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초상
김원우 지음 / 강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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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아, 이 풍요로운 선남선녀의 물결, 촌스러운 딜레탕트들, 설마 이런 설익은 딜레탕티슴이 이 지방 도회지에만 넘실거릴까. 두텁다. 뻔뻔하다, 안팎이 요란하다, 반지빠르다, 의뭉스럽다, 어여쁘다, 갑신다. 이런 대규모의 조직적인, 합심협력의 세련이 이 땅에서나 있는 일인가.

아, 이 도도한 딜레탕트의 세상, 영원하라. 더불어 양손으로 돈 ․ 생업 ․ 남자 ․ 시심詩心 같은 여기를 마음껏 굴리면서도 천지간의 명암을 지 혼자서 다 아는 치하는 여자의 씩씩한 생명력에 영광 있으라. 그렇게나 만만히 보고 알 만큼 안다고 치부한 이 세상이, 또 그 속의 인간이 이토록 난해한 줄 이제사 알다니. 그야말로 유구무언이다. 그렇게나 흔전만전으로 글을 ‘써제낀’ 잡문가 주제에 감히 무슨 말을 더 보탠다 말인가.”

(김원우, 《부부의 초상》, 강, 2013, 455면)

 

[북 리뷰]

 

《모노가미의 새 얼굴》(솔, 1996), 《새로운 천사》(세계사, 2005), 《돌풍전후》(강, 2011), 김원우의 신작 《부부의 초상》을 읽고 생각난 그의 작품들입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의 세상임에도 일부일처제라는 포장으로 덧씌워진 세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까발린 《모노가미의 새 얼굴》, 교수사회의 부끄러운 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나머지 두 작품, 이번 신작도 그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번지르르한 겉포장과는 달리 쇄말주의, 속물주의에 흠뻑 물들어있는 언론계와 화단이 그 대상입니다.

 

소설의 화자인 언론인 출신 안모는 언론의 실체/한계를 세 가지로 정리하는데 신문이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언론인들은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망원경으로 세상을 봅니다.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입니다. 또 하나는 다 털어놓을 수 없다는 기밀 고수주의인데 이는 직무유기이며 “그로 인한 가짜 권위의식과 자기중심주의도 큰 병폐”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천부당만부당하게도 걸핏하면 다 안다는 시건방진 오만함”입니다. 기자들은 다 아는 것 같지만 대충일 뿐 제대로 아는 것은 단 한 분야도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신문기사는 진짜 현실과는 일정하게 유리되고 말아서 어떤 피상적인 세계의 재현에 그치고” 맙니다.

 

화단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여느 화가들은 이상하게도 ‘세상’에 대해서는 말이 많고, ‘사물’을 보는 자기만의 시각에 대해서는 좀체 입을 떼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그림으로만 말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 “내 작업의 실체는 언어로 옮겨 놓기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말을 많이 하라는 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가 얼마든지 지 그림을 설명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 반대로 말이 많은 부류는(이를테면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전혀 얼토당토않은 견강부회에다 동어반복으로 가탁假託을 일삼는다. 그런 억지스런 핑계는 엉성한 거짓말처럼 밑바닥이 훤히 보여서 청자를 무안하게 하게 만든다. 그러니 저희들끼리 나누는 말도 가식이기 십상이고, 조명을 받으려고 기자에게 부려놓는 말속은 온통 횡설수설에 가깝다.”

 

