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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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설을 손에 쥐어들면 반사적으로 손에 땀이 고입니다. 분명 활자를 읽는 것에는 무리가 없지만 정녕 읽은 것이 맞나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왕왕 있거든요. 내가 놓친 행간에 의미가 영원히 우주를 떠돌 것만 같은 그런 기분. 황량한 낭패감 속에 혼자 남겨져 감응하지 못하는 무감한 스스로를 주섬주섬 추스르고는 합니다. 그런고로 이번에도 약간의 그런 긴장을 지레 집어먹고 《너의 나쁜 무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설렘도 살짝 추가할 예정인데요, 한국 문학을 잘 모르는 저도 '예소연' 작가와 작품은 여기저기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거든요.





 《너의 나쁜 무리》는 각기 다른 지면에 실렸던 총 7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입니다. 표제작인 <너의 나쁜 무리>는 '유선'과 유선의 할머니 '여사'가 등장하는데요, 일면 발랄해 보이는 여사는 끊임없이 연애라는 소동을 일으키고, 유선은 이를 목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사는 유선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유선은 그 말에 반발심만 느낄 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유선은 여지없이 여사의 연애 소동에 연루되고 맙니다. 그리고 유선은 목장갑을 끼며 말해요,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p.111) 어딘가 불건전해 보이는 조손 관계는 스멀스멀 가지를 뻗어, 여사의 연애 상대인 현구 아저씨와 유선의 썸남인 이해신과 함께, 그런 '나쁜 무리'가 되어버립니다.





 여사와 유선은 조손 관계지만 서로의 연애담을 무람없이 나눌 정도로 거리낌이 없습니다. 둘의 관계는 애증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더 복잡하게 느껴지고 특정한 단어로 쉽사리 정의될 수 없어 보입니다. 이런 관계성은 다른 단편들에서 마주하는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들을 아우르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서로 관계를 '맺는' 능동적인 행태라기보다 서로 관계에 '연루'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느슨하지만 또 어딘가 비뚜름하고도 비대칭적인 관계성이 두드러집니다. 그런 관계의 인물들은 뒤뚱뒤뚱 어디론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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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소란한 속삭임>이라는 단편이 참 좋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발생시키던 사람에게 일갈하던 시내는 뜬금없이 모아에게 '속삭이는 모임'을 제안합니다. 이 모임의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그들은 명동역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수자도 포섭하고요, 층간 소음을 발생시킨다고 시내가 주장하는 시내의 윗집 이웃 두리도 이 '속삭이는 모임'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 모임은 말 그대로 서로 속삭이는 모임인데요, 별달리 의미 없어 보이는 사실들을 그저 속삭였을 뿐인데 희한하게 마음 어딘가가 동요하기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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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하지 않아도 속삭임으로써 중요해져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허투루 하는 말은 없는 거죠." p.129, <소란한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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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 모아, 수자, 두리. 이들 모두는 우연찮게 조우합니다. 완벽한 타인들이 얼렁뚱땅 모여 어느새 마음을 속삭이기 시작해요. 어쩔 수 없이 연루되어버린 관계 속에 모아는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무의식적으로 감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던히도 삐걱거리는 그들의 관계지만 삐걱거리면 삐걱거리는 데로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흘러갑니다. 심지어 그 궤적, 꽤나 근사한 꼬리를 남깁니다. 바로 느슨한 연대라는 형태로 말이죠. 더불어 수자 씨의 유쾌한 너스레는 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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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 군데가 단단히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p.157, <소란한 속삭임> 




 여러 단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성은 불완전합니다. 미움과 애정을 동시에 품고요, 관계 속에서 탈출을 갈구하면서도 다시 돌아오죠. 낯선 타인이 허무한 평화 속으로 침투해 균열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 기꺼이 그것을 곁에 둬요, 기꺼이 연루됩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의아해하며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함께 가는 겁니다. 타인에 대한 경계가 유난한 저로서는 다시 끔 생각해 보게 만드는 구석입니다. 빗장을 조금 느슨하게 걸어놓고, 타인이라는 불가해한 우주를 부유하며 느슨하게 연루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기꺼이 '나쁜 무리'에 일원이 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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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를 한 줄로 평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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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성긴 관계'가 주는 적당한 거리감 덕분에 말하지 못했던 근심을 가볍게 툭 던지고 털어낸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밀도 높은 관계에서는 차마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던, 다소 상쾌하기까지 했던 그런 관계도 있었지요. 연대란 것이 결코 단단한 결속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느슨한 연결에서도 우리는 기꺼이 연대할 수 있다는 옅은 따사로움을 감각해 보며 한 줄 평을 써보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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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우주 속에 느슨한 해먹을 걸어놓고

