솟구치다가 다시 수평을 이룰 때, 님이여... 요석이 가끔 중얼거렸고, 그때마다 눈물이 터졌으며, 그 눈물을 원효의 입술이 따스하게 핥아 갔다.”(2권, 249-251면)

 

이 소설은 연애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정치소설로 읽어 손색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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