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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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추·미·스 혹은 오컬트나 공포 장르를 가장 좋아하는 반면에 가장 크게 거리감을 느끼는 장르는 SF나 판타지 장르다. 독자적인 세계관이나 특수한 설정에 대한 이해를 조금 귀찮아(?)하는 편이고 쉽사리 몰입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오컬트를 좋아하는 주제에 SF나 판타지가 현실과 너무 괴리된다고 느끼는, 이런 다소 모순적인 취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시간의 끝》은 이런 상충하는 나의 취향을 저격하고야 말았다. 무려 형사와 수학자와 교주가 동시에 등장하고 마는데 '수학자'에서 덜컥 겁이 난 수포자(본인)도 끝까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말세다!'라는 말이 현실화된 세상. 하늘에는 부서진 달의 파편들이 떠있고 이계에서 정의할 수 없는 삿된 존재들이 현실에서 재앙을 일으키고 있다. 세상의 혼란을 틈타 각종 사교도가 횡행하며 사회는 끝을 향해, 종말을 향해 가속도를 내며 치닫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사교도수사과 형사 천수영, 수영의 배우자이자 수학과 교수인 이지호, 그리고 불명의 사교도 교주라는 세 인물의 시선을 교차하며 《시간의 끝》 속 아포칼립스를 그려내고 있다. 이 절망적인 세계관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인물들이 '사교도'라는 독특한 설정을 통과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이는 손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일으킨다. 






 이야기의 핵심 축인 '사교도'의 행태가 특이하고도 흥미로운데 바로 가장 대척점에 존재하고 있는 수학과 오컬트를 한데 혼합했다는 점이다. '틸링해스트 수학'을 중심으로 그 풀이와 수식을 통해 궁극의 진리에 통달한 이들은 '2차 시간'이라는 다른 차원을 깨닫게 되며 이를 통해 시간의 끝, 곧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결론을 마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의 끝'을 향해 인물들이 얽히고설키기 시작하고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라는 개념은 서서히 미묘하게 붕괴되며 혼란스러워지고, 선형적인 1차 시간과 비선형적인 2차 시간이 교차하며 인물 자체의 피아식별도 확신할 수 없게 돼버린다.





 오컬트처럼 기묘한 분위기로 시작한 이야기가 수학과 물리, 과학적인 상상력을 만나면서 이야기는 오묘한 색채를 지니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칠판 가득 수학 공식과 그래프를 판서하면서도 주술진을 피로 그려내고 명상과 함께 주문을 외우며 궁극의 상태에 도달하는 장면은 이질적인 두 소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현실에서 일어난 오컬트적인 요소가 가미된 기이한 현상들과 같은 비과학적 현상을 '틸링해스트 수학'이라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적 요소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 또한 설정에 현실성과 개연성을 부여하는, 의외로 케미(?)가 좋은 상호보완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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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한 줄기 직선이 아님을 인정하면 인과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인과가 없으면 책임도 없고 잘못도 없으며, 삶도 죽음도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앞에 있는 원인을 따르는 결과로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어떤 존재에도, 사건에도 원인이나 결과는 없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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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끝이 오는 순간까지, 저는 그걸 막을 방법을… 올바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여러분 하나하나가 저를 찾아오실 때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종말의 시대에도 사람답게 살아보자고요." 

 "더운물에 목욕하고 지붕 아래 자고 삼시 세끼 먹으면 그걸로 사람다워집니까?" 

 다들 조용해진다. 나는 더욱 힘주어 말한다. 