함께 유영하는 방법에 대하여



 어렵습니다. 책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최대한 활자로 옮겨보려고 했는데요, 쓰고 나니 어쩐지 갸우뚱만 오백 번 하다가 스리슬쩍 마침표를 찍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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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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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를 아시나요. 과연 그 시절 초등생 최고의 교육 만화였습니다.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되면 모아놓은 용돈을 들고 동네 문고로 달려가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에는 god가 오프닝 곡을 부른 〈올림포스 가디언〉이라는 TV 만화로도 나와서 꼬박꼬박 시간을 맞춰 봤던 기억도 나고요. 덕분에 지금까지 다소 어설프게나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상징성이나 에피소드를 알고 있는 것이죠.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를 너끈히 읽어야 할 나이지만 여전히 제게 신들은 만화 속 화려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잡담이 또 길어졌는데요,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에서 바로 이 그리스 신화 속 여섯 남신들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근간에 읽은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에서는 이제는 낡아버린, 소구력을 상실한 가부장제 속 현시대 남성들의 분노와 혼란이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이라는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하며 이의 근본적 원인을 '대안적 남성 모델의 부재'로 집어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잃어버린 남성성을 그리스 신화 속 여섯 남신들, 제우스·헤파이토스·아폴론·헤르메스·디오니소스·하데스가 지닌 남성성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남성성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내 안, 그리고 세상에 작동하는 원형들의 힘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다. 보편적 '마음 무늬'를 찾아, 본래 그러하듯 다면적인 나와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함이다. p.12,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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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신이 지닌 상징성을 심리학적 '원형'으로 환원하며 재해석하는 방식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들이 공존하는 다신관 체제 속의 그리스 신들은, 반목하는 상징과 가치 혹은 존재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죠. 저자는 이를 심리학적 원형으로 치환하여, 우리의 심리적 기질들을 고루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조율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억압되고 편향된 원형은 결국 각종 병리적인 증상들로 발현되기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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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리가 앓는 각종 병리적인 증상들은 억압된 심적 에너지를 의식화하라고 촉구하는 영혼의 호소일 터이다. p.30





 제우스부터 여섯 남신을 찬찬히 훑어봅니다. 먼저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로 내려오는 폭력적인 아버지 상을 점차 탈피하며 내면의 여성성(아니마)을 수용하는 제우스는 열두 신의 조화와 공존을 이루어냅니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 다양한 신들의 존재와 영역을 존중하는 통합적인 리더십에서 가부장적 아버지를 탈피하고 새로운 아버지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합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아폴론의 원형적 특성은 현시대에서 절대적인 진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아폴론은 유독 연애에 취약했던 신이었는데요, 그 까닭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아폴론의 반대적 특성, 즉 억압된 본능과 모순 등이 폭력적인 형태의 구애로 발현되면서 번번이 좌절되었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대척되는 원형의 특성 또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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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지고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신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추한 외모와 장애를 가진 신이자, 유일하게 노동하는 신인 헤파이토스에 대한 해석은 특히 흥미로웠는데요. 부모로부터 박탈당한 애정, 모성에 대한 갈구, 신체적인 결함에서 비롯한 열등감, 수치심 등을 여성에게서 충족하려는 왜곡된 남성성은 아내인 아프로디테를 두고 반목하는, 과잉화된 남성성의 상징인 아레스와 대립하며 드러납니다. 이 대목에서는 '인셀(Insel)'이라는 키워드를 읽어낼 수 있죠. 그러나 헤파이토스가 렘노스 섬에서 인고의 시간을 거쳐 끝내 올림포스에 입성하는 지점에서 현대의 우리는 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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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도 결점도 추함도 열등함도 없어 보이는 삶을 원한다는 것, 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창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참자기가 되는 길은 있어도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p.92





