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전집 나남문학선 3
권명옥 엮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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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트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김종삼 전집》, 권명옥 엮음 ․ 해설, 나남, 2005, 162면/ 《북치는 소년》, 민음사, 1979/1995, 63면)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의 어느 날, 경기도 개풍군의 한 국민학교 교장 관사에 마을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숙청대상으로 지목돼 내일 아침 죽창으로 찔러 처형해야 할 사람이 자기들이 다닌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입니다. 일제 시절 쭉 학교장이었으니 당연했겠지요. 청년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승님이고 마을의 어른이신 교장선생님을 자기들이 찔러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청년들은 교장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그날 밤으로 남쪽으로 피난 가실 것을 재촉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열 살짜리 아들만 데리고 곧장 이남으로 향합니다. 교장 관사에는 교장 선생님 부인과 13살짜리 딸,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8월에 태어난 늦둥이 아들, 셋이 남았습니다. 북조선의 ‘빨갱이들’은 달아난 교장 선생님 식구들을 대신 죽이지 않고 내버려두었습니다. 몇 달 후 남은 세 식구는 한밤중에 배로 타고 강화도로 건너와 먼저 월남한 교장 선생님을 만납니다. 세 식구가 배를 타고 강화도로 넘어오는 일이 처음에는 실패합니다. 배를 타려 하자 한 살짜리 아이가 마구 울어대는 것입니다.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애가 우는 게 사모님은 오늘 배를 타지 마시라는 거 같습니다. 다음으로 미루시지요.’ 교장 선생님 네 세 식구는 남겨두고 배는 떠납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북조선 경계병들에게 발각돼 기총사격을 받아 배는 침몰하고 월남하려던 사람들은 전원 사망합니다. 우는 아이 덕분에 교장 선생 네 세 식구는 살았고 그 후 무사히 월남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글에 자주 불려나오는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 내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 에피소드를 꼭 연상케 하는 시입니다. 북한군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도 바다를 건너던 중에 혹시라도 울었다면 아이의 운명은 시 속의 〈영아〉의 운명과 다르지 않게 개풍군에서 강화도로 건너는 바다에 삼켜졌을 것입니다.

제자들 덕분에 숙청을 면한 교장 선생님은 내 아버님이시고, 울어댄 아이는 바로 나입니다.”(정승옥)

 

[더 읽기]

‘嬰兒의 운명’이 내 운명과 뗄 수 없게 겹쳐있어 자주 들추던 이 시를 제대로 보기는 시를 알고 한참을 지난 후였습니다. 김 시인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기도 해서였겠지만 처음에는 이 시를 ‘월남한 실향민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담고 있는 시라고 읽었는데 언제인가부터는 굳이 ‘월남한 실향민의 비극’에 국한시키지 않고 〈민간인의 비극〉으로 넓혀 읽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꾸만 걸리는 게 제목 〈민간인〉이었습니다. 제목을 한글로만 써놓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한자로 병기해 놓은 ‘民間人’이 문제였습니다. ‘민간인’의 사전적 정의는 “(관리나 군인이 아닌) 보통사람”입니다. 보통 일반인이라고도 합니다. ‘민’은 “지난날,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의 백성이 그 고을의 원에게 자기를 일컫던 말”이고 ‘민간’은 “1. 일반 시민의 사회. 2. ‘관이나 군대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間’자 때문이었겠지만 ‘민간인’이 복수의 개념으로 다가왔습니다.

 

‘민들 사이’ 또는 ‘사람들 사이’.

 

첫째 연 읽기,

“1947년 봄”의 한반도 정세, 남과 북의 〈민들 사이〉에서 권력을 잡을 집단의 정체는 거의 드러났지만 많은 ‘민간인’-민들 사이의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따지며 어느 쪽을 택할까 고심 중이었습니다.

“深夜”, 유동적인 상황이라 역사의 앞날은 한밤중이나 다름없습니다.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지금은 북한땅이지만 당시만 해도 용당포는 이남도, 이북도 아닌 경계선에 있는 바다였습니다. 중립지대를 연상케 하는.

 

첫 연은 1947년 봄날 한밤중의 용당포, 시간이 정지된 풍경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둘째 연으로 넘어가면서 이 풍경은 요동치며 비극의 바다로 돌변합니다.

 

둘째 연 읽기,

조심 조심 노를 젓는 사공의 모습은 “조심 조심”이라는 부사에도 불구하고 그 뜻과는 달리 참사를 예고합니다. 배에 탄 한 갓난아이가 울려고 합니다. 이미 남북의 왕래는 여의치 않은 상황, 이북의 경계병에게 들키면 끝장입니다.