 "끝도 사람답게 맞이해야 사람답게 산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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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칼립스, 종말, 사교도 등 말초적인 소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넓은 담론도 이끌어낸다. 종말론적 예언을 받아든 인간들이 남은 삶을 두고 삶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블록 우주'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과율'을 정면으로 깨부수며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떠올리게 만드는 운명론적 결말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묵직한 여운을 남다. 말초적인 장르적 재미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에 관한 철학적인 화두까지 깊이 있게 담아냈다는 점이 《시간의 끝》이 선사하는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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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 프로젝트 - 노동과 여성·청년이 만나면 세상이 바뀐다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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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습적으로 외치는 '평등'이라는 고귀한 가치는 결코 쉽게 평형을 이루는 법이 없다. 저자는 불평등 체제 속에서 평등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그 사회 구성원의 개혁 의지는 그에 한참 못 미치거나 불평등 체제를 방조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미국식 자유시장경제 모델 체제를 추구하는, 아주 모순적인 인식을 지적하며 우리가 '불평등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고, 이에 대항하는 '스웨덴식 보편복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왜 이런 모순적인 인식을 지니게 되었는지, 스웨덴식 복지국가 모델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앞으로 추구하고 행동해야 할 방향성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여러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크기와 무게, 두께를 자랑하는 《평등사회 프로젝트》를 차분히 읽어나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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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를 양산하는 불평등체제가 무너지고 평등한 세상이 올 때까지, 내 글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야 한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 낯선 그림들, 그리고 많은 통계치와 도표는 가시가 되어 독자들을 힘들게 할 수 있다. 불현듯 가시의 불편함이 되살아나면, 책을 펼쳐서 가시가 된 통계표와 그림을 찾아보고 질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주면 좋겠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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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모순적 인식을 지배하는 '불평등 이데올로기'는 "불평등은 없다"라는 제1명제, "불평등은 정당하다"라는 제2명제, "대안적 평등사회는 불가능하다"라는 제3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제1명제는 한국 사회의 '수저 계급론'으로 깨졌으나 제2명제는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상승 이동 기회가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착시를, 제3명제는 현실적으로 대안적 평등사회에 대한 경험적 증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체념의 정서를 제공하며 기득권 지배 계급의 불평등한 정당성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대안적 평등사회의 부재'는 동유럽 공산 정권의 붕괴, 국가사회주의 실패 등의 역사적 맥락에서 더 공고해지는 측면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자본과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미국식 자유시장경제 모델을 수호하고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반면 이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끌어나가는 주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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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여성·청년 동맹이 비개혁주의적 개혁 전략을 통해 포지티브섬 게임을 제도화하며 최소수혜자를 포함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상생하는 평등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이 촛불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응원봉의 성공을 실현하는 평등사회 프로젝트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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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저자는 경험적 증명을 차근차근 수행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비개혁주의적 개혁'에 관한 논지를 전개한다. 평등사회에 대한 불신을 부식시키기 위하여 불평등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이 주체적으로 사회 연대를 구축하여 그들을 구심점으로 세력화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방향은 스웨덴식 복지국가 모델을 차용하는데 '렌-마이드너 모델', 황금 삼각형 등을 여러 통계와 그래프를 통해 세세하게 살펴본다. '보편주의 복지'를 지향하는 스웨덴은 불평등 체제의 최소 수혜자들의 이익을 보편 사회 이익으로 규정하고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원칙(p.118)을 기본으로 하며 이런 원칙을 기반으로, 불평등 체제 속 노동자,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이 동맹이 되어 대항한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 중 하나인 스웨덴 사민당이 연속적으로 44년 장기 집권을 하면서 이룩해낸 복지 성과들이 곧 경험적 증거들이 되어 스웨덴의 평등사회를 이룩했다. 이 과정에서 LO(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는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하며 노사 대타협 협력 모델인 살트셰바덴 협정, 렌-마이드너 모델 도입 등 복지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이런 맥락에서 LO의 역할을 한국의 민주노총에서 발굴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를 위해 현시점 민주노총의 한계와 실패를 다시 되짚어보고 스웨덴 모델을 기준으로 미래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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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 권력이 최대수혜자의 특수이익이 아니라 최소수혜자까지 포용하는 보편 사회이익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p.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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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노동 계급은 계급 형성에 실패했고 정치세력화에도 실패했다. 노동자 내부 임금 격차와 계급 분절, 낮은 조합 조직률, 소극적 이데올로기 주체 역할, 노동조합의 비정규직 문제 외면, 대기업·정규직 이기주의 등 기득권 특수 이익에 매몰되어 있는 한계를 지적하고 주류 세력(남성·정규직)이 아직도 가부장적 질서를 탈피하지 못하며 여성과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을 소외시키며 스스로 신뢰를 저버리고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시민 사회에서도 극단적인 비호감 정서를 고취시키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처럼 특정 기득권만을 위한 이익집단화 현상을 탈피하고 광장으로 나와 여성, 청년, 비정규직 등과 같은 소외 계층과 동맹을 형성하여 세력화하고 평등사회를 위한 보편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대항 이데올로기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한다.







