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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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서도 어제와 오늘, 뉴스는 미국 관세 문제로 시끄럽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트럼프의 상호 관세를 위법으로 판결했는데 이에 트럼프는 즉시 불복하여 관세를 또 올렸다고 한다. 어디 관세뿐이겠는가? 그린란드 강탈에 대한 야욕, 베네수엘라 침공 및 마두로 대통령 납치, 미국 이민 세관 단속국 ICE 총격 사건 등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기행은 계속해서 그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다. 분노에 더해 이제는 피로감이 함께 몰려온다. 그러나 피로와 체념은 잠시 제쳐두고 '왜?'라는 물음표를 《야만 시대의 귀환》에 걸어두고 천천히 읽어 본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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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지금 트럼프 지지자나 그 측근을 위시한 상당수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세계 패권이란 그 효능, 즉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에 비해 낭비성이 지나쳐 경제성이 떨어집니다. p.291, 제5장 | 과거가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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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미국의 이런 기행적인 퇴보는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놀랍게도, 놀랍지 않다고 말한다. 세계 패권 역사의 흥망성쇠를 굵게 훑어보면 패권의 중심이었던, 여전히 몰락 중인 미국은 그 전철을 착실하게 밟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화를 거치며 제조업 강성, 세계 대전을 거치며 종전 세계 질서 확립 주도,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한 달러 기축통화 체제, 냉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로 사상 장악 등으로 미국은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 체제)'를 이룩하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아는 비교적 최근까지, 그러니까 트럼프 전의 미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금융 자본주의에 치중하여 제조업은 쇠퇴하고 실물 경제의 통제력을 상실했다. 제조업이 공동화되며 그 자리에 저임금 서비스직이 대체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되었다. 이는 또다시 소비력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가중시키며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부의 양극화, 경제적 소외를 느낀 백인 노동자의 분노와 불안이 트럼프 정권을 태동시켰으며 알다시피 상호 관세와 같은 극단적 보호무역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같은 신흥 강대국이 첨단 기술의 격차를 빠르게 좁혀오고 있으니 미국은 스러져가는 패권국의 체통을 버리고 힘으로 통제하려는, 마치 과거 제국주의와 같은, 야만의 시대로 뛰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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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새로운 제국주의는 이제 그 어떤 이념도 아닌 그저 이윤 차원에서 운영되는, 근거리의 국가·지역을 우선적 대상으로 하는, 과거의 간접 지배나 동맹보다 직접적인 합병을 더 선호합니다. 과거에 세계 경찰을 자임해왔던 나라는 이제 체면을 차릴 것도 없이 그저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여러 조폭 조직의 하나로 그 위상을 재정리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p.148, 제3장 | 트럼프는 왜 이럴까, 보편 시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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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자살'이라는 강렬한 표현이 등장하는 3장에서 '트럼프는 왜 이럴까'라는 제목 아래 '트럼프'라는 현상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트럼프라는 문제적 인물의 등장과 괴랄한 기행에 세계의 대중은 갑작스러운 당혹감을 느낄 테지만 사실 미국은 오바마와 바이든의 시기부터 꾸준히 비슷한 맥락의 정책적 스탠스를 유지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트럼프가 지닌 극단성과 서서히 몰락해 온 신자유주의의 한계와 위기가 한데 뒤섞이며 폭주하고 있는 것이다. 또 옐친이나 고르바초프를 트럼프와 비교하여 이데올로기 상실,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 가치의 훼손 등을 예시로 들며 '제국의 말로'를 짚어내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4장에서 이스라엘을 다루며 짚는 미국의 가치 위선, 군사적 야만성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을 지경.