 

“울음을 터뜨린 嬰兒를 삼킨 곳”

 

그리고 두 연짜리 짧은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시인이 처음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71년 10월 《현대시학》이고 1977년 시집 《시인학교》에 다시 실립니다. 3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물의 깊이를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水深이 아니라 愁心, 근심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愁心 때문에 水深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아득해지고 더욱 암흑의 세계가 됩니다. 아이를 산 채로 바다 속에 처박은 일을 살아있는 한 누구라고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그 참사가 잊히겠습니까.

 

이 시는 개인들의 비극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비극을 불러옵니다.

 

갓난아기를 물에 처박는 참사가 일어난 게 이북도 이남도 아닌 경계 지역인 용당포에서입니다. 권력투쟁과 전쟁은 그와 상관없는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마저 참혹함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참사-아이를 바다 속에 처박는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기의 엄마일 수도 있고 함께 배에 탄 어느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평생 마음속 참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영아. 이들은 모두 ‘관’이나 ‘군’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민간’에 속한 사람입니다. 권력투쟁을 하고 종내에는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관인’, ‘군인’인데 죽거나 참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민간인’입니다. 〈역사의 비극〉이라 일컫는 까닭입니다.

이 시는 월남하는 민간인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김종삼 시인이 말하려고 했던 민간인은 월북하는 민간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비약하면 한반도에 있는 〈민간인들이〉, 자기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동지침에 따라 민간인의 평안함에 힘써야할, 〈민간인이 아닌 사람들 - 관인, 군인들이 벌이는 권력투쟁과 전쟁 때문에 겪는 비극〉을 김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진도 앞 바다 맹골수도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보며 사람들이 이 시를 떠올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습니다. 바다 속 암흑의 세계에 산목숨 하나를 처박는, 용당포 앞의 참사가, 벌어진 지 70년이 다 돼가는 2014년, 맹골수도 시커먼 바다에서 또다시, 그것도 수 백 명 초대형으로 저질러지는 것을 보니 세상은 나아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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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네 말 창비시선 373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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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 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45면)

 

“2001년 한해를 불란서의 중동부의 고도古都 디종에서 한껏 자유롭게, 한껏 게으르게, 한껏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부르고뉴산 특급 포도주(그랑 크뤼) 길을 산책하고 디종에서 본Beaune 사이의 포도원들에서 그랑 크뤼 포도주를 시음하는 것dégustation은 더없이 근사한 덤이었습니다. 내 배낭에는 그 때 본의 시음장에서 얻은 포도주 시음잔試飮盞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디종에서 북쪽으로 초원을 삼십분 남짓, 천천히 차를 달려 찾던 작은 마을 베즈, 브장송에서 스위스 로잔느로 향하다 57번 국도를 버리고 67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이내 나오는 쿠르베의 고향 오르낭, 하나같이 마을 한 가운데로 하천이 흐르고, 동네에 들어서면 18세기의 고성古城에 온 듯했습니다. 나는 그 때 훗날 퇴직을 한 후 여건이 허락하면 아내와 함께 이곳에 와서 여생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채신없음에 얼굴 붉힌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 구제역으로 인한 가축 살도살, 미래 창조와 권위적 과거지향이 엉거주춤 한 몸이 돼있는 ‘나라’가 벌이는 조작, 한 건 일변도의 국정운영방식, 5년간 1조원이라는 돈을 내걸고 전 대학가를 돈에 대한 탐욕에 빠트린 대학교육 정책, 공영방송이 아닌 재벌기업 소유의 종편방송 뉴스를 보는 현실, 구석구석이 ‘예능’에 중독된 나라 꼴, 드디어 지난 4월 16일 그 완결편을 만들어냅니다.

〈세월호 참사〉.

승객들을 선실 안에 버려두고 속옷 차림으로 구조되는 선장의 모습에서 나는 삐까뻔쩍하다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봤습니다. 이제는 이시영 시인이 만든 〈‘나라’ 없는 나라〉에 가 살고 싶다는 말을 하더라도,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겠습니다.”

[더 읽기]

 

2009년에 나온 이시영 시인의 문단 데뷔 40주년 기념 시선집의 제목은 《긴 노래, 짧은 시》입니다.

이시영 시인의 시들은 흔히 ‘이야기 시’, ‘짧은 (서정)시’, ‘인용시’, ‘인물시’라고 하는데 이 시들이 모여 하나의 긴 노래를 만듭니다. 〈서정으로 가득한 서사의 노래〉를.

 

나는 몇 년 전 이시영 시인의 스토리가 뚜렷한, ‘이야기 시’ 세편, 〈후꾸도〉〈정님이〉〈머슴 고타관씨〉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편의 시는 “이시영 시인의 전반기 시세계는 물론 그의 평생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그리고 특정 사실들을 노래한 시가 시인의 솜씨 덕분에 보편성을 확보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들의 키 워드는 ‘슬픔’, ‘상실’, ‘그리움’입니다.”

