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장 미셸 세르의 신인류 예찬
미셸 세르 지음, 양영란 옮김, 송은주 / 갈라파고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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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루테티아(현재의 프랑스 파리지역)에서 로마 군대는 파리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교로 선출한 드니를 체포한다. 감옥에 갇힌 다음 시테 섬에서 고문을 당한 드니는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의 언덕 위에서 참수형에 처해질 것을 선고 받는다.

형 집행을 맡은 게을러터진 군대는 언덕 위까지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중간에서 희생자를 처형한다. 주교의 머리가 땅바닥을 구른다. 뭐 이런 끔찍한 일이! 목이 잘린 드니가 일어나 잘려나간 머리를 끌어 당겨 두 손으로 집어 들고 계속 비탈길을 올라간다. 기적! 겁에 질린 군대는 도망친다. 《황금전설》의 저자는 드니가 잠깐 걸음을 멈춰 샘물에서 머리를 씻은 다음 오늘날 생 드니Saint-Denis라 불리는 곳까지 길을 재촉했다고 덧붙인다. 이 기적으로 드니 주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엄지공주〉는 노트북을 연다. 드니 성인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엄지공주〉는 자기 앞쪽 두 손 안에 자기 머리를 들고 있다. 정보의 거대 저장소인 덕분에 그의 머리[스마트폰을 뜻한다]는 꽉 차있고, 그의 머리에서는 검색엔진이 앞 다퉈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작동시키고, 더 좋은 것이지만,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인체의 머리에서보다] 훨씬 빠르게 거대한 양의 재료를 다룰 만큼 그의 머리는 잘 만들어져 있다. 드니 성인이 목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를 두 손에 들고 있던 것처럼, 〈엄지공주〉는 예전엔 몸속에 있던 인식기능 부위를 자기 몸 밖으로 꺼내 들고 다닌다. 머리가 잘린 〈엄지공주〉를 상상할 수 있나? 기적인가?”

(미셸 세르,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14, 61-63면. 번역은 수정)

 

[북 리뷰]

 

책 제목에 대하여.

《엄지세대》의 불어 제목은 ‘petit poucet’의 여성형 조어造語 petite poucette입니다. poucet는 엄지손가락이란 뜻이고 샤를르 페로의 동화 제목이기도한 ‘petit poucet’는 ‘꼬마 엄지’란 말, 우리나라에서는 ‘엄지동자’로 통합니다. ‘petite poucette’, ‘poucet’는 남성형이고 엄지손가락은 암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poucette’란 단어는 ‘poucet’의 여성형이 아니라 미셸 세르가 만든 조어입니다. ‘petite poucette’는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엄지동녀童女’, 자연스럽게 ‘엄지공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엄지공주’, 짐작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두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온갖 사이버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엄지족’이라고 부르듯이 그런 ‘신인류족’의 불어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르는 ‘petit poucet’, ‘엄지동자’란 기존의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있지도 않은 여성형을 만들어 그들을 ‘petite poucette’, ‘엄지공주’라고 지칭합니다. ‘엄지족/엄지세대’가 전 세계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지금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분야에서 기왕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전환점 또는 전복의 시기입니다. 세르에 따르면 “남성 여성이라는 성별도 이러한 전복과정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세르는 ‘엄지족’이 몰고 올 ‘전복’의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엄지동자’가 아닌 ‘엄지공주’를 책의 제목으로 한 듯합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 없이 그냥 ‘엄지족/엄지세대’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작은 글자로 쓰여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 함께 사는 방법, 제도, 존재방식, 인지방식 등등을...’

 

엄지족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 낙관적 판단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한 대목〉에 나오는 것처럼 드니 주교는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진 머리를 주워들고 한참을 걸어가다 멈춥니다. 그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생 드니 성당이라 불리게 됩니다(파리 샤를르 공항에서 내려 파리시내로 남하하다 보면 축구장이 있습니다. 1998년 월드컵 경기장이지요. 이름이 생 드니 축구장, 이곳이 생 드니 지역입니다).

세르는 ‘엄지족’의 스마트폰을 그들의 머리라고 지칭, 그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머리를 손에 들고/쥐고 다니는 모습을, 머리를 두 손으로 들고 걸은 성인 드니 주교의 모습에 비유하고 그들이 이 ‘새로운 머리’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을 성인 드니 주교가 행한 ‘기적’에 맞먹는 대단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생 드니의 기적〉과 〈엄지족의 기적〉.

 

생 드니 주교를 끌어들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르는 ‘엄지족’의 출현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든 살을 넘은 연세의 분들, ‘엄지족’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들을 마땅치 않아 하는 ‘고리타분한 꼰대들’과는 달리 세르는 ‘엄지족’의 새로운 파라다임을 흔쾌하게 받아들입니다.

