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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평점 :

혹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를 아시나요. 과연 그 시절 초등생 최고의 교육 만화였습니다.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되면 모아놓은 용돈을 들고 동네 문고로 달려가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에는 god가 오프닝 곡을 부른 〈올림포스 가디언〉이라는 TV 만화로도 나와서 꼬박꼬박 시간을 맞춰 봤던 기억도 나고요. 덕분에 지금까지 다소 어설프게나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상징성이나 에피소드를 알고 있는 것이죠.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를 너끈히 읽어야 할 나이지만 여전히 제게 신들은 만화 속 화려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잡담이 또 길어졌는데요,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에서 바로 이 그리스 신화 속 여섯 남신들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근간에 읽은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에서는 이제는 낡아버린, 소구력을 상실한 가부장제 속 현시대 남성들의 분노와 혼란이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이라는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하며 이의 근본적 원인을 '대안적 남성 모델의 부재'로 집어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잃어버린 남성성을 그리스 신화 속 여섯 남신들, 제우스·헤파이토스·아폴론·헤르메스·디오니소스·하데스가 지닌 남성성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남성성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내 안, 그리고 세상에 작동하는 원형들의 힘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다. 보편적 '마음 무늬'를 찾아, 본래 그러하듯 다면적인 나와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함이다. p.12, 들어가는 말
각 신이 지닌 상징성을 심리학적 '원형'으로 환원하며 재해석하는 방식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들이 공존하는 다신관 체제 속의 그리스 신들은, 반목하는 상징과 가치 혹은 존재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죠. 저자는 이를 심리학적 원형으로 치환하여, 우리의 심리적 기질들을 고루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조율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억압되고 편향된 원형은 결국 각종 병리적인 증상들로 발현되기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리가 앓는 각종 병리적인 증상들은 억압된 심적 에너지를 의식화하라고 촉구하는 영혼의 호소일 터이다. p.30

제우스부터 여섯 남신을 찬찬히 훑어봅니다. 먼저 '우라노스-크로노스-제우스'로 내려오는 폭력적인 아버지 상을 점차 탈피하며 내면의 여성성(아니마)을 수용하는 제우스는 열두 신의 조화와 공존을 이루어냅니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 다양한 신들의 존재와 영역을 존중하는 통합적인 리더십에서 가부장적 아버지를 탈피하고 새로운 아버지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합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아폴론의 원형적 특성은 현시대에서 절대적인 진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아폴론은 유독 연애에 취약했던 신이었는데요, 그 까닭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아폴론의 반대적 특성, 즉 억압된 본능과 모순 등이 폭력적인 형태의 구애로 발현되면서 번번이 좌절되었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대척되는 원형의 특성 또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멋지고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신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추한 외모와 장애를 가진 신이자, 유일하게 노동하는 신인 헤파이토스에 대한 해석은 특히 흥미로웠는데요. 부모로부터 박탈당한 애정, 모성에 대한 갈구, 신체적인 결함에서 비롯한 열등감, 수치심 등을 여성에게서 충족하려는 왜곡된 남성성은 아내인 아프로디테를 두고 반목하는, 과잉화된 남성성의 상징인 아레스와 대립하며 드러납니다. 이 대목에서는 '인셀(Insel)'이라는 키워드를 읽어낼 수 있죠. 그러나 헤파이토스가 렘노스 섬에서 인고의 시간을 거쳐 끝내 올림포스에 입성하는 지점에서 현대의 우리는 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처도 결점도 추함도 열등함도 없어 보이는 삶을 원한다는 것, 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창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참자기가 되는 길은 있어도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p.92

5장에서는 주정뱅이 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디오니소스에 관한 편견을 한껏 걷어낼 수 있었는데요, 술에 취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여흥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신화학적으로 접근하면 일종의 '혁명'적인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황홀경과 광기를 넘나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닌 양성성의',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표징들은 모순적이며 아슬아슬합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견고하게 시스템화된 경직된 사회에서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은 체제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간주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사회야말로 병폐를 품고 있는 '디오니소스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원형은 억압되고 잊힐지라도 힘을 발휘하며, 억압된 원형은 각종 증상으로 만나게 된다. 제대로 섬기지 않은 신(원형)은 필연적으로 그림자가 되어 다가온다. 그런데 현대인에게는 신의 힘보다 그림자가 더 익숙할 따름이다. 신을 인간적으로 존중하지 않으니 비인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p.216
도둑과 상인, 협상, 경계의 신인 헤르메스를 통해서는 합리와 이성으로 점철된, 경직된 아폴론적 사회에서 보다 유연한 사고의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이 재치 넘치는 신의 가호를 받는다면 우연과 돌발성이 덮치는 인생의 풍파 속에서 순발력과 재치를 잃지 않고 보다 유연하게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정인 하데스에 이르는데요, 단편적으로 죽음을 의미하는 그의 세계는 보다 심오합니다. 피상적인 내적 자아를 비로소 탈피하여 보다 깊고 넓은 심연 속의 진정한 자기를 찾는 여정인 것이죠. 하데스의 세계의 주요한 특질인 '비가시성'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본질, 내면의 참자기를 찾기 위한 것이 이 모든 여정의 주요한 종착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신관은 다양성에 토대를 두기에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힘이든 특질이든, 다름이 일으키는 갈등과 긴장감을 있는 그대로 노출할지언정 그 차이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는 것이다. p.241
그리스 신화의 남신들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서 현시대의 새로운 남성성을 제시합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성에 대한 연구와 탐색은 활발한 것에 반하여 남성성에 대한 탐구와 대안은 요원하고, 연구는 충분히 영글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하나의 훌륭한 제안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심리적 원형으로 톺아보는 탐색 과정에서 어느 하나의 원형도 배척되거나 편향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균형과 조화, 조율의 관점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요. 하나의 원형 혹은 원형과 원형 사이에서 충돌하는 모순과 반목도 다면적인 관점에서 '균형'으로 작용하는 힘을 이해하면 비로소 인간의 원형적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