 

오늘은 최근에 출간된 그의 열세 번째 시집(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제외), 《호야네 말》에 실린 ‘짧은 시’ 몇 편을 읽습니다.

요즘, 내 관심이 ‘사소한 것들’에 쏠려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보기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온통 사소한 일, 평범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BYC에서 일하던 여동생, 내 동생 웅식이, 철도 보수공, 코보 형철이, 서초중앙하이츠빌라 경비아저씨, 호야네, 춘천역 역장, 보문사의 두 마리 개, 금빛 새 한 마리, 고양이 세 마리, 팽나무 등등.

 

〈‘나라’ 없는 나라〉,

 

거대 문명도시화한 대한민국(우리나라뿐이겠습니까)에서는 이제 났다하면 대형사고입니다. 이런저런 참사가 꼬리를 뭅니다.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파헤치고 짓고 부숴대고, 온갖 규제, 탈규제를 해대지만,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용산 남일당 빌딩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불타 죽은 용산 참사(2009년), 천안함 침몰(2010년), 여수 기름 유출 사고(2014년), 드디어 세월호 참사(2014년)에 이릅니다. 뿐입니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은 스물다섯 번째를 맞았으며, 제발 이젠 끝나야합니다, 옥천 나들목 광고탑에 오른 유성기업 노동자 이정훈은 오늘(2014. 05. 02.)로 2백일을 맞았고, 밀양의 송전탑 건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등, ‘나라’가 나라의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나라’ 없는 나라를 찾을 만도 합니다. 그렇다고 ‘나라’ 없는 나라의 싹이 대한민국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경비 아저씨는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세상엔 이렇게 겸손한 분도 있다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43면)

 

춘천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112면)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경비 아저씨의 〈겸손함〉, 서울나들이 하는 오정희 선생을 배웅하는 춘천역장, 아직도 〈배웅〉하는 문화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은 게 언젠가 싶습니다.

서초중앙하이츠빌라와와 강아지와 경비원, 소설가 오정희와 춘천역의 측백나무와 춘천역장, 각각 세 가지 이야기의 구성요소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 서초중앙하이츠빌라와 소설가 오정희 선생이 아닌 경비원과 춘천역장에 초점을 맞춰 ‘겸손함’과 ‘배웅’이라는 테마를 자연스럽게 내민 시인의 솜씨가 돋보인 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겸손’과 ‘배웅’이 건강한 나라/사회를 있게 하는 하나의 싹이고 요소임을 깨닫게 하며 동시에 건강한 나라/사회란 어떤 나라/사회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합니다.

 

에피소드 하나.

측백나무가 있는 역은 춘천역이 아니라 남춘천역인듯 싶고 지금은 춘천역에도 남춘천역에도 측백나무는 없습니다.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아담한 풍경의 역사驛舍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에스컬레이터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고층건물을 연상시키는 콘크리트 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번 고은의 단시를 읽으며 ‘도덕적 우의’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담은 시를 이야기했습니다.

 

금빛

 

2014년 1월 중순, 강원도 깊은 산 소나무 군락지에 금빛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커다란 알을 낳고 사라졌습니다. 소나무 숲이 그 알을 받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서로 키를 높이는 바람에 일대는 한동안 지상에서 붕 떠올라 금빛으로 환하게 눈부셨습니다.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13면)

 

새들

 

새들은 허공 칠십리를 헤엄쳐온 그 발그레한 발가락들을 안으로 접은 채 사뿐히 지상에 내린다. 그리고 이내 하늘 호수가 담긴 영롱한 작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오늘의 먹을 것을 찾는다.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117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 시들을 읽으면 ‘진리가 곧 아름다움이다’라는 고전주의적 명제를 뒤집어 ‘아름다움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금빛 새가 낳은 알을 떨어트리지 않고 살려내려는 소나무 숲의 애씀이 환한 금빛으로 변해 눈부시게 비추는 풍경, “하늘 호수가 담긴 영롱한 작은 눈동자”(사소함, 작은 것에 대한 이만한 경배의 말이 또 있을까요)를 가진 새들이 발그레한 발가락들을 안으로 접은 채 지상에 내려 먹이를 찾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넘어서 〈‘나라’ 없는 나라〉가 어떤 풍경의 나라일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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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데케루 펭귄클래식 106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조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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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파리에서 혼자 지내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고,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가족 없이 사는 것이다! 가족을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혈연이 아닌 정신에 따라, 또는 육체에 따라 선택하고 아무리 드물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진정한 자신의 가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지방 또는 다른 지방, 소나무 또는 단풍나무, 바다 또는 평원,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좋아한들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피와 살이 있는 존재, 살아 있는 존재 말고 그녀가 관심 가질 대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돌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야. 강연도, 박물관도 아니야.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것은 도시 속에서 동요하고 어떤 폭풍우보다도 더 강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숲이야. 어둠 속에서 아르즐루즈의 소나무 숲이 내는 신음 소리 역시 인간적이기에 감동적이었던 거야.’

