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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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10명의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구덩이 삼면을 에워쌌다. 나머지 둘은 스키 폴만큼이나 긴 죽창을 쥐고 철장 문을 열었다. 덤프의 적재함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들이 구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몇 마리씩, 곧 무더기로 떨어진 개들은 곧장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누워 자빠진 동료의 몸을 딛고 서로의 머리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구덩이를 에워싼 군인들은 착검한 총 끝으로 개들을 찍어서 구덩이로 다시 떨어뜨렸다. 죽창 군인 둘은 철장 벽에 붙어 버티는 개들을 창으로 찍어 떼어냈다. 큰 개, 작은 개, 검은 개, 흰 개들이 눈을 찍히고, 뱃가죽이 뚫리고, 등이 꿰인 채 핏물을 내뿜으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구 한 마리가 창살을 발로 움켜쥐고 버둥거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피투성이가 돼서 구덩이로 떨어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선 굴삭기가 구덩이를 덮기 시작했다. 개들은 떨어져 내리는 흙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 울음이 윤주에겐 사람의 말로 들렸다.

 

살려주세요.

 

흙덮기가 끝났다. 굴삭기와 군인들이 떠났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는 벌판 밑에선 개들의 비명이 들끓었다. 땅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온 벌판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정유정, 《28》, 은행나무, 2013, 240-241면)

 

[북 리뷰]

 

《7년의 밤》의 작가 정유정이 신간을 냈습니다.

 

 

 

 

 

 

 

 

 

 

앞에 뽑은 [이 한 대목]으로 눈치 챈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선 2010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휩쓴〈구제역 사태〉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나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을 살처분(산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것)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데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그 동영상을 보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있었을 정도이니 그 끔찍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괴물과도 같은 전염병에 일격을 당함으로써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 차단된 도시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처절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가상의 도시 이름이 ‘눈부신 햇빛’[화양]이라는 것 때문에 ‘빛고을’인 〈광주〉를 또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페스트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도시 오랑시에서 동기야 어찌됐든 아름다울만큼 치열하게 구조활동을 벌이는 인간군들의 휴머니즘이 한껏 발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페스트》를 떠올렸습니다.

 

2014년 1월 말, 가상의 도시인 경기도 화양시에서,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없는, 걸리면 회복 불능인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발생하여 28일간 도시를 지옥으로 만듭니다.

 

화양華陽시.

다섯 개 산과 열두 개 봉우리 안에 들어앉은 분지도시로 도로 하나로 서울 북쪽과 내통하듯 몸을 맞댄 도시의 하늘이 갑갑한 도시입니다.

 

서재형(35).

알래스카의 개썰매대회에 참가한 서재형은 고립무원의 설원에서 굶주린 늑대떼를 만나 썰매를 끄는 개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목숨을 구합니다. 귀국한 서재형은 11년이 지난 지금 ‘드림랜드’라는 유기동물보호소 겸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가 돼 있습니다. 동물을 포함한 ‘생명을 향한 진정어린 애정’으로 여론과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어 후원단체까지 생겨납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28면)

 

김윤주.

쌩촌 닭집 딸로 자라 신문기자가 된 김윤주는 진정 동물을 사랑하는 서재형이 잔인하고 비인간적 개썰매 대회 참가자이며 개들의 죽음을 담보로 목숨을 구한 인간임을 말해주는 자료를 익명의 제보자에게서 받아 그것을 폭로해 서재형을 졸지에 비열한 인간으로 매도합니다.

 

박남철

화양의료원장이며 여러 마리의 개를 기릅니다. 집에서, 식구들에게는 그가 곧 법입니다.

 

박동해

박남철의 아들. 형과 여동생에 비해 똑똑하지 못하다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애정결핍자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끼는 개를 잔인하게 린치하여 죽이려 합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돼있습니다.

 

한기준

화양 동부소방서 구조팀장으로 부인(박은희)과 딸(한유빈)이 개떼에게 물려 죽는 참사를 당합니다.

 

만호공파 노기사, 노수진, 노현진.

노기사는 한기준이 설악산 등반 중 급거 귀대할 때 얻어 탄 화물차 기사이고 수진, 현진은 쌍둥이로 수진은 화양의료원 간호사이고 현진은 학사장교 출신으로 화양시에 투입된 11공수 장교입니다. 수진은 한기준의 아내와 딸이 개떼에게 물려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들을 병원으로 옮겨 왔습니다.

 

쿠키.

박남철의 개로 아들 동해가 린치를 가해 죽이려 하는 것을 서재형이 구해와 함께 지내는 썰매개입니다.

 

스타.

정신 나간 개 수집광의 지하실에서 구출한 썰매개로, 방향을 찾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링고.

챔프 투견장에 끌려가 너의 죽음이 곧 내 삶임을 터득한 팀버 울프로, 늑대의 야성을 지니고 있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개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 전염시키는 괴질, ‘빨간 눈’이 속수무책으로 인수人獸 구분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화양시에서 신기할 만큼 ‘촘촘하게’ 얽히고설키는 이들 사이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입니다.

 

《7년의 밤》때에도 그랬지만 역시 정유정 작가는 한편의 장편소설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7년의 밤》, 그 내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필연의 얼개를 갖추지 않고도 어쩌면 이렇게 소설을 짜임새 있게,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아주 〈재미있게〉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착착 들어맞는 게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왜 그렇지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젊었을 때 야구선수였고 자리가 바로 ‘포수’였습니다. 저렇게까지 용의주도할 수는 없을 텐데, 논리적일 수는 없을 텐데 하는 선입견을 내가 매번 떨쳐 낸 것은 바로 야구경기에서 ‘포수’가 하는 역할을 주인공이 사건/스토리의 흐름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계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게 아니라 포수였던 주인공이 스토리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28》도 전작 못지않은 짜임새를 갖추고 재미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순서를 트집을 잡는 데서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속에 나타난 서재형의 성격으로 보아 다큐멘타리를 제작할 때 개썰매 대회 이야기를 감췄다는 것이 많이 생뚱맞습니다. 그것이 꼭꼭 숨겨야 할 범죄행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를 살리자고 사람이 죽는다? 이게 권장할 일입니까. 사람과 개들 중 한 쪽은 죽어야 한다면 개들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었을까요?