 5장에서는 주정뱅이 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디오니소스에 관한 편견을 한껏 걷어낼 수 있었는데요, 술에 취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여흥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신화학적으로 접근하면 일종의 '혁명'적인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황홀경과 광기를 넘나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닌 양성성의',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표징들은 모순적이며 아슬아슬합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견고하게 시스템화된 경직된 사회에서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은 체제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간주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사회야말로 병폐를 품고 있는 '디오니소스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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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은 억압되고 잊힐지라도 힘을 발휘하며, 억압된 원형은 각종 증상으로 만나게 된다. 제대로 섬기지 않은 신(원형)은 필연적으로 그림자가 되어 다가온다. 그런데 현대인에게는 신의 힘보다 그림자가 더 익숙할 따름이다. 신을 인간적으로 존중하지 않으니 비인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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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과 상인, 협상, 경계의 신인 헤르메스를 통해서는 합리와 이성으로 점철된, 경직된 아폴론적 사회에서 보다 유연한 사고의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이 재치 넘치는 신의 가호를 받는다면 우연과 돌발성이 덮치는 인생의 풍파 속에서 순발력과 재치를 잃지 않고 보다 유연하게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정인 하데스에 이르는데요, 단편적으로 죽음을 의미하는 그의 세계는 보다 심오합니다. 피상적인 내적 자아를 비로소 탈피하여 보다 깊고 넓은 심연 속의 진정한 자기를 찾는 여정인 것이죠. 하데스의 세계의 주요한 특질인 '비가시성'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본질, 내면의 참자기를 찾기 위한 것이 이 모든 여정의 주요한 종착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신관은 다양성에 토대를 두기에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힘이든 특질이든, 다름이 일으키는 갈등과 긴장감을 있는 그대로 노출할지언정 그 차이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는 것이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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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화의 남신들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서 현시대의 새로운 남성성을 제시합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성에 대한 연구와 탐색은 활발한 것에 반하여 남성성에 대한 탐구와 대안은 요원하고, 연구는 충분히 영글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하나의 훌륭한 제안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심리적 원형으로 톺아보는 탐색 과정에서 어느 하나의 원형도 배척되거나 편향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균형과 조화, 조율의 관점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요. 하나의 원형 혹은 원형과 원형 사이에서 충돌하는 모순과 반목도 다면적인 관점에서 '균형'으로 작용하는 힘을 이해하면 비로소 인간의 원형적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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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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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었습니다. 이는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임금 인상,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참정권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이 시위에서 여성들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라고 외쳤는데 여기서 '빵'은 경제적 평등을 위한 생존권과 노동권을 의미하고 '장미'는 정치적 평등을 위한 인간답게 살 권리와 참정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로 여성의 날에는 전통적으로 빵과 장미를 서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올해는 빵과 장미 대신에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을 건네받았습니다.