자기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무슨 형상을 어떤 이유로 구도화 하는지를 반쯤이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게 화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게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되는 게 세상의 현실이라서 과대평가된 엉터리 그림들이 버젓이 행세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언론계와 화단의 부끄러운 이면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김원우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 쯤 되면 이미 다 아는 사실이기에 김원우가 이 소설을 쓴 까닭 가운데 이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내가 이 작품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제목도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부쩍 늘어난 부부관계, 주말 부부가 그들의 사이를 항상 붙어사는 부부에 비해 어떻게 달라지고 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며 또 하나는 대책을 세우기에는 이미 늦지 않았나할 정도로 범람하는 말, 말, 말의 홍수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도 ‘말’과 무관하지 않은데, 사투리를 ‘대화’ 뿐 아니라 소설 문장에 정식으로 채용하고 있는 일과 만연체의 사용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대구 지방 신문기자 출신 안모입니다. 화가 노옥배의 전시회 초대를 받는 게 소설의 시작이고 며칠 후 열린 전시회개막 축하모임자리가 소설의 끝입니다. 4백면은 족히 될 그 중간은 주로 화자 안모가 기자 생활하면서 20년이 넘도록 자주는 아니지만 끊어지지 않고 교유를 유지한 화가 노옥배와 시인으로 막 등단한 신인 작가 시절 신문 칼럼을 맡기면서 알게 된 필명 고은미 부부에 대한 회고로 메워집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생활여건이든 취향 때문이든 두 집 살림을 하거나 각 방을 쓰는 부부들의 모습이 한 방에서 살을 부대끼며 사는 부부들과는 사뭇 다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은 우선 돈에 관한 한 따로따로일 가능성이 큽니다. 두 집 살림 하는 부부의 실상을 알아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의 하나인데 자세한 사정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산다는 것은 인간을 정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때를 덕지덕지 묻혀가는 여정일 겁니다.‘친정으로 마누라까지 쫓아버린 대처승’ 같이 속기를 한결 덜어낸 인상의 노화백, “못생기고, 옷꼴도 까짓것 허름한 주제임에도 말을 똘똘하게 하니 대번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뿌듯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에서 부걱부걱 괴어오르게 하는” 고은미 시인, 화자는 그 둘 다에게 호감을 갖고 지내왔는데 노화백의 환갑 기념 전시회인 마지막 장면에 이르니 화백이나 시인이나 예외 없이 속기俗氣 만발입니다. 그런 노화백을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단새 사람이 너무 변했네. 청렴한 판사가 옷을 벗자마자 돈맛 알고 팔을 걷어붙인 변호사 짝이 났네.” 고시인도 마찬가지, 그동안 써온 시를 추려 “한 80편쯤으로 시집을 한 권 묶”으면 한이 없습니다. “나이도 있고 한이 인자는 부끄럽다 뻔뻔스럽다 그런 말 다 집어치아뿌고 누가 뭐라 카든 말든 지 말, 지 눈이 이렇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말의 범람, ‘할말’이 아닌 헛말의 홍수, 한 줄도 제대로 못 채우는 단문의 남용, 작가는 이 시대의 병폐의 하나로 이를 꼽는 듯합니다. 책의 끄트머리 〈작가의 말〉로 미뤄(“원고 입력에서 책이 나오기까지 신세를 많이 진 여러분”) 작가는 여전히 원고를 ‘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작가가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지만 신변잡기식 수다와 단문으로 일관하는 작금의 우리 소설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기도 했습니다. 개인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달 때문이겠지만 말말말의 홍수는 대책이 없습니다. 풍자, 유머와 막말이 구분되지 않고 침묵의 언어는커녕 절제된 언어는 사라지고 수다로 꽉 찼으나 내용은 텅 빈 헛말들만 만발합니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언어의 마술사이어야 할 작가들조차 뭣에 쓰려는 건지 자기도 모르면서 공허한 수다를 늘어놓습니다. 문장의 길이가 사고의 길이, 호흡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단문의 남용은 하드 보일드 터치, 헤밍웨이를 거론하며 반길 일만은 아닙니다. 아마도 작가의 만연체는 작의적이기도 한 듯합니다.

 

“이쯤에서 덧붙이고 싶은 그의 프로필에 대한 내 정서는 언젠가부터, 다른 종교들이 그 창시자나 사도들까지 전 생애를 시종일관 헐레벌떡 싸돌아다니며 선교에 전념하는 데 비해 불교 쪽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따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조의, 정 좀이 쑤시거들랑 잠시잠시 탁발승 노릇이나 하다가 다시 ‘지 자리 지키기’에 매진하라는 그런 이미지를 노모 화백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비쳤다는 사실이다.”

 

마침표가 마지막에 한번만 찍힌 한 문장입니다. 이 정도 길이의 문장이 이 소설에는 면마다 넘칩니다(오탁번 시인이 창간한 시 전문 계간지 《시안》의 창간사가 생각납니다. 1675자 2백자 원고지 8.5매 분량의 창간사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돼 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문학이야기〉를 열어보세요).

 

작가는 경상도 사투리를 정식으로 채용, 소설 도처에 깔아놓았습니다. 이는 표준어를 무시하고 사투리를 애용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투리의 적극적 사용도 충분히 작의적인데 내용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 문체를 찾아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현해본 것입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는 내가 사용하는 세련된 중산층의 언어의 기원이 실은 내가 그렇게 피하고 싶고 창피하게 여기는 밑바닥 삶을 산 부모님의 거칠고 천박하기도 한 언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경상도 토박이는 경상도 사투리가, 전라도 토박이는 전라도 사투리가 가장 몸에 익은 언어입니다. 동향사람들을 만나 긴장을 풀면 자기도 모르게 옛날에 쓰던 동네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옵니다. 하고 싶은 말과 하는 말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김원우는, 수다는 그만 떨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그것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언어, 문체, 형식을 찾아 애쓰라는 메시지를 말만 많은 작가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상파, 종편 가릴 것 없이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이걸 내가 왜 봐야지 하는 예능프로가 부지기수이고 그런 식의 자기계발 치유를 내세운 산문집 역시 널려있습니다만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이걸 내가 왜 읽었어야지 하는 낭패감을 안겨주는 기대했던 작가들의 쓸데없이 말만 많은 소설들입니다.

 

김원우의 작품들은 단문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부담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익숙해지면 중얼중얼 대듯 잘근잘근 씹듯 여운이 긴 뒷맛을 쉽게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다이기 십상인 단문 위주의 소설 편식에 빠진 독자들에게 균형감을 회복하기 위해 강추하는 좋은 소설입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1990년 전후, 어디에선가 김원우는 좋은 서사의 필수조건인 화자의 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점을 한국소설가들의 약점으로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시점이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치밀한 계산 아래 이뤄져야 한다, 허나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었을 겁니다. 서사의 측면에서 이 작품을 보는 일은 문학평론가 김인환 명예교수(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훌륭한 〈작품해설〉을 읽으면 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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