 

김윤주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썰매 대회의 참사를 제보 받고 그것을 숨긴 서재형을 못돼먹은 개장수로 전락시켜야 했을까요, 소설 속에 드러난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왜 그 사실을 서재형이 말하지 않았을까, 파렴치한이라서 이었을까, 드림랜드를 운영하면서 한 일로 보면 자기 방식으로 죽은 개들에게 속죄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 사고는 서재형의 비열한 인간성이 불러온 참사가 아니라 불가항력으로 다가온, 지울 수 없는 그래서 꺼내기 싫은 깊은 상처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을 것 같습니다.

 

소설을 알래스카 설원에서 열리는 개썰매대회라는 이국적이고 낯선 장면으로 시작하고 늑대의 공격을 받아 일어난 참극을 덧붙임으로써 작가는 독자를 단숨에 소설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작가는 이 참극을 주인공의 상처가 아니라 씻을 수 없는 파렴치한 죄과로 사용합니다. 〈착한 사람인지 알았는데 나쁜 과거가 있더라〉,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주 흔히 써먹는 통속적 수법입니다. 주인공의 상처가 드러날 때 독자들이 비극성을 느끼지 파렴치함이 드러나면 모멸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이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비가 걸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 알래스카 설원에서의 참사를 이렇게 쉽게, 통속적으로 사용했는지 나는 많이 아쉽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서재형에게 참사가 있었다-귀국하여 수의학을 전공해 동물병원을 차렸다-생명에 대한 진정한 애정으로 주변의 호감을 샀다-참사가 매도되는 바람에 파렴치한으로 추락하다’

 

‘빨간 눈’ 사태가 벌어지자 이런 과정이 있었으나마나가 됩니다. 참사를 폭로함으로써 서재형을 매도한 김윤주 기자와도 갈등하는 관계 설정 없이 그냥 사건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갑니다. 서재형에게는 일생일대의 문제가 작가에게는 흥미진진한 도입부를 위한 소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한기준은 화물차 기사 만호공파 노씨의 트럭을 얻어 타고, 노씨의 딸인 간호사 노수진은 한기준의 아내와 딸 참사를 목격, 그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으로 관계를 설정한 것이 우연 같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할 경우 특성상 등장인물을 느슨하게 늘리기보다는 최소한으로 해 관계를 얽히고설키게 하려는 치밀한 계산으로 읽힙니다.

 

아마 이러한 트집들은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준 다음의 뛰어난 업적에 비하면 사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한편에는 개들이 아내와 딸을 물어 죽인 ‘한기준’, 애정결핍자로 사이코패스가 돼 아버지가 아끼는 대상을 망쳐 놓으려는 ‘박동해’가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사랑하는 스타를 인간에게 잃은 야성의 늑대개 ‘링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오로지 ‘복수’입니다. 다른 점은 한기준과 박동해는 복수의 대상이 무분별합니다. 한기준만 해도 아내와 딸을 어느 개가 물어 죽였는지 제대로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링고는 복수의 대상이 선택적입니다. 스타를 해친 상대로 제한돼있습니다(물론 개들을 살처분하는 장면을 목격한 다음에는 링고의 〈분노의 절정〉내용이 달라져 개의 원수는 인간으로 설정돼 복수의 대상도 인간 일반으로 넓혀집니다). 또 하나 공통점은 모두가 ‘동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점은 한기준과 박동해는 ‘인간’이고 링고는 ‘개’라는 점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이 드러나는 게 바로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복수의 방식〉에서입니다.

 

북 리뷰의 시작에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2010-2011년의 〈구제역 사태〉,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고 했습니다(책 말미에 있는〈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시놉시스를 쓴 건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접하던 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제역 사태’를 연상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5월의 광주’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광주 전역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길과 비교할 때 화양에서 있었던 ‘빨간 눈’에 맞선 싸움의 내용이 지리멸렬한 게 아니냐 할 수 있고 틀린 지적도 아닙니다.

 

나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5월의 광주’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내비친 것으로 생각하며, 바로 그것을 통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을 읽습니다. 지금-여기의 현실세계에서 돈과 정치의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를 작가는 꿰뚫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폭력에 맞선 저항세력이 사라진 적은 없으나 결국은 〈구색 맞추기 용〉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 하는 뼈아픈 절망감에서 작가가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5월의 광주’에서 저항한 시민의 진정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판세는 결판 나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구제역 사태’에서 벌어지는, 살처분을 포함한 기가 막힌 일들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모멸감을 맛본 것 아닐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소설이 엮여지는 바탕 같습니다.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끔찍하지만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지금-여기의 인간세계에는 당위에 대한 성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로지 생존만이 남아 있다.”

 

등장인물 서재형을 소개하면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28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인용문입니다. 서재형은 이상향을 그려놓고 막상 자기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무리 짓습니다. 아마도 누구든 한 인간이라도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이미 그 세계는 〈꿈의 나라〉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겠지요. 한기준을 구하고 링고와 함께 죽는 서재형,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

 

서재형은 〈꿈의 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한 생명〉으로서 이었을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읽는 것도 재미있는 책읽기의 한 방식일 것입니다.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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