 '페미니즘'하면 어떤 생각과 기분과 느낌이 드시는지요. 미약한 고백이지만 솔직하게 개인적으로는 불온한 긴장감이 가장 먼저 느껴집니다. '페미니즘'을 발음하면 뒤따라오는 그릇된 이미지, 소모적인 논쟁, 서로에 대한 혐오 따위 등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죠. 마치 시한폭탄을 입안에서 굴리는 느낌이랄까요. '입 밖으로 내놓기만 해도 끝내 터지고야 만다'와 같은 불안과 끝내 따라오는 패배감. 물론 이런 감상이 그동안 안티 페미니즘, 남성 역차별 등과 같은 백래시 현상으로 오도된 것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은 여성을 찬양하거나 여성만을 위한다고 떠드는 일이 아니다. 젠더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소수자와 약자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척박한지 이해하는 행위에 조금 더 가깝다. 이는 내 사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고정된 틀에 균열을 내고 서서히 스스로를 해방하는 일이기도 하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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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런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을 지적하면서 사회 구조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지적합니다. 피해자의 자리와 역할을 자처하며 '남성 역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과 페미니즘을 공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공격적으로 비난합니다. 이런 인식은 다시 여성 혐오 정서를 부추기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들은 '왜' 페미니즘을 그토록 공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비난과 비판을 떠나서 본질적으로 저도 참 궁금한 지점이었는데요, 저자는 이를 오래된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지적하며 풀이합니다.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학습하며 자란 남성들에게 다변화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질서는 일종 위협으로 간주됩니다. 가부장제 기득권으로 기존에 누리던 우월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고 느끼는 것이죠. 그러나, 특히 젊은 남성들은 딱히 누려본 적 없다고 느끼는 우월적 지위와 잠재적 가해자 취급에 대한 억울한 정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저성장 사회에서 취업난을 결부시키며 점점 더 활발해지는 여성의 사회적 행보와 커지는 목소리를 위협이자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적대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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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더욱 문제인 것은 점차 소실되어가는 가부장제가 요구하던 남성적 역할을 대안할 마땅한 남성적 모델이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여성의 대안적 삶을 제시하는 책이나 문화, 인물 등이 다양해지는 반면에 남성의 대안적 삶, 가부장제 이후의 새로운 질서나 정서를 제안하는 대안이 부재한 것이 현실이죠. 문제의 원인은 가부장제의 구조적 모순이 초래한 편향된 남성적 역할에 있는데, 원인의 방향으로 해결의 길을 터야 하는데,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우려스러운 시점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남성 역차별의 '착시'를 취재 자료, 논문, 최근 통계와 같은 사회 구조적 지표를 근거로 들며 착실하게 타파합니다. 성별 임금 격차, 유리 천장, 돌봄 노동 및 독박 육아로 인한 저출생 문제, 교제 폭력과 같은 젠더 폭력의 비대칭성 등은 현재 사회에 여전히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를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의 언어로 치환하며 왜곡된 피해자성을 부여하고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적 모략은 반대로 페미니즘을 지워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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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관점이자, 나의 '이상함'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해석의 틀이었다. 포기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제도적 개선이, 성별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견고한 유리천장을 부수고자 하는 시도가 어째서 '남성의 몫을 빼앗는 일'이란 말인가. p.6, 프롤로그, <포기할 수 없어서, 같이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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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대립은 결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성 불평등 구조 또한 여성에게만 유해한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해하다고 저자는 설파합니다. 특히 성찰적인 태도로 페미니즘에서 남성의 역할을 주장하는 점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부디 페미니즘이 건강한 공론의 장에서 건설적으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해야 얻을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의 주체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말이죠. 페미니즘도 한쪽으로 만으로는 결코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다시 '우리'가 되어야 하겠죠.




 사실 까슬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루는 주제가 불편하기도 하고, 답 없이 꼬여만 가는 갈등과 혐오를 활자로 또다시 반복하는 기분이 들것 같았거든요. 읽으면서 그런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도대체 그들은 왜 그럴까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증에 많은 답을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낙담과 피로감을 핑계로 한 비겁한 자세를 고쳐 앉을 수 있었던 문장을 골라보았는데요?





 연대는 평소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다. 그건 어쩌면 낯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환대이자 사랑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쉽게 낙담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다시 연대의 광장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연대 이후의 삶은, 지금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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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8, <연대 이후의 삶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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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가장 마지막 글에서 골라왔습니다. 낯선 이에게 건네는 '가장 큰 환대이자 사랑'이 곧 '연대'라고 말하는 그 마음. 어쩌면 '대 혐오의 시대'라고 조소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거든요. 여성의 날에 건네는 빵과 장미도 결국은 '연대'하자는 근사한 청유인 것처럼 결국은 이 책을 통해 건네고 싶은 말은 연대의 광장으로의 청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성의 날'이 있는 이 달, '연대'에 관해 한 번씩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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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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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양육과 돌봄'이라는 세계는 개인적으로 도통 접점이 없는 세계입니다. 자녀도 없고, 엇비슷하게 조카도 없으니 직접적인 양육 경험도, 그것을 멀리서나마 관찰할 수 있는 간접적인 경험도 없지요. 집 근처에 학교가 있는 터라 등·하교하거나 역시 근처 공원에서 노니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스쳐 지나가며 마주하는 것이 접점이라면 접점이랄까요. 그런고로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해의 영역에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가라앉을 걱정이요. 그러나 역시 쓸데없는 기우였고요,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카프카의 도끼'가 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각 가정마저 다음 세대의 인적 자본을 재생산하는 경제 현장이 되면서 결혼과 가족은 자연히 탐욕스러운 제도가 되었고, 자녀를 위해서라면 불법과 위법도 마다하지 않는 부모의 집착이 탐욕스러운 돌봄을 배태시켰다. p.36, 탐욕스러운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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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스러운 돌봄》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양육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하여 고민하고 갈등한 사유한 총체에 관한 기록에 더하고 나아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비평하고 대안을 제언합니다. 뉴스에서 종종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고 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교육 문제, 일부 몰지각한 양육자의 태도, 이에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노 키즈 존'과 같은 혐오의 정서 등과 같은 다양한 현상을 '양육자'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를 더 확장시켜 구조적인 해부를 시도한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붕 뜨는 느낌이 없는 까닭은 저자가 직접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사유이기에 개연성과 설득력이 충분히 확보되기 때문이죠.