 특히 여성 성차별 문제에 대한 남녀 간의 인식 차이는 현 사회의 젠더 갈등을 대변하듯 심각한데 성별 격차에 대한 인식 수준은 한국 여성의 경우 세계 여성 평균과 거의 같은 수준이지만 한국 남성의 성별 격차에 대한 평가는 서구 남성보다 더 긍정적(p.457)이라는 점은 그 인식 격차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으로 여성의 급격한 의식화 진전 현상과 반대로 페미니즘 백래시, 안티 페미니즘으로 인한 남성의 성평등 인식 퇴행 양상은 그 간극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할수록 성 불평등 또한 심화하는 상관관계를 지적하며 성평등 복지 국가 건설이 평등사회에 필수불가결한 의제임을 설파하는데 이는 불평등 지배 세력이 자원, 권력, 이데올로기까지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재생산되기 때문에 성평등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 불평등도 함께 해소해야(p.469)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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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은 경제적 불평등과 성 불평등에 대한 비판 의식과 불만이 강하기 때문에, 평등사회 대안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면 복지국가 건설의 지지 의견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 성 불평등 지배 질서에 대한 불신이 대항 세력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으로 대체되어야, 성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성평등 실현을 위한 긍정적 분노로 전환될 수 있다. p.521 







 저자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서 '불평등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노동과 여성, 청년이 동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평등 체제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이 결합하여 구조적 불평등을 깨부수고, 세력화하여 하나의 주류가 되어 개혁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스웨덴이라는 평등사회의 이상향을 톺아보며 역설적으로 한국의 현 사회가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는데 그래도 저자는 지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응원봉의 향연을 경험적 희망으로 이야기한다. 광장에 모인 2030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연대하는 방식, 다종다양한 차별의 언어와 단호하게 일별하며 보다 더 진일보한 사회를 갈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논의의 종결이 아니라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을 따라 노동자이자, 여성이자, 청년인 스스로도 '평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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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
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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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탕후루는 한바탕 대유행을 겪었고 마라탕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외식 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로 개사한 노래를 부르는 과격한 혐중 시위가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양가적인 현상이야말로 중국을 대하는 우리의 혼란한 인식과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와중에 세계정세는 미국 패권이 스러져가며 새로운 다극 체제로 입성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의 존재감은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인식의 필요성을 바탕으로 《중국이라는 역설》을 통해 중국에 대한 낡은 인식을 타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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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중국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첨단 기술 산업 분야에서의 대약진이다. '딥시크 쇼크'나 휴머노이드 관련 기술, 세계 최대 규모의 전기차 판매량 등과 같이 '아니, 어느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첨단 기술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중국 고립화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중앙 정부, 즉 국가의 강력한 주도 아래 기술 개발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기에 가능한 결과였고 경제 보다 안보에 가중치를 두면서 군산복합체제를 꾀하며 국력 또한 최대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막강한 1인 체제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숙청과 사회 감시망을 통한 통제는 계속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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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불균형 성장의 문제는 중국 지도부도 잘 알고 있겠지만, 첨단 기술 대약진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미국과의 장기적 대결이라는 대전략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선을 바꿀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기술 자립을 해내지 않으면 미국과의 대결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중요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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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2000년대 중반부터 구역을 나눠서 고용한 정보원들이 이웃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는, 노동집약적인 '격자망 감시 체제'(p.36)는 기술 감시의 사각지대까지 틈새 없이 통제하겠다는 1인 체제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청년 실업 문제나 소득 양극화 문제는 여지없이 곪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불만은 강력한 통제 아래서도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익명의 인터뷰이들을 통해, 감시와 억압을 피해 일본으로 향한 망명한 중국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공고한 1인 체제, 억압적인 사회 감시 체제가 전복 없이 계속해서 지속되는 까닭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이에 대항해야 한다는, 거국적인 대의명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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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 권력은 절대적이지만, 너무 강력한 권력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모순적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궈광 스탠포드대 선임연구원은 '독재자의 딜레마'가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최고지도자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끝없이 숙청을 단행하고, 숙청할수록 권력은 강화되지만 진실을 직언하려는 이들은 사라지며, 그럴수록 최고지도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져 통치 위기가 점차 심화한다는 것이다.