 이익에 따라 열강마다 포지션을 계속 바꾸어 나갑니다. 그 어느 열강에 대해서도 착각하지 말고 일관되게 지구(기후)의 관점, 그리고 모든 나라들의 모든 약자들의 관점, 탈 자본주의적 관점을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109, 2장 | 미국은 왜 그럴까, 적대적 공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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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다극 체제로의 과도기를 지나는 이 시점, 한국은 어떤 기조와 대외 정책을 다져야 할까. 저자 박노자는 기존의 미국과의 관계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언급한다. 더 이상 동맹과 우호의 관계가 아닌 지극히 이윤의 득실을 따지는 비즈니스 관계가 된 이상, 까다로운 고객 혹은 파트너가 될 것을 주문한다. 결국 미국과 혈맹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중립 노선을 취해야 하며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다자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하여 외교 무대에서 자국의 존재감을 확장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또 러·우 전쟁이나 이·팔 전쟁처럼 대리전에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반전反戰 평화주의를 견지할 것을 제언한다.




 (…) 관과 자본이 관방주의 시대로 퇴행하고 싶어도 거리의 민은 거기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에 나선 것이죠. 그런 가두 행동들이야말로 암흑의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p.348, 나가는 말, [관리자 국가 시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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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 거시적인 맥락에서 살펴본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포스트 아메리카'를 예견해 보는 시간. '위기는 기회'라지만 당장에 맞닥뜨린 지의 현실은 조금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의 저항, 민의 행렬'을 말하는 희망은 근간에 한국 사회가 겪어내고 극복 중인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 모두 세계 시민으로서의 시각을 견지하며 그런 맥락에서 미약하게나마 일련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 고견을 청취해 보려는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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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 - 기후 붕괴 현장에서 마주친 인간과 비인간동물들
남종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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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록달록하고 발랄한 일러스트, '청소년을 위해 쓴 첫 기후 픽션'을 표방하고 있지만 문외한 어른이 읽기에도 매우 적절한 기후 재난 'SF 논픽션'.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의 전체적인 컨셉은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소속의 홈스와 왓슨이 제보를 받고 사실 관계를 파악하러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된 행성인 지구를 돌아다닌다. 사건의 실체는 인간이 아닌 북극곰의 입으로, 동양하루살이의 입으로, 비둘기의 입으로, 닭의 입으로 증언된다.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기후 문제가 야기하고 있는, 야기할 미래를 진단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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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킨 해방 전선, 북극곰 다이빙 워크숍, 기후와 프로야구 홈런 타율의 상관관계, 가라앉는 투발루 섬에 대한 진실, 그레타 툰베리의 배신, 인류 멸종 박람회 등 여러 챕터의 제목을 간추린 키워드만 보아도 '엥? 뭔데, 뭔데?'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제도권 교육에서 기껏 배운 것이라고는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면 빙하가 녹으며 이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하여 가라앉는 섬나라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몹시 단편적이고 매우 추상적인 내용이어서 그 당시에 멈춰버린 낡은 위기 인식 수준을 현실의 단계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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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왠지 기후와 환경에 좋으면 동물에게도 좋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요. 기후 변화 대응과 동물 복지의 역설이군요."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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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대서양 자오선 역전 순환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흥미로웠는데 항상 '온난화'와 '북극'이 마치 세트처럼 거론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온난화로 녹아내린 북극의 빙하가 바닷물의 염분 농도를 낮추어 밀도 차에 의한 '펌프' 역할이 붕괴되며 이로 인해 지구 기온의 평형 유지가 깨지고, 이것이 다시 여러 기후 문제를 야기하고야 마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분별없이 떠들어대는 기후 문제에 대해 '대체 왜?'라는 생각이 한 번쯤 들었다면 그 질문에 대한 진실한 해답을 비로소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 다루는 '기후 위기의 정치학, 재난에 이득을 취하는 세력은 누구인가?'에서는 보다 확장된 시각으로 기후 위기를 다룬다.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들이 기후 위기에 대한 공포를 볼모로 자사의 상품을 어떻게 세일링 하는지, 사실과 진실 사이에 교묘한 틈을 비집고 틀어앉아 '그린 워싱'을 표방하며 소비자를 어떻게 기만하는지…. 가장 상징적인 예시는 '팔레필리 협정'을 통해 2050년에 가라앉을 것이라는 투발루 섬의 기후 난민을 수용한다는 호주를 들 수 있겠다. 제1세계 국가들이 '기후 위기'를 이용해 어떻게 타국의 주권에 교묘하게 간섭해 패권 경쟁에서 이권을 찬탈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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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세계 국민들의 편견이야. 기후 변화는 스펙터클 영화가 아니야. 조금씩 스며들어 절망을 키우지. 기후 변화가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사회경제적 삶을 느리게 투과하면서 고통을 배가하고 절망을 일상화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재난에 잠기게 해."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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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투발루 섬의 기후 난민들의 타국에서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고 제1세계국의 이런 보기 그럴듯한 시혜적인 정책은 그들이 외면하고 있는 탄소 저감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태는 기후 위기가 도래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또 다른 형태의 신제국주의적 면모를 드러낸다. 