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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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나는 책을 결핍된 무엇을 채우기 위해, 혹은 메마른 무엇을 해갈하기 위해 읽었다. 팍팍한 감성에는 시나 에세이를, 순백한 무지에는 교양서를, 강렬한 도파민에는 취향의 장르 소설을 읽어댔다. 책을 덮은 후에는 여지없이 알량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그것으로 세계는 종결이었다. 그러나 《앎과 삶 사이에서》를 덮고 나니 세계는 오히려 활짝 열린 채로 남아있다. 집중에 흔적이 남은 미간을 다소 구긴 채로 잠시 멍을 때린다. 인덱스를 남긴 구절을 찾아 옮기고 감상을 몇 줄 적어보려는데 좀처럼 커서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는 것'과 '사는 것', 그 간극에서 써 내려간 갈등과 고민, 비판과 성찰의 기록이다. 주제는 사회적으로 거대한 담론부터 저자의 개인적인 일화까지 다양하다. 전쟁, 참사, 재난, 장애, 가난, 부조리, 차별, 불평등…. '앎'과 '삶'이 유리된 채 안락한 '삶' 속에서 관망하는 '앎'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저자는 이를 새로 지은 주택에 틀어 앉아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감각하기도 한다. 활자는 어려운 것 없이 술술 읽힌다지만 내용은 꽤나 빈번하게 마음 어딘가에 턱턱 걸려버리곤 해서 곧잘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한 세상이 집 밖에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렇게 모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불편한 말,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데 집이 너무 편안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밖에서는 억수같이 계속 비가 내렸다. p.241-242, [중산층의 집 짓기, 로망과 욕망] 




 그러나 저자는 결코 당위성 따위 같은 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을 가진 유가 계급 중산층, 고등 교육을 받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자신과 세계를 맺음으로써 앎과 삶에서 오는 괴리를 자기고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앎 속에 자신과 삶 속에 자신, 그 괴리와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사고한다. 수치심과 죄책감, 분노와 무기력, 냉소와 체념, 비판과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지만 희망을 바라보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한낱의 소시민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고 저자도 이를 통감하지만 냉소는, 체념은 너무 가볍고 쉬운 선택인 것이다.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69, [죽어가는 것은 사람이다] 

 저자는 파주에서 이웃들과 책방을 운영하며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여러 활동을 한다. 그런 여러 활동의 일환으로 연이 닿아 미얀마 국경 지역에 난민촌을 방문하며 그들과 '민주주의 시민'으로써 연대하는 장면을 보고 문득, 대학 시절에 어느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과에서 개최한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아웅산 수 치'에 관해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던 미얀마 교환 학생, '너희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닮아있다!'라고 말을 맺으며 환하게 웃던 모습. 왜 더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앎이 잊고 지냈던 삶 속에 있던 것이다.





 불법 계엄과 탄핵, 그 이후에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어쩌면 간과하고 싶었던 사실들을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으로 조망할 때는 나도 그 시선의 사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더 큰 '대의'라는 명목하에 묵살되는 가치들은 과연 묵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대의는 정녕 다수를 대표하는가. 거대 양당 정치를 배경으로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인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단으로서의 정치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지 저자의 확장된 시각을 빌려 바라볼 수 있다. 자, 이제 앎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소시민의 힘은 무용하다고 느껴지는가? 나는 지난 12·3 계엄 사태 이래로 발광하던 수많은 응원봉을 기억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보다 나의 윤리적 자족감이 앞설 수는 없지 않을까? p.318, [밥벌이의 준엄함, 삶의 엄연함] 

 조금 더 일반적인 삶 속에서 앎을 고민했던 사례는 '탈팡'이었다. 저자 또한 새벽 배송을 이용하지 않다가 불가피하게 이용하며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이용자 입장에서 느끼는 하찮은 '윤리적 자족감'을 걷어내면 보다 복잡한 노동자의 사정이 드러난다. 야간 수당, 비대면 환경, 불가피한 야간 노동 사정 등의 이런 '밥벌이의 준엄함'을 묵과할 수 있을까? 결국 이것 또한 구조적인 문제고 해결 방법은 정치 영역에서 입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무용의 도돌이표가 다시 찍히는 기분이다.

 마트와 새벽 배송, 배달 앱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거리낌이 느껴진다면 거기에 윤리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 없이는 세상을 바꾼다는 꿈조차 꿀 수 없다. p.319, [밥벌이의 준엄함, 삶의 엄연함] 

 이러한 긴장과 충돌, 갈등과 허탈이 앎과 삶을 연결하는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위태롭게 밟아내는 스텝이 춤인지 몸부림인지 기묘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착한 소비자'가 '선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면서도 계속해서 앎과 삶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을 주목해야 한다. 앎과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줄이 되어 그 두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많은 개인들의 그러한 긴장과 고민, 소소한 실천과 선의를 외면한다면 그 줄은 차츰 삭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위선이야말로 선을 닮고 싶은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을 증거한다. 위선이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인 이유다. 위선은 역겹지만, 위선마저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 냉소하기보다는 위선의 모순 속으로 걸어가야 할 까닭이다. 이 길을 걸어야 한다. p.178, [위선,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 




 사실 많은 문장들에 인덱스를 남겼다. 기대하는 명쾌한 해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의 문장들이 가득하다. 열려버린 세계 속에서 개인적으로 위로를 얻은 문장을 공유하고 싶은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꼽고 싶다. 그 문장은 바로…,



어중간하게 살아왔다.

사실은 당신도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면 좋겠다.

p.5, 들어가며 [어중간하게 살아온 당신과 나에게]







 책을 들어가며 여는 서문의 첫 문장이다. 저자는 어중간하게 살아온 삶을 고백하며 독자도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기를 바라는 문장. 다 읽고 돌아와 다시 서문을 읽는다. 혼란하고 불분명해진 마음에 나와 당신의 '어중간한 정체성'이 서로 다름없음으로 위로가 되는 문장. 그럼에도 뒤를 잇는 문장들의 꼬리에서 저자는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보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소시민의 삶과 앎이 얽히고설켜 끝내 품고야 마는 희망이자 연대에 대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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