테레즈는 술을 조금 마셨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녀는 행복한 사람처럼 혼자 웃었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칠했다. 그리고는 길가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 《테레즈 데케루》, 조은경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 159/189-190면)

 

 

[북 리뷰]

 

“변호사가 문을 열었다......테레즈는 축축한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소설의 첫 대목입니다.

“[테레즈는] 길가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입니다.

 

《테레즈 데케루》의 주인공 테레즈가 남편 독살 미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는 것이 소설의 첫 대목이고 거의 연금 상태였던 아르즐루즈의 별장에서 풀려나 파리 로 가 시내를 걷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입니다.

이 소설은 지방법원의 문이 열리고 감옥에서 해방돼 폐쇄된 공간 아르즐루즈의 별장으로 들어간 테레즈가 이번에는 별장 문이 열리고 아르즐루즈에서 해방돼 파리로 가 시내를 걷게 되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과 그보다는 훨씬 많은 지면이 할애된 회상으로 꾸며집니다. 파리로의 진출이 참된 해방을 획득한 것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파리로 간 테레즈의 후일담을 그린 《의사를 방문한 테레즈》, 《호텔에서의 테레즈》, 《밤의 종말》을 보면 파리의 삶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갇힘 1(지방법원의 감옥)-해방 1이며 동시에 갇힘 2(아르즐르즈의 별장)-해방 2이며 동시에 갇힘 3(파리)〉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 두 번 열리지만 풀려나자마자 다시 갇히는 이 독특한 서사구조는 되풀이 읽을 때마다 이 작품이 새롭게 읽히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리아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왜 그는 테레즈를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

 

테레즈와 베르나르의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입니다. 테레즈 네의 권력과 베르나르 네의 토지의 결합입니다. 처녀 시절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나름의 매력을 지닌 테레즈는 젊은이들의 흠모의 대상이었고 베르나르는 성실한 지주 집안의 젊은이입니다. 언뜻 보기엔 서로가 만족할 만한 배우자감일 터인데 테레즈로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베르나르에겐 테레즈의 감수성을 건드려줄 센스가 없으며, 기성품 젊은이의 판박이일 뿐인 그는 문학소녀를 만족시킬 분위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테레즈는 《마담 보바리》의 엠마의 후예입니다. 신혼여행에서의 잠자리, 테레즈는 베르나르를 침대에서 ‘밀어내고’ 싶습니다. 저승으로 〈밀어내고〉 싶습니다.

 

“그녀의 정신이 몽롱해졌을 때 베르나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 그 순간 그녀는 커다랗고 뜨거운 몸을 느꼈고, 그를 밀쳐 냈다. 뜨거움을 피하려고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로 옮겨 갔다. 하지만 몇 분 후, 그는 다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신이 잠든 상태에서도 육체는 살아서 잠결에도 익숙한 먹잇감을 막연하게 찾아나선 것처럼. 거친 손길로 그렇지만 그를 깨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다시 그를 밀었다......아! 마지막으로 영원히 그를 밀어낼 수 있다면! 침대 밖으로, 어둠 속으로 그를 떨어뜨릴 수 있다면.”

 

이 소설의 기본 틀은 이렇습니다. 테레즈는 베르나르가 복용하는 약에다 비소의 양을 늘림으로써 그를 서서히 죽여 가다가 들통이 납니다. 지역의 유지들 집안에 사달이 났습니다. 정치적 야망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의 딸인 테레즈가 남편인 토호세력의 상속자 베르나르를 죽이려 한 것입니다. 양쪽 집안 다 씻을 수 없는 망신이라서 집안의 힘을 동원, 이 남편 독살 미수 사건은 무혐의 처리됩니다. 그리고 테레즈는 아르즐루즈의 별장에 연금됩니다.

 