참, 인간이란 절망 속에서도 부지런히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기후 위기에 대한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사실만을 취사선택하여 오로지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토지 개발이나 정부 지원금을 노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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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거라고! 그리고 줍깅이나 텀블러 쓰기보다 더 중요한 건 자본주의 체제와 정부와 기업 정책을 바꾸는 거야. 개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건 자신의 책임을 가리기 위한 신자유주의의 술수라고…." p.167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느꼈던 것은 '비인간의 권리·윤리'에 관한 인문학적인 접근이었다. 에필로그에서 다루는 두 가지 다른 미래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일어난 현상, 즉 기후 위기에 대한 수습과 대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 수준의 변화라는 사실. 종을 떠난 기후 윤리, 기후 정의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제고가 반드시 함께 가야만 올바른 방향으로 기후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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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전면적인 화해나 복구가 아니다. 나는 부분적인 회복 그리고 함께 잘 지내기를 위한 평범한 가능성들에 온 마음을 쓴다." (도너 해러웨이)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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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을 위한 머리말'을 읽어보면 저자가 '기후 위기'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사'를 부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토록 마음 쓰는 일에 또 빚을 지고 만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하여 다소 건조하고 딱딱할 수 있는 '기후 위기'라는 주제가 말랑하고 재밌게, 무엇보다 또 쉽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조각난 사실에 가려진 실체와 진실을 정확히 톺아보고 정치적인 셈법이 더해지는 과정에 더하여 기후 윤리와 정의의 측면까지, 많은 내용을 아우르면서도 알차다. 왜곡된 빗장을 열어젖힌 느낌이랄까. 작은 인간, 큰 인간, 비인간이 연대하는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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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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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나는 책을 결핍된 무엇을 채우기 위해, 혹은 메마른 무엇을 해갈하기 위해 읽었다. 팍팍한 감성에는 시나 에세이를, 순백한 무지에는 교양서를, 강렬한 도파민에는 취향의 장르 소설을 읽어댔다. 책을 덮은 후에는 여지없이 알량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그것으로 세계는 종결이었다. 그러나 《앎과 삶 사이에서》를 덮고 나니 세계는 오히려 활짝 열린 채로 남아있다. 집중에 흔적이 남은 미간을 다소 구긴 채로 잠시 멍을 때린다. 인덱스를 남긴 구절을 찾아 옮기고 감상을 몇 줄 적어보려는데 좀처럼 커서가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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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과 '사는 것', 그 간극에서 써 내려간 갈등과 고민, 비판과 성찰의 기록이다. 주제는 사회적으로 거대한 담론부터 저자의 개인적인 일화까지 다양하다. 전쟁, 참사, 재난, 장애, 가난, 부조리, 차별, 불평등…. '앎'과 '삶'이 유리된 채 안락한 '삶' 속에서 관망하는 '앎'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저자는 이를 새로 지은 주택에 틀어 앉아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감각하기도 한다. 활자는 어려운 것 없이 술술 읽힌다지만 내용은 꽤나 빈번하게 마음 어딘가에 턱턱 걸려버리곤 해서 곧잘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한 세상이 집 밖에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렇게 모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불편한 말,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데 집이 너무 편안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밖에서는 억수같이 계속 비가 내렸다. p.241-242, [중산층의 집 짓기, 로망과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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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저자는 결코 당위성 따위 같은 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을 가진 유가 계급 중산층, 고등 교육을 받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자신과 세계를 맺음으로써 앎과 삶에서 오는 괴리를 자기고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앎 속에 자신과 삶 속에 자신, 그 괴리와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사고한다. 수치심과 죄책감, 분노와 무기력, 냉소와 체념, 비판과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지만 희망을 바라보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한낱의 소시민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고 저자도 이를 통감하지만 냉소는, 체념은 너무 가볍고 쉬운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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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69, [죽어가는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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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파주에서 이웃들과 책방을 운영하며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여러 활동을 한다. 그런 여러 활동의 일환으로 연이 닿아 미얀마 국경 지역에 난민촌을 방문하며 그들과 '민주주의 시민'으로써 연대하는 장면을 보고 문득, 대학 시절에 어느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과에서 개최한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아웅산 수 치'에 관해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던 미얀마 교환 학생, '너희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닮아있다!'라고 말을 맺으며 환하게 웃던 모습. 왜 더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앎이 잊고 지냈던 삶 속에 있던 것이다.