 아이와 아이를 둘러싼 안팎의 세계는 '돌봄'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며 왜곡되고 굴절되기도 합니다. 새삼 세상에 이토록 많은 해악의 요소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요. 이런 안팎의 세계와 교류하며 태동하는 불안이 결국 선행 학습, '키즈'가 붙은 각종 체험 활동, 초등 의대반 열풍 등의 '탐욕스러운 돌봄'으로 발현된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이런 사회적 불안과 욕망, 공포가 부추기는 '돌봄'을 결코 해갈되지 않는 '갈증'으로 정의하고 돌봄의 영역을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킵니다. 개별 가정의 고립된 돌봄을 '우리'라는 사회 공동체의 영역으로 끌어오며 이로운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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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이라 해도 모든 부모는 부모이기 전에 시민이고 개인이다. 자식 또한 부모의 분신이 아니라 고유한 타인이다. 우리는 아이와 좋은 이별을 맞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을 줄 수 있지만 생각을 심을 수는 없다. 부모이기 전에 각자의 '나'들이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돌보는 그 마음을 돌이키기를 제안하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이 사회를 함께 돌아보면 돌봄이 조금은 덜 힘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 p.7, 서문, 혼자 애쓴다고 쉬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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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와 저자의 에피소드에서 파생되는 꼭지들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빗금과 아이의 자존감 문제, 초등 교과서 속 다문화 가정 캐릭터 '샤오메이', 저출생과 과밀학급을 바라보는 신도시 엄마, 여성과 돌봄 노동, 사회적 참사를 아이에게 설명하는 방식, AI를 능란하게 활용하는 미래 세대, 학교에서 폭력과 젠더 문제를 다루는 방식 등…. 홀홀한 한 개인으로써 보다 양육자로써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결 날카로운 동시에 세심해집니다. 다종다양한 주제로 무람없이 확장하는 사고와 비판적인 성찰과 건설적인 비평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지렁이 독자의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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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호흡하는 한, 우리는 세계를 공유한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들과 공유하는 세계를 공동체라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위해 여기 함께 있음을 굳이 번거롭게 증명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p.80, 안녕, 샤오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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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보면 돌봄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같은 사회를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달까요. 모두의 돌봄이란 결국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를 바탕으로 정서적인 연대, 나아가 사회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포괄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아이 혹은 어린이'에서 '미래의 민주시민 동료'로써, 한 명의 온전한 주체로 인식을 전환하니 낯선 세계와 접점이 없다고 느꼈던, 존재를 향한 응시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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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
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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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양조위의 영화를 직접적으로 보고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후일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 마주한 얼굴만은 익숙한 사이랄까. 어느 정도의 인지 능력이 생긴 뒤에 배우 양조위를 다시 만나게 된 영화는 <색, 계>였다. 영화는 충격적인 정사신으로 세간에 회자되었고 나에게도 그렇게 기억되었지만 후에 접한 여러 평론과 해석, 후일담 등을 통해 비로소 그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진정을 알게 되었다. 최근 세대에게 다시 끔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이 호명되어 리마스터링 된 작품들을 돌려보며 마주한 양조위의 몸짓, 눈빛, 고뇌 등이 빚어내는 특유의 무드.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는 그런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양조위는 그냥 존재만으로 서사와 정서를 만든다.