지방법원이 있는 군청 소재지에서 아르즐루즈로 오는 동안의 기차 안에서, 마차 안에서, 연금된 별장 안에서 테레즈는 지난날들을 회상합니다. 테레즈와 베르나르, 베르나르의 여동생이며 처녀시절부터의 친구 안느와 그녀가 순간 홀딱 빠져버린 장 아제베도(안느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장은 시늉만 했습니다)의 풋사랑, 테레즈와 장의 미묘한 관계, 테레즈의 출산 등이 회상의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안느와 테레즈 모두가 파리에서 온 장에게 열중합니다. 테레즈는 장이 남편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 답답한 자기의 마음을 해소시켜 줄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녀들이 장에게 열중하는 데에서 드러나는 것은 장의 정체라기보다는 그녀들의 실체입니다. 불같이 타올랐다 사그라진 안느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테레즈의 경우는 문제적입니다. 그녀는 장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합니다. 파리로 입성하는 테레즈는 장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고, 멋진 파리생활을 영위하게 해 주리라 믿지만, 그것은 장이 테레즈를 유혹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번지르르하게 포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테레즈가 제대로 사람 볼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마 테레즈도 엠마와 마찬가지로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성숙하지 못한 문학소녀 아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테레즈의 실상이 그녀를 빛나는 인물로 만들고 있을 겁니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테레즈는 마농, 엠마, 칼멘의 뒤를 이어 전형적인 여성상의 하나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의 공통점으로 나름대로의 〈미성숙성〉을 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테레즈 데케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르즐루즈’의 독특한 분위기/이미지입니다. 〈아르즐루즈〉하면 나는 꼭 히스클립과 캐서린의 비극이 벌어진 거세게 비바람 치는 언덕, 에밀리 브론테의 《분더링 하이츠Wunthering Heights》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한 대목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르즐루즈는 그야말로 세상의 끝이다. 더 나아갈 곳이 없는 그런 장소 중 한 곳이다. 사람들이 ‘그곳’이라고 부르는 아르즐루즈에는 성당도 행정관청도 묘지도 없이 호밀밭 주위로 소작농가 몇 채가 흩어져 있을 뿐이고, 생클레르 중심지로부터 1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그리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도로 하나가 전부였다. 마차 바큇자국과 파인 구멍으로 가득한 이 길은 아르즐루즈를 지나면서 모래가 깔린 오솔길로 바뀐다. 그곳에서부터 대서양까지는 그저 80킬로미터에 달하는 늪, 석호, 길쭉한 소나무 숲과 겨울이 지날 때쯤 잿빛이 되어버리는 양들이 사는 허허벌판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소량의 비상을 넣어 하루하루 서서히 사람을 죽여 가는 이 끔찍한 행동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 한 모리아크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입니다. 이 뿐 아니라 《사랑의 사막》,《독사뭉치》에서도 추악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어느 독자가 묻습니다. 당신은 이 끔찍한 일들을 어디서 끌어오는 것이냐고. 작가는 대답합니다. 〈내 속에서입니다.〉그리고 모리아크는 덧붙입니다.

 

“이러한 인물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인물들은 우리들이 버리는 것, 우리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들의 찌꺼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인물들을 창조하는 소설가에게는 그들과 맞붙어 싸우는 희한한 즐거움이 있다. 이런 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저항력을 가지고 있고 맹렬하게 자기 방어를 하므로, 소설가는 그들을 비틀거나 그들의 생기를 빼앗을 우려 없이 그것들을 변형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을 수가 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들 속에 그들의 영혼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깨뜨리는 일 없이 그들을 살려낼 수가 있는 것이다.”(〈소설가와 작중인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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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장 미셸 세르의 신인류 예찬
미셸 세르 지음, 양영란 옮김, 송은주 / 갈라파고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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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루테티아(현재의 프랑스 파리지역)에서 로마 군대는 파리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교로 선출한 드니를 체포한다. 감옥에 갇힌 다음 시테 섬에서 고문을 당한 드니는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의 언덕 위에서 참수형에 처해질 것을 선고 받는다.

형 집행을 맡은 게을러터진 군대는 언덕 위까지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중간에서 희생자를 처형한다. 주교의 머리가 땅바닥을 구른다. 뭐 이런 끔찍한 일이! 목이 잘린 드니가 일어나 잘려나간 머리를 끌어 당겨 두 손으로 집어 들고 계속 비탈길을 올라간다. 기적! 겁에 질린 군대는 도망친다. 《황금전설》의 저자는 드니가 잠깐 걸음을 멈춰 샘물에서 머리를 씻은 다음 오늘날 생 드니Saint-Denis라 불리는 곳까지 길을 재촉했다고 덧붙인다. 이 기적으로 드니 주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엄지공주〉는 노트북을 연다. 드니 성인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엄지공주〉는 자기 앞쪽 두 손 안에 자기 머리를 들고 있다. 정보의 거대 저장소인 덕분에 그의 머리[스마트폰을 뜻한다]는 꽉 차있고, 그의 머리에서는 검색엔진이 앞 다퉈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작동시키고, 더 좋은 것이지만,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인체의 머리에서보다] 훨씬 빠르게 거대한 양의 재료를 다룰 만큼 그의 머리는 잘 만들어져 있다. 드니 성인이 목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를 두 손에 들고 있던 것처럼, 〈엄지공주〉는 예전엔 몸속에 있던 인식기능 부위를 자기 몸 밖으로 꺼내 들고 다닌다. 머리가 잘린 〈엄지공주〉를 상상할 수 있나? 기적인가?”