 불법 계엄과 탄핵, 그 이후에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어쩌면 간과하고 싶었던 사실들을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으로 조망할 때는 나도 그 시선의 사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더 큰 '대의'라는 명목하에 묵살되는 가치들은 과연 묵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대의는 정녕 다수를 대표하는가. 거대 양당 정치를 배경으로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인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단으로서의 정치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지 저자의 확장된 시각을 빌려 바라볼 수 있다. 자, 이제 앎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소시민의 힘은 무용하다고 느껴지는가? 나는 지난 12·3 계엄 사태 이래로 발광하던 수많은 응원봉을 기억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보다 나의 윤리적 자족감이 앞설 수는 없지 않을까? p.318, [밥벌이의 준엄함, 삶의 엄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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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더 일반적인 삶 속에서 앎을 고민했던 사례는 '탈팡'이었다. 저자 또한 새벽 배송을 이용하지 않다가 불가피하게 이용하며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이용자 입장에서 느끼는 하찮은 '윤리적 자족감'을 걷어내면 보다 복잡한 노동자의 사정이 드러난다. 야간 수당, 비대면 환경, 불가피한 야간 노동 사정 등의 이런 '밥벌이의 준엄함'을 묵과할 수 있을까? 결국 이것 또한 구조적인 문제고 해결 방법은 정치 영역에서 입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무용의 도돌이표가 다시 찍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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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트와 새벽 배송, 배달 앱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거리낌이 느껴진다면 거기에 윤리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 없이는 세상을 바꾼다는 꿈조차 꿀 수 없다. p.319, [밥벌이의 준엄함, 삶의 엄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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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긴장과 충돌, 갈등과 허탈이 앎과 삶을 연결하는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위태롭게 밟아내는 스텝이 춤인지 몸부림인지 기묘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착한 소비자'가 '선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면서도 계속해서 앎과 삶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을 주목해야 한다. 앎과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줄이 되어 그 두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많은 개인들의 그러한 긴장과 고민, 소소한 실천과 선의를 외면한다면 그 줄은 차츰 삭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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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설적이지만 위선이야말로 선을 닮고 싶은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을 증거한다. 위선이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인 이유다. 위선은 역겹지만, 위선마저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 냉소하기보다는 위선의 모순 속으로 걸어가야 할 까닭이다. 이 길을 걸어야 한다. p.178, [위선,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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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많은 문장들에 인덱스를 남겼다. 기대하는 명쾌한 해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의 문장들이 가득하다. 열려버린 세계 속에서 개인적으로 위로를 얻은 문장을 공유하고 싶은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꼽고 싶다. 그 문장은 바로…,



어중간하게 살아왔다.