 

세르는 기존의 사회질서, 제도의 프레임을 ‘피라미드형’으로,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SNS가 생활화 된 ‘엄지족’의 특징을 대중들의 들끓는 ‘웅성거림’으로 규정합니다. 피라미드 구조의 ‘기성세대’가 상명하복을 가장 큰 소통의 방식으로 하는 비해 ‘엄지족’은 특정 리더가 부재하는, 구성원 모두가 웅성대며 자기 의견을 내는 소통의 방식을 취한다고 세르는 정리합니다. ‘엄지족’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의 장이나 미래를 가늠할 비전을 제공하는 성찰의 장이 필요 없다는 게 ‘웅성거림’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만들어냈겠지요. 교육의 장, 성찰의 장이 필요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교육과 성찰이 필요 없이 지식과 비전이 ‘엄지족’의 머릿속에 이미 내장돼 있다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사태나 난관을 만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이나 비전에 목말라 합니다. 보편적인 이러한 현상이 기성세대를 교육의 장, 성찰의 장으로 끌어들인 것이겠지요. ‘엄지족’은 다릅니다. 어떤 경우나 그들에겐 해결방법이 이미 ‘새로운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들에겐 뭐든 꺼내 쓰면 됩니다.

‘집단’의 구성원이 갖는 장점, 이로움, 안전보장성이 한결 떨어지는 사회로 돌입하는 것도 ‘엄지족’ 시대의 한 특징입니다. ‘웅성거림’이 ‘집단적 폭력’으로 악화할 수 없다는 것도 ‘엄지족’ 세대의 밝은 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인 의견의 거침없는 분출, 잘못된 ‘상명’에 대한 온라인에서이지만 손쉬운 ‘불복’ 도 ‘엄지족’의 장점이겠지요. 이러저런 예들을 많이 들지만 요약하면 ‘엄지족’이 대세를 이루는 사회는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겠다는 게 세르의 주장입니다.

참으로 ‘엄지족’의 기적입니다.

고정관념에 억매이지 않고 신선하고 긍정적인 세르의 예견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세르가 이 책을 시작하는 대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 만나보게 될 새로운 부류의 학생들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남자아이건 대학교에 적을 둔 여학생이건 송아지나 소, 돼지나 그 돼지가 낳은 새끼를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새로운 부류의 인간은 가축들과 함께 살지 않으며, 심지어는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허공에 떠서” 사는 전적으로 ‘도시 거주인’입니다. 자연의 생산성, 생명복원력을 체험해본 일은 없고, 오로지 ‘들고 다니는 머리’ 속에 저장돼있는 자료를 통해서만 그 체험을 알고 있는 신인류입니다. 기왕의 인간들은 지식, 지혜, 체험을 이성을 통해서만 알거나 습득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감성을 통해 그것들을 육화/체화 하지요. 살과 몸을 통해서도 압니다. ‘엄지족’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검색어’로 자료화 하고 분류돼있어 검색엔진을 돌리면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납니다. ‘엄지족’은 그것을 육화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다시 자기의 ‘새로운 머리’에 돌려보냅니다.

 

가축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 철저하게 도시 거주인이다, 세르가 말한 신인류 ‘엄지족’의 이러한 출신성분은 그들의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의 그들의 생존력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게 나의 판단이며 우려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자료화해서 새로운 머리에 저장해놓은 것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요. ‘엄지족’이 새로운 머리에 저장해 놓은 자료로서의 ‘자연의 생산력과 생명 복원력’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요.

 

‘모든 것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다’, 내가 잊지 않으려 애쓰는 세상의 이치의 하나입니다. ‘엄지족’에 대한 미셸 세르의 찬사가 ‘꼰대들’과 다르게 신선하지만 한편으로는 ‘꼰대들’스럽게 일방적입니다. ‘엄지족’의 ‘빛’만 이야기하지 그들의 ‘그림자’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 〈교육의 장〉에 대한 이야기.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가르치는/전수하는 지식들은 ‘엄지족’의 새로운 머릿속에는 이미 저장돼 있습니다. ‘엄지족’에게 지식은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것입니다. 배우거나 이해하거나 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강의실에서 ‘엄지족’은 선생이 전해주는 지식을 경청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외장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것들이기에. 세르의 말대로 교/강의실에서는 이미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선생의 열강/명강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엄지족’ 학생들의 살과 몸에는 닿지 못하며 그들의 감성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내가 겪는 교/강의실을 보더라도 세르의 이러한 진단은 정확하게 맞습니다.

