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네 말 창비시선 373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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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 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45면)

 

“2001년 한해를 불란서의 중동부의 고도古都 디종에서 한껏 자유롭게, 한껏 게으르게, 한껏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부르고뉴산 특급 포도주(그랑 크뤼) 길을 산책하고 디종에서 본Beaune 사이의 포도원들에서 그랑 크뤼 포도주를 시음하는 것dégustation은 더없이 근사한 덤이었습니다. 내 배낭에는 그 때 본의 시음장에서 얻은 포도주 시음잔試飮盞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디종에서 북쪽으로 초원을 삼십분 남짓, 천천히 차를 달려 찾던 작은 마을 베즈, 브장송에서 스위스 로잔느로 향하다 57번 국도를 버리고 67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이내 나오는 쿠르베의 고향 오르낭, 하나같이 마을 한 가운데로 하천이 흐르고, 동네에 들어서면 18세기의 고성古城에 온 듯했습니다. 나는 그 때 훗날 퇴직을 한 후 여건이 허락하면 아내와 함께 이곳에 와서 여생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채신없음에 얼굴 붉힌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 구제역으로 인한 가축 살도살, 미래 창조와 권위적 과거지향이 엉거주춤 한 몸이 돼있는 ‘나라’가 벌이는 조작, 한 건 일변도의 국정운영방식, 5년간 1조원이라는 돈을 내걸고 전 대학가를 돈에 대한 탐욕에 빠트린 대학교육 정책, 공영방송이 아닌 재벌기업 소유의 종편방송 뉴스를 보는 현실, 구석구석이 ‘예능’에 중독된 나라 꼴, 드디어 지난 4월 16일 그 완결편을 만들어냅니다.

〈세월호 참사〉.

승객들을 선실 안에 버려두고 속옷 차림으로 구조되는 선장의 모습에서 나는 삐까뻔쩍하다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봤습니다. 이제는 이시영 시인이 만든 〈‘나라’ 없는 나라〉에 가 살고 싶다는 말을 하더라도,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겠습니다.”

[더 읽기]

 

2009년에 나온 이시영 시인의 문단 데뷔 40주년 기념 시선집의 제목은 《긴 노래, 짧은 시》입니다.

이시영 시인의 시들은 흔히 ‘이야기 시’, ‘짧은 (서정)시’, ‘인용시’, ‘인물시’라고 하는데 이 시들이 모여 하나의 긴 노래를 만듭니다. 〈서정으로 가득한 서사의 노래〉를.

 

나는 몇 년 전 이시영 시인의 스토리가 뚜렷한, ‘이야기 시’ 세편, 〈후꾸도〉〈정님이〉〈머슴 고타관씨〉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편의 시는 “이시영 시인의 전반기 시세계는 물론 그의 평생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그리고 특정 사실들을 노래한 시가 시인의 솜씨 덕분에 보편성을 확보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들의 키 워드는 ‘슬픔’, ‘상실’, ‘그리움’입니다.”

 

오늘은 최근에 출간된 그의 열세 번째 시집(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제외), 《호야네 말》에 실린 ‘짧은 시’ 몇 편을 읽습니다.

요즘, 내 관심이 ‘사소한 것들’에 쏠려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보기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온통 사소한 일, 평범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BYC에서 일하던 여동생, 내 동생 웅식이, 철도 보수공, 코보 형철이, 서초중앙하이츠빌라 경비아저씨, 호야네, 춘천역 역장, 보문사의 두 마리 개, 금빛 새 한 마리, 고양이 세 마리, 팽나무 등등.

 

〈‘나라’ 없는 나라〉,

 

거대 문명도시화한 대한민국(우리나라뿐이겠습니까)에서는 이제 났다하면 대형사고입니다. 이런저런 참사가 꼬리를 뭅니다.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파헤치고 짓고 부숴대고, 온갖 규제, 탈규제를 해대지만,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용산 남일당 빌딩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불타 죽은 용산 참사(2009년), 천안함 침몰(2010년), 여수 기름 유출 사고(2014년), 드디어 세월호 참사(2014년)에 이릅니다. 뿐입니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은 스물다섯 번째를 맞았으며, 제발 이젠 끝나야합니다, 옥천 나들목 광고탑에 오른 유성기업 노동자 이정훈은 오늘(2014. 05. 02.)로 2백일을 맞았고, 밀양의 송전탑 건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등, ‘나라’가 나라의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나라’ 없는 나라를 찾을 만도 합니다. 그렇다고 ‘나라’ 없는 나라의 싹이 대한민국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경비 아저씨는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세상엔 이렇게 겸손한 분도 있다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43면)

 

춘천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112면)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경비 아저씨의 〈겸손함〉, 서울나들이 하는 오정희 선생을 배웅하는 춘천역장, 아직도 〈배웅〉하는 문화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은 게 언젠가 싶습니다.

서초중앙하이츠빌라와와 강아지와 경비원, 소설가 오정희와 춘천역의 측백나무와 춘천역장, 각각 세 가지 이야기의 구성요소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 서초중앙하이츠빌라와 소설가 오정희 선생이 아닌 경비원과 춘천역장에 초점을 맞춰 ‘겸손함’과 ‘배웅’이라는 테마를 자연스럽게 내민 시인의 솜씨가 돋보인 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겸손’과 ‘배웅’이 건강한 나라/사회를 있게 하는 하나의 싹이고 요소임을 깨닫게 하며 동시에 건강한 나라/사회란 어떤 나라/사회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합니다.

 

에피소드 하나.

측백나무가 있는 역은 춘천역이 아니라 남춘천역인듯 싶고 지금은 춘천역에도 남춘천역에도 측백나무는 없습니다.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아담한 풍경의 역사驛舍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에스컬레이터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고층건물을 연상시키는 콘크리트 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번 고은의 단시를 읽으며 ‘도덕적 우의’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담은 시를 이야기했습니다.

 

금빛

 

2014년 1월 중순, 강원도 깊은 산 소나무 군락지에 금빛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커다란 알을 낳고 사라졌습니다. 소나무 숲이 그 알을 받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서로 키를 높이는 바람에 일대는 한동안 지상에서 붕 떠올라 금빛으로 환하게 눈부셨습니다.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13면)

 

새들

 

새들은 허공 칠십리를 헤엄쳐온 그 발그레한 발가락들을 안으로 접은 채 사뿐히 지상에 내린다. 그리고 이내 하늘 호수가 담긴 영롱한 작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오늘의 먹을 것을 찾는다.

(이시영, 《호야네 말》, 창비, 2014, 117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 시들을 읽으면 ‘진리가 곧 아름다움이다’라는 고전주의적 명제를 뒤집어 ‘아름다움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금빛 새가 낳은 알을 떨어트리지 않고 살려내려는 소나무 숲의 애씀이 환한 금빛으로 변해 눈부시게 비추는 풍경, “하늘 호수가 담긴 영롱한 작은 눈동자”(사소함, 작은 것에 대한 이만한 경배의 말이 또 있을까요)를 가진 새들이 발그레한 발가락들을 안으로 접은 채 지상에 내려 먹이를 찾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넘어서 〈‘나라’ 없는 나라〉가 어떤 풍경의 나라일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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