사실은 당신도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면 좋겠다.

p.5, 들어가며 [어중간하게 살아온 당신과 나에게]







 책을 들어가며 여는 서문의 첫 문장이다. 저자는 어중간하게 살아온 삶을 고백하며 독자도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기를 바라는 문장. 다 읽고 돌아와 다시 서문을 읽는다. 혼란하고 불분명해진 마음에 나와 당신의 '어중간한 정체성'이 서로 다름없음으로 위로가 되는 문장. 그럼에도 뒤를 잇는 문장들의 꼬리에서 저자는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보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소시민의 삶과 앎이 얽히고설켜 끝내 품고야 마는 희망이자 연대에 대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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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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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는 모르는데 '엮은이'와 '옮긴이'는 알고 있습니다. '바바라 몰리나르'는 모르지만 '마그리트 뒤라스'와 '소설가 백수린'은 안다는 말이죠. 잇따를 감상을 예견하듯 희한한 첫인상이었습니다. 바바라 몰리나르는 뒤라스의 친구였고, 글을 썼습니다만 쓰는 족족 찢어버립니다. 무려 8년 동안 그랬다고 하는데요, 보다 못한 그녀의 남편과 뒤라스가 그녀를 설득해 원고를 모아 출판한 것이 이 책,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라고 합니다. 원제는 '와줘, 오라, 와'라는 의미의 《VIENS》이고, 영문판은 '극심한 공포, 공황'이라는 의미의 《Panics》입니다. 각 제목 간에 의미 차이가 굉장히 크지 않나요? 내용이 더욱 궁금해지죠.





​ 바바라 몰리나르가 평생 유일하게 남긴 이 소설집은 사실 굉장히 난해합니다. 소설들은 대체로 다짜고짜 불가해한 어떤 상황 속에 뚝 떨어지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도시를 방황하거나 혹은 불명한 초대를 받고 기이한 고행을 겪기도 하죠.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지하로 깊이 침잠하거나 도달하지 못할 지상을 계속 오르기도 합니다. 얼굴이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잘린 손을 들고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초현실적이고 아방가르드하지요? 저는 초반에 읽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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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늘어뜨린 채 여자는 시간에 자신을 맡겼다. 그녀가 잘 아는, 그러나 죽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쳐야만 하는 이 죽은 시간 속에. (…) 하지만 또 생각했다. 내일은 다시 시작해야만 하고,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매일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p.22,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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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괴한 요소들의 비일상적인 묘사가 꽤나 불편합니다. 주로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가 흐르는 가운데 폭력적이거나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거든요. 그리고 불현듯 끝나버리기 일쑤이고요. 작가는 마침표로 끝을 냈는데 독자는 물음표로 시작합니다. 그런 물음표를 내내 물고 가다, 문득 뒤라스의 서문이 다시 떠올랐어요. 바바라 몰리나르는 자신의 글을 모두 찢어버렸다는 것. 그러니까 책으로 묶인 이 글들도 뒤라스가 아니었다면 찢어질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러니까 이 글들은 '읽혀지기' 위한 글이 아니라 '찢어지기' 위한 글인 겁니다. 애초에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글이고 읽혀지고, 이해하고, 해석되기 위한 글이 아니니 너무나 당연하게 읽기가 난해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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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써 내려간 글들은 불안하고 우울하고 강박적이고 때로는 망상적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초월하는 전개와 묘사는 한 편의 환상적인 악몽 같기도 해요. 광적이면서도 동시에 고독하고요. 뒤라스는 서문에서 이런 말도 했는데요, '이 책에 실린 글을 지어낸 것도 꿈을 꾼 것도 아니다. 이 글은 살아낸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살아낸 것에는 글쓰기도 포함되어 있다.(p.11)'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바바라 몰리나르가 삶에서 마주한 불가해한 총체의 기록이었고 '쓰기'라는 행위는 그런 것으로부터 살아내고자 했던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바바라 몰리나르는 왜 그런 자신의 원고를 박박 찢어버렸을까요?