(미셸 세르,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14, 61-63면. 번역은 수정)

 

[북 리뷰]

 

책 제목에 대하여.

《엄지세대》의 불어 제목은 ‘petit poucet’의 여성형 조어造語 petite poucette입니다. poucet는 엄지손가락이란 뜻이고 샤를르 페로의 동화 제목이기도한 ‘petit poucet’는 ‘꼬마 엄지’란 말, 우리나라에서는 ‘엄지동자’로 통합니다. ‘petite poucette’, ‘poucet’는 남성형이고 엄지손가락은 암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poucette’란 단어는 ‘poucet’의 여성형이 아니라 미셸 세르가 만든 조어입니다. ‘petite poucette’는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엄지동녀童女’, 자연스럽게 ‘엄지공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엄지공주’, 짐작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두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온갖 사이버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엄지족’이라고 부르듯이 그런 ‘신인류족’의 불어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르는 ‘petit poucet’, ‘엄지동자’란 기존의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있지도 않은 여성형을 만들어 그들을 ‘petite poucette’, ‘엄지공주’라고 지칭합니다. ‘엄지족/엄지세대’가 전 세계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지금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분야에서 기왕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전환점 또는 전복의 시기입니다. 세르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성별도 이러한 전복과정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세르는 ‘엄지족’이 몰고 올 ‘전복’의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엄지동자’가 아닌 ‘엄지공주’를 책의 제목으로 한 듯합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 없이 그냥 ‘엄지족/엄지세대’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작은 글자로 쓰여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 함께 사는 방법, 제도, 존재방식, 인지방식 등등을...’

 

엄지족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 낙관적 판단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한 대목〉에 나오는 것처럼 드니 주교는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진 머리를 주워들고 한참을 걸어가다 멈춥니다. 그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생 드니 성당이라 불리게 됩니다(파리 샤를르 공항에서 내려 파리시내로 남하하다 보면 축구장이 있습니다. 1998년 월드컵 경기장이지요. 이름이 생 드니 축구장, 이곳이 생 드니 지역입니다).

세르는 ‘엄지족’의 스마트폰을 그들의 머리라고 지칭, 그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머리를 손에 들고/쥐고 다니는 모습을, 머리를 두 손으로 들고 걸은 성인 드니 주교의 모습에 비유하고 그들이 이 ‘새로운 머리’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을 성인 드니 주교가 행한 ‘기적’에 맞먹는 대단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생 드니의 기적〉과 〈엄지족의 기적〉.

 

생 드니 주교를 끌어들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르는 ‘엄지족’의 출현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든 살을 넘은 연세의 분들, ‘엄지족’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들을 마땅치 않아 하는 ‘고리타분한 꼰대들’과는 달리 세르는 ‘엄지족’의 새로운 파라다임을 흔쾌하게 받아들입니다.

 

세르는 기존의 사회질서, 제도의 프레임을 ‘피라미드형’으로,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SNS가 생활화 된 ‘엄지족’의 특징을 대중들의 들끓는 ‘웅성거림’으로 규정합니다. 피라미드 구조의 ‘기성세대’가 상명하복을 가장 큰 소통의 방식으로 하는 비해 ‘엄지족’은 특정 리더가 부재하는, 구성원 모두가 웅성대며 자기 의견을 내는 소통의 방식을 취한다고 세르는 정리합니다. ‘엄지족’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의 장이나 미래를 가늠할 비전을 제공하는 성찰의 장이 필요 없다는 게 ‘웅성거림’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만들어냈겠지요. 교육의 장, 성찰의 장이 필요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교육과 성찰이 필요 없이 지식과 비전이 ‘엄지족’의 머릿속에 이미 내장돼 있다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사태나 난관을 만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이나 비전에 목말라 합니다. 보편적인 이러한 현상이 기성세대를 교육의 장, 성찰의 장으로 끌어들인 것이겠지요. ‘엄지족’은 다릅니다. 어떤 경우나 그들에겐 해결방법이 이미 ‘새로운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들에겐 뭐든 꺼내 쓰면 됩니다.

‘집단’의 구성원이 갖는 장점, 이로움, 안전보장성이 한결 떨어지는 사회로 돌입하는 것도 ‘엄지족’ 시대의 한 특징입니다. ‘웅성거림’이 ‘집단적 폭력’으로 악화할 수 없다는 것도 ‘엄지족’ 세대의 밝은 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인 의견의 거침없는 분출, 잘못된 ‘상명’에 대한 온라인에서이지만 손쉬운 ‘불복’ 도 ‘엄지족’의 장점이겠지요. 이러저런 예들을 많이 들지만 요약하면 ‘엄지족’이 대세를 이루는 사회는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겠다는 게 세르의 주장입니다.

참으로 ‘엄지족’의 기적입니다.