p.8, 프롤로그, 빛과 그림자 속의 양조위





 무려, 40년이라는 배우 양조위의 연기 인생을 집대성한 세계 최초의 평전이라고 하는데 저자의 이름을 보니 어딘가 친숙하다. 예전에 즐겨보던 영화를 다루던 예능인 <방구석 1열>에 패널이었던 주성철 영화 기자였던 것이다. 당시 변영주 감독과 나란히 앉아서 주고받던 티키타카가 참 재미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왕가위 감독, 배우 장국영 특집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충만한 덕후력이 인상 깊었던 터라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의 저자가 그라는 점은 '마침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일종의 '성공한 덕후, 성덕'의 정점에 이르는 타당한 개연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 양조위의 TVB 드라마 데뷔 시절부터 홍콩 영화 생태계의 흥망성쇠에 따른 배우 양조위의 인생 굴곡을 섬세하게 짚어간다. 주윤발, 유덕화, 주성치, 장만옥, 유가령 등과 같이 한 시대를 같이 호흡했던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홍콩 영화 전성시대를 만들어나갔다. 양조위와 각 배우들과의 관계성과 이에서 비롯한 영향, 당대 주류였던 배우상과 다른 결을 지녔던 양조위의 연기 행보, 배우가 아닌 가수로서의 양조위, 허우샤오시엔·오우삼·왕가위 등 거장들과의 케미와 의의 등 그야말로 양조위의, 양조위를, 양조위로 집대성한 거대한 양조위 유니버스를 무람없이 유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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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주윤발, 유덕화 등 당대 다른 남성 배우들과 달리 양조위는 '영웅'을 연기한 적이 없다. 영웅이 되고자 한 적도 없어, 어쩌면 반(反)영웅보다 탈(脫)영웅에 가깝다. (…) 양조위는 저 멀리 우러러보는 원시화된 스타가 아니라 언제나 곁에 머물러 있는 근시화된 스타다. p.113 







 특히 배우 장국영과 양조위, 왕가위 감독의 관계성을 톺아보며 깊게 탐구하는 파트는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 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가 장국영에서 양조위로 옮겨지며 작품에 담긴 의의를 표현하는 방식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 읽다 보면 양조위가 지닌 그 특유의 정서와 감성, 몸짓과 눈빛, 침잠과 침묵이 떠오른다. 영화에서 그를 보고 난 후에 짙게 남은 잔상의 실체를, 비단 잘생긴 외모만이 아닌 본질적인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저자가 섬세하게 톺아온 활자로 독자는 배우 양조위를 다시 직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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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은 말과 말 사이, 몸짓과 몸짓 사이에 숨 쉴 공간이 넓다. 좁은 골목을 통과하는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언제나 햇살 가득한 정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여유롭다. 작품에서 발광하고 공명하는 순간에도, 그 우아한 여유를 잃지 않는다. 그것이 양조위가 감정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방식이다. p.10, 프롤로그, 빛과 그림자 속의 양조위 






 <중경상림>이 시한부 인생을 살던 당시 홍콩의 은유였듯, <화양연화> 역시 과거를 빌려 지금의 홍콩을 비춘다. 유년의 기억을 경유한 따뜻한 노스탤지어에 머물기에 1960년대의 홍콩은 너무나도 입체적이었다. 그것은 중국 본토,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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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비정성시>,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등의 익히 잘 알려진 작품을 통해 당대의 홍콩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정서의 맥을 짚어 보는 지점은 영화가 지닌 심미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97년도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불안한 홍콩인의 정서와 부유하는 정체성에 대한 디아스포라적인 시선을 제시하며 서사의 깊이를 확장시킨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체념, 불안, 고독, 단절의 정서는 배우 양조위를 투과하며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게 되고 이는 곧 양조위라는 배우가 하나의 장르가 된다.


 중요한 것은 들려주지 않음으로써 더 간절하게 들려주려 하는 <해피 투게더>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깊게 보여주려 하는 <화양연화>의 결정적 순간을 양조위라는 존재가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275 






 그동안 '보았다'라고 생각했던 영화들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진정 보았었던 것인지 의문이 들어버렸다. 그러므로 결국 다시 보게 될 것이고, 그때가 돼서야 비로소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배우 양조위의 평전이지만 그를 구심점으로 생각보다 더 너른 범위에서 홍콩과 영화와 감독과 배우를 다루고 있어서 시네필이 아니어도 전반적으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더불어 첨부하는 영상은 직접 홍콩에 가서 영화에 나온 장소를 돌아보는 여행으로 책에서 언급한 영화의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저자 주성철의 뻐렁치는 덕후력과 홍콩에서도 변함없는 변영주 감독과의 케미를 확인할 수 있으니 편안하게 보기를 추천! (재밌음!)




https://youtu.be/l1tNEl46Imw

ⓒ [돌아온 방구석 1열], 교양 Voyage, YouTube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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