 언젠가 심리학 책에서 본 내용인데요, 부정적인 감정을 종이 옮겨 적고 구겨서 버리거나 찢어버리면 심리적으로 완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외현화'라고 한다네요. 바바라 몰리나르가 자신의 원고를 찢어버린 것도 그런 심리적 기전에 따른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불안·광기·폭력·우울·고독·권태와 같은 삶의 기록을 찢어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일종의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죠.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찢는 것도 세심하고 특정한 방식(p.9)으로 이루어진다는 뒤라스의 전언도 이를 뒷받침할 것 같고요. '쓰고 찢는 행위'는 바바라 몰리나르에게 일종의 의식(ritual)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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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기되지 못하고 남은 불가해한 총체의 기록, 해소되지 않고 남겨진 환상적인 악몽의 집합을 텍스트로써 읽어 내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느껴지는 심오한 정서, 감정의 동요, 불온한 심상을 감각하며 읽는 것이죠. 초반에 느꼈던 위화감은 어느새 잦아지고 어느덧 이 기묘한 차원의 세계로 스며들게 됩니다. 찢어지지 못하고 남아버린 불온한 총체의 기록은 독자에게 전가되어 확장합니다. 독자는 그 비틀린 세계를 거울삼아 자신만의 무엇을 읽어내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번에 이를 파기하는 역할은 작가가 아닌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이죠.



 내게 말해준 건 그 사람이다. 저기 보이는 것이 지상이며, 지상이 곧 천국이라고.

 어떻게 그를 믿겠는가?

 나는 절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p.122, 아버지의 집



 솔직히 어렵습니다. 방금 내가 읽은 것이 맞나 싶어서 행간을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고요, 소심한 좌절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뒤라스의 서문과 대담, 옮긴이의 말, 출판사의 책 소개, 책에 따르는 추천사까지를 두세 번 정도 정독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문득 책을 이해하는데 책 밖으로만 나가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갈피 해놓은 문장과 문단, 제목과 작가, 정서와 감상을 곱씹으니 투명했던 감상의 윤곽이 얼핏 보이기도 했죠. 그 찰나를 잡아 횡설수설해 보았습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유령 같은 잔상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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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처음에 언급했던 제목을 살펴보며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와줘, 오라'는 뜻의 원제 《VEINS》는 작품 속에서 인물을 추동하게 만드는 존재가 건네는 말입니다. 이 목소리의 초대, 요구, 약속을 쫓는 인물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방황하죠. 고로 '고통'을 야기하는 근원적인 욕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문판의 제목인 《Panics》는 좀 더 직관적입니다. 책 그 자체에서 서술하고 묘사하는 상황과 모든 것이 모두 패닉적이거든요. 그리고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는 마지막으로 수록된 작품의 제목이자 마지막 문장인데요, 바로 그 앞에 문장을 주목을 합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p.211) '밤에 혼자 있는 나'는 곧 자유입니다. 모든 혼란과 방황이 소거되어 홀로 남은, 깊은 밤의 고요를 닮은 자유라고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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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허무, 그건 뭘까요?

 M 그건 오히려 여기죠.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게 허무예요. 바보짓이죠. 허무는 어디에나 있어요. 도시에도, 사람들 속에도요. 인간이란 종(種)은 더 나아져야 해요. 우리는 정말 보잘것없어요.