고정관념에 억매이지 않고 신선하고 긍정적인 세르의 예견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세르가 이 책을 시작하는 대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 만나보게 될 새로운 부류의 학생들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남자아이건 대학교에 적을 둔 여학생이건 송아지나 소, 돼지나 그 돼지가 낳은 새끼를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새로운 부류의 인간은 가축들과 함께 살지 않으며, 심지어는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허공에 떠서” 사는 전적으로 ‘도시 거주인’입니다. 자연의 생산성, 생명복원력을 체험해본 일은 없고, 오로지 ‘들고 다니는 머리’ 속에 저장돼있는 자료를 통해서만 그 체험을 알고 있는 신인류입니다. 기왕의 인간들은 지식, 지혜, 체험을 이성을 통해서만 알거나 습득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감성을 통해 그것들을 육화/체화 하지요. 살과 몸을 통해서도 압니다. ‘엄지족’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검색어’로 자료화 하고 분류돼있어 검색엔진을 돌리면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납니다. ‘엄지족’은 그것을 육화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다시 자기의 ‘새로운 머리’에 돌려보냅니다.

 

가축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 철저하게 도시 거주인이다, 세르가 말한 신인류 ‘엄지족’의 이러한 출신성분은 그들의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의 그들의 생존력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게 나의 판단이며 우려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자료화해서 새로운 머리에 저장해놓은 것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요. ‘엄지족’이 새로운 머리에 저장해 놓은 자료로서의 ‘자연의 생산력과 생명 복원력’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요.

 

‘모든 것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다’, 내가 잊지 않으려 애쓰는 세상의 이치의 하나입니다. ‘엄지족’에 대한 미셸 세르의 찬사가 ‘꼰대들’과 다르게 신선하지만 한편으로는 ‘꼰대들’스럽게 일방적입니다. ‘엄지족’의 ‘빛’만 이야기하지 그들의 ‘그림자’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 〈교육의 장〉에 대한 이야기.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가르치는/전수하는 지식들은 ‘엄지족’의 새로운 머릿속에는 이미 저장돼 있습니다. ‘엄지족’에게 지식은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것입니다. 배우거나 이해하거나 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강의실에서 ‘엄지족’은 선생이 전해주는 지식을 경청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외장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것들이기에. 세르의 말대로 교/강의실에서는 이미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선생의 열강/명강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엄지족’ 학생들의 살과 몸에는 닿지 못하며 그들의 감성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내가 겪는 교/강의실을 보더라도 세르의 이러한 진단은 정확하게 맞습니다.

 

내가 세르에 동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세르는 이제 학교의 지식 전수 역할은 끝났다고 진단합니다. 문제는 교/강의실의 역할이 지식의 전수에 국한돼 있냐는 점입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선생은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방식들’입니다. 사람들이 활용하는 지식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응용’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활용하는 지식의 내용을 보면 습득한 그대로의 지식이 아니라 ‘변용된 지식+자기 고유의 응용력’입니다. 이 변용능력, 독창적인 응용력은 외장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는 것도, 돼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변용시키고 응용하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에게 맞게, 더 바람직하게 변용시키고 응용하는 능력입니다. 학생들이 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교/강의실이고 학교일 것입니다. 세르는 학교의 역할이 끝났다고,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하나로 부각될 것이라고 할 게 아니라 원래의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학교, 교/강의실의 모습을 바꾸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 석학이 혜안을 통해 얻은 방안을 제시했어야한다고 나는 판단합니다.

 

또 하나, ‘웅성거림’의 사회학.

‘엄지족’의 특징의 하나인 이 ‘웅성거림’이 피라미드와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문자의 시대, 기록의 시대, 안정된 국가”, 안정된 권력모델을 무너뜨린다는 게 세르의 주장입니다.

 

“천재적인 기획자 미셸 오티에와 그의 보조인 나는 센 강 우안의 에펠탑 맞은편에 전등불을 켜거나 나무를 한 그루 심기로 기획한다. 각자가 흩어져 있는 컴퓨터에 자기의 여권, 자기의 카Ka, 개인화 된 익명의 영상, 코드화 된 자기의 신분을 입력할 것이고 그러면 색색으로 분출하는 레이저 광선이,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무수히 많은 신분증들을 화면에 재현하면서, 가상세계에서 만들어진 집단성의 풍부한 영상을 보여줄 것이다. 각자는, 흩어져 있는 집단에 속해 있는 구체적이고 코드화 된 신분들을 갖춘 모든 개인들을 유일하고 다중적인 이미지에서 하나로 만들 이 가상의 진정한 팀에, 스스로가 알아서 들어갈 것이다. 에펠탑만큼 높은 이 아이콘에는 공통으로 지닌 특성들이 일종의 나무줄기에 모여들 터인데 가장 희귀한 특성들은 가지로, 예외적인 것들은 잎사귀나 싹들로 모여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합집산의 형국은 끊임없이 변하고, 누가 누구와 함께 하고 누가 누구를 따르는지도 매일매일 뒤바뀔 수 있듯, 이렇게 솟아오른 나무는, 흔들리는 불길이 타오르듯, 미친 듯이 흔들린다.”(155-156면, 번역은 수정)

 

‘엄지족’ 시대의 〈빛〉을 세르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럼 〈그림자〉는?