 

내가 세르에 동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세르는 이제 학교의 지식 전수 역할은 끝났다고 진단합니다. 문제는 교/강의실의 역할이 지식의 전수에 국한돼 있냐는 점입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선생은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방식들’입니다. 사람들이 활용하는 지식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응용’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활용하는 지식의 내용을 보면 습득한 그대로의 지식이 아니라 ‘변용된 지식+자기 고유의 응용력’입니다. 이 변용능력, 독창적인 응용력은 외장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는 것도, 돼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변용시키고 응용하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에게 맞게, 더 바람직하게 변용시키고 응용하는 능력입니다. 학생들이 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교/강의실이고 학교일 것입니다. 세르는 학교의 역할이 끝났다고,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하나로 부각될 것이라고 할 게 아니라 원래의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학교, 교/강의실의 모습을 바꾸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 석학이 혜안을 통해 얻은 방안을 제시했어야한다고 나는 판단합니다.

 

또 하나, ‘웅성거림’의 사회학.

‘엄지족’의 특징의 하나인 이 ‘웅성거림’이 피라미드와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문자의 시대, 기록의 시대, 안정된 국가”, 안정된 권력모델을 무너뜨린다는 게 세르의 주장입니다.

 

“천재적인 기획자 미셸 오티에와 그의 보조인 나는 센 강 우안의 에펠탑 맞은편에 전등불을 켜거나 나무를 한 그루 심기로 기획한다. 각자가 흩어져 있는 컴퓨터에 자기의 여권, 자기의 카Ka, 개인화 된 익명의 영상, 코드화 된 자기의 신분을 입력할 것이고 그러면 색색으로 분출하는 레이저 광선이,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무수히 많은 신분증들을 화면에 재현하면서, 가상세계에서 만들어진 집단성의 풍부한 영상을 보여줄 것이다. 각자는, 흩어져 있는 집단에 속해 있는 구체적이고 코드화 된 신분들을 갖춘 모든 개인들을 유일하고 다중적인 이미지에서 하나로 만들 이 가상의 진정한 팀에, 스스로가 알아서 들어갈 것이다. 에펠탑만큼 높은 이 아이콘에는 공통으로 지닌 특성들이 일종의 나무줄기에 모여들 터인데 가장 희귀한 특성들은 가지로, 예외적인 것들은 잎사귀나 싹들로 모여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합집산의 형국은 끊임없이 변하고, 누가 누구와 함께 하고 누가 누구를 따르는지도 매일매일 뒤바뀔 수 있듯, 이렇게 솟아오른 나무는, 흔들리는 불길이 타오르듯, 미친 듯이 흔들린다.”(155-156면, 번역은 수정)

 

‘엄지족’ 시대의 〈빛〉을 세르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럼 〈그림자〉는?

 

‘엄지족’은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한 사회를 살 것으로 세르는 낙관합니다만 직접 겪어보면 피라미드 또는 에펠탑 형 권력구조는 ‘엄지족’의 시대가 오더라도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피라미드 또는 에펠탑 형 권력구조는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의 특징적인 권력 구조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권력구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 전체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어느 사회든, 공식적으로 어떤 권력구조를 표방하건, 실제의 권력구조의 핵심에는 피라미드 또는 에펠탑 형 권력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엄지족’의 〈웅성거림〉이 의미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게 몇 번에 걸친 촛불시위일 텐데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합집산의 형국은 끊임없이 변하고, 누가 누구와 함께 하고 누가 누구를 따르는지도 매일매일 뒤바뀔 수 있듯, 이렇게 솟아오른 나무는, 흔들리는 불길이 타오르듯, 미친 듯이 흔들린다.”

 

구심점 없는 중구난방의 이합집산을 세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일궈낼 새로운 형태의 권력구조로 평가하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엄지족’이 대다수를 이루는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엄지족’ 전체가 아니라, 지난 역사의 어느 때와나 마찬가지로, 엄지족이든 아니든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특정인/집단이고, 그들이, ‘엄지족’이 포함된 사회 전체를 상대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엄지족’의 시대에도 피라미드 형 권력모델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새로운 자료들은 누가 만드나?

 

‘엄지족’은 무궁한 자료들을 외장 머릿속에서 꺼내 봅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쉴 새 없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업그레이드되다?’ 도대체 누가 ‘업그레이드 하는/시키는’ 것일까요.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자료를 만드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외장 머릿속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업그레이드 시키는 사람들이 ‘엄지족’일 수는 있지만 그들은, 들고 다니는 외장 머리 뿐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머리를 이용하여 읽고 상상하고 쓰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새로운 자료들을 처서 넣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작업의 과정은 두 개의 엄지만으로 해낼 수 없는 ‘비 엄지족적’ 작업입니다.

 

‘엄지세대’의 〈그림자〉를 슬쩍 건드려 보았습니다만 ‘엄지족’의 시대가 이미 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세르의 《엄지세대》는 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절감하게 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비판적으로 읽어보기를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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