 D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죠? "제가 저답게 살려면 약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M 그래요. 저는 자신을 넘어서려 하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압도되지도 않을 거고요. 저는 그저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p.224, 지하 납골당,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기록한 작가와의 대화 (D-뒤라스, M-몰리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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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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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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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장르와 분야를 읽자고 다짐하면서도 유난히 가까워지지 못하는 장르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시'입니다. 알고 있는 시인과 시라고 하면 중·고등학생 시절에 배운 시와 시인이 전부입니다. 사실 이것도 너무 오래전에 배운 터라 지금은 거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하죠. 시집을 한두 권 사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낭패감. 난해하고 어지러웠거든요. '그저 느끼면 된다, 감상에 정답은 없다'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 세계는 다른 차원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시인이 쓴 산문이라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읽어갑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에 관한 것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듯,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항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삶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p.9,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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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인 시인이 쓴 《일렁이는 음의 밤》의 독특한 구성이라고 한다면 각 글과 상응하는 음악이 병치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글마다 첨부된 QR코드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 시각, 음악을 듣는 청각, 책을 잡은 촉각, 공간이 풍기는 후각, 커피가 주는 미각까지 함께 하며 오감으로 《일렁이는 음의 밤》을 감각할 수 있죠. 덕분에 책을 읽으며 들으며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읽고, 듣고 나니 이 모든 총체적인 감각이 딱 표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옅은 푸름이 겹겹이 덧칠해져 끝내 짙어진 푸름 속에서 고요한 사색을 나누는 기분이 들거든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사유합니다. 그런 사유를 관통하며 음악이 내내 흐르는 거죠. 결국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가족, 친구, 동료, 스승, 지인 등과 너른 관계 속에서 파동 하는 주파수를 섬세하게 끌어올려 음악과 함께 공명합니다. 음악은 대체로 위로가 되어주고, 때로는 감상을 대변해 주기도 하죠. 시인이 글에 녹여낸 한 음절의 가사를 따라 읽으며 흥얼거리다 보면 '아 이것이 다시 '시'인가, 아 결국 '시'와 다름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시인의 산문은 역시나 시를 닮았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시라는 것은 제게 조금 달라진 의미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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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내게 한 선배는 '무엇이 시가 될 수 있을까' 물으라고 했다. 그 말이 '삶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삶이 될 수 있을까' 묻는 태도처럼 들렸다.

 네게 무엇이든 삶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p.84, [너의 말투로 때아닌 여름을 불러줄게], 끝없이 울려 퍼지는 청춘의 소리, 아이묭 『청춘의 익사이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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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유시인吟遊詩人, 거리나 마을을 떠돌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던 이들을 이르는 말이죠, 시인인 저자는 현대의 음유시인으로써 시인의 사회적인 역할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이주 노동자, 참사 유가족, 전쟁 피해자… 사회를 떠돌며 그들을 위해 시를 읊는다는 것에 대하여 사유하는 것이죠. 시대를 앓으며 계속해서 시를 쓰는 것은 또 다른 치유의 과정처럼 읽힙니다. 고민과 성찰, 사유와 사색, 청음과 낭송, 사람과 사람. 모든 것이 적절한 농도와 색채를 띠고 적당한 깊이로 침잠합니다. 깊은 바닷속 고요한 적막을 덮어쓰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체온이 주는 만큼의 온기로 읽는 기분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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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시대를 구할 수 있을까. 시절이 어수선할 때 문학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 걸까.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들며 내가 다짐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존재하기를 통해 실천하며 상상력을 기르는 것이다. p.155,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는 사람들], 첼로 음악을 새롭게 정의한, 파클로 카살스 『J.S. BACH: Six Suites for Solo Cello』







 지나간 시간은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몸 어딘가에 머물다 불쑥 되살아난다. 그 밤들은 음악의 힘을 알게 했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음音에 불과하지만, 그 음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한 존재를 살게 하는 것은 다른 존재이다. p.161, 닫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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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돌아 보며 안녕하고, 앞으로 나가 다시 안녕을 건넬 바로 지금 이 계절에 읽기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일상과 삶에 여러 부침 속에 침잠하고 부상하기를 반복하겠죠. 《일렁이는 음의 밤》은 그런 삶의 기록이라 읽힙니다. 그런 삶의 장면마다 삽입할 수 있는 음악이 있는 것은 분명 제법 멋지고 근사한 일이고요. 음악이 또 그런 삶의 부침을 견딜 수 있게 변주해 주기도 하잖아요. 음악이 때로는 불명한 삶의 사건을 그대로 품어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운율과 음절을 따라 마음껏 일렁이는 밤을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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