 

‘엄지족’은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한 사회를 살 것으로 세르는 낙관합니다만 직접 겪어보면 피라미드 또는 에펠탑 형 권력구조는 ‘엄지족’의 시대가 오더라도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피라미드 또는 에펠탑 형 권력구조는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의 특징적인 권력 구조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권력구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 전체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어느 사회든, 공식적으로 어떤 권력구조를 표방하건, 실제의 권력구조의 핵심에는 피라미드 또는 에펠탑 형 권력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엄지족’의 〈웅성거림〉이 의미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게 몇 번에 걸친 촛불시위일 텐데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합집산의 형국은 끊임없이 변하고, 누가 누구와 함께 하고 누가 누구를 따르는지도 매일매일 뒤바뀔 수 있듯, 이렇게 솟아오른 나무는, 흔들리는 불길이 타오르듯, 미친 듯이 흔들린다.”

 

구심점 없는 중구난방의 이합집산을 세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일궈낼 새로운 형태의 권력구조로 평가하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엄지족’이 대다수를 이루는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엄지족’ 전체가 아니라, 지난 역사의 어느 때와나 마찬가지로, 엄지족이든 아니든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특정인/집단이고, 그들이, ‘엄지족’이 포함된 사회 전체를 상대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엄지족’의 시대에도 피라미드 형 권력모델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새로운 자료들은 누가 만드나?

 

‘엄지족’은 무궁한 자료들을 외장 머릿속에서 꺼내 봅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쉴 새 없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업그레이드되다?’ 도대체 누가 ‘업그레이드 하는/시키는’ 것일까요.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자료를 만드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외장 머릿속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업그레이드 시키는 사람들이 ‘엄지족’일 수는 있지만 그들은, 들고 다니는 외장 머리 뿐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머리를 이용하여 읽고 상상하고 쓰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새로운 자료들을 처서 넣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작업의 과정은 두 개의 엄지만으로 해낼 수 없는 ‘비 엄지족적’ 작업입니다.

 

‘엄지세대’의 〈그림자〉를 슬쩍 건드려 보았습니다만 ‘엄지족’의 시대가 이미 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세르의 《엄지세대》는 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절감하게 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비판적으로 읽어보기를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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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 - 백무산의 길 잡도리 하나
백무산 지음 / 갈무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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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연중 그래도 쓸 만한 날은

설날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세상 떠난 자들을 위하는 일

 

그리고 낙엽처럼 흩어져 살던

살붙이들 새순 나듯

한 가지에 다시 피어나

뿌리에서 길어 올리는

먹을 것을 나누는 일

 

지난 허물

탕감하듯이

 

눈이라도 내리면

아하, 눈이라도 내리면

 

네 집 찾아

첫발 놓으리

생애 첫발을

 

직립보행 그 첫걸음으로

너에게 가리

(백무산, 《길 밖의 길》, 갈무리, 2004, 49-50면)

 

“일 년에 한번 밖에 없는 설날이 뜻 깊은 것은 일 년 동안의 다른 날들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날만은 어른들 공경할 줄도 알고 내내 쌈질만 하던 일가친척 친구들도 챙깁니다. 그리고 떳떳한 걸음걸이로 〈너〉에게 다가갑니다.

설날 아침, 백무산 시인 덕분에 나는 압니다.

〈너〉가 거창한 미래가 아님을, ‘낮은 길섶 안개 속에 핀 구절초 한 송이’ 같은 것들임을. 그리고 참된 미래는, 차라리, 이런 자상하고 세밀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너〉들에게서 솟아오름을.”

 

[더 읽기]

 

올 설에는 〈사소한 약속〉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 너무 사랑합니다’ 등......

 

〈너무〉의 사전 풀이는 ‘한계가 정도에 지나치게’, ‘분에 넘치게’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여러분, 너무 감사합니다’는 이렇게까지 감사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필요 이상으로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뜻이고 ‘여러분, 너무 사랑합니다’는 이렇게까지 여러분을 사랑할 필요가 없음에도 내가 지나치게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민망함을 넘어 상대방에 대한 욕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 〈대단히/많이/매우〉 감사합니다’,

‘여러분 〈대단히/많이/ 매우/참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기로 약속드립니다.

 

〈시를 읽는 하루〉식구들께서 설을 맞아 하는 〈사소한 약속〉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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