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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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끄러운 속 사정에도 대외적으로 중국은 트럼프 1기 정권을 반면교사 삼아 몹시 영리하게 대처하고 심지어 지금은 미국보다 외교적 우위를 선점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듯싶다. 미국·이란 전쟁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주는 중국의 외교적 역할과 위상, 미국과 대만 해협을 두고 벌이는 외교 협상 능력, 미국의 동맹국과 우방국의 디커플링 틈새를 파고들어 자신들의 파이를 넓히는 역량 등을 다각도에서 세세히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이런 복잡하고 혼란한 세계정세에서, 패권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기울어가는 이 기류에서 어떤 태세를 갖추어야 하는가.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중국의 새로운 역사 만들기의 배경에는 중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만들기가 있다. 오병수 동국대학교 연구교수는 이런 변화를 역사 교육 차원만이 아니라 강대국으로서 부상한 중국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제국적 인식으로 바꿔 나가려는 국가 전략의 변화, '제국의 재구성 과정'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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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점점 사회 문제로 두드러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혐오 정서에 대한 우려를 빼놓을 수가 없다. 시류와 상대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혐오 정서를 바탕으로 이념 논쟁에만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과거 동북공정과 같은 중국의 역사 왜곡은 현재 패권 질서의 알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 동아시아 질서 또한 재편하고자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제국주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복잡한 위치에 놓여있는 한국은 더욱 그래야 할 텐데 '중국'이라는 영점을 바로 맞추고 나아가야 할 방향의 나침반을 잘 가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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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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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새 나는 양장본,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인비인'이라는 제목, 《혼모노》로 40만 독자를 사로잡았다는 작가의 명성보다도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기담집'이라는 타이틀. 괴담과 기담을 넘나들며 기묘한 이야기라면 쉽게 사로잡히고 마는지라 도착한 책을 집어 들고 다소 게걸스럽게 (…) 읽었다. 보통 이 분야의 강자인 일본 장르 문학 속 기담 혹은 괴담에서는, 으레 등장하곤 하는 유령이나 귀신, 기이한 존재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대하곤 하는데 《인비인》은 그 관성적인 기대를 다소 우회한다. '인간 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는 공포류의 오랜 명제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인간 아닌 인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괴수나 AI일 수도 있고 귀신 혹은 신일 수도 있지만, 인간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p.51, <인비인> 작가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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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아홉 편의 이야기가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세 가지 챕터로 세 편씩 묶여있다. '어제'는 친일을 도모했던 자들의 이야기, '오늘'은 현재에서 소외 당한 자들의 이야기, '내일'은 이미 도래한 혹은 도래할 AI 인공지능과 관련한 이야기로 다소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다. 각 챕터마다 제공되는 작가의 플레이리스트를 큐알 코드로 함께 하면서 읽는 동시에 듣는, 감각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각 단편마다 작가의 해설이 함께 있기에 작가의 집필 의도나 작품의 의의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기담이 현상에 대한 해설과 해석이 생략된 채, 불가해한 영역을 남기며 불쾌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런 맥락에서 《인비인》은 명확하기 때문에 쾌청하다. 물론 작품의 내용 자체는 그렇지 아니하지만….







 어떤 작품이 가장 기묘하느냐고 묻는다면 표제작인 <인비인人非人>을 꼽을 수밖에. 일제강점기 시대, 731부대의 생체 실험에 관한 내용으로 '가타마리(덩어리)'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묘사되는 그 물리적 실체도 끔찍하게 느껴지거니와 그 존재가 잉태된 상태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과 말끔하게 소거된 인간성을 목도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무력함이 불쾌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친다(p.48)'며 원고를 파쇄기에 넣어버리는 무감한 화자의 역사적 인식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비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요시무라 히사토와 이시이 시로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다는 작가 해설을 읽고 나면 역시 현실보다 더한 공포는 없지 않을까 싶어진다. 가타마리는 인비인의 가시적인 무엇일 뿐, 인비인은 행한 자와 무감한 자들 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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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비인>이 내용 그 자체가 기묘했다면 작품을 읽고 생겨난 마음이 기묘했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작품은 <아미고>. '내일' 챕터에 속해 있는 <아미고>에 등장하는 피지컬 AI, 즉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내용이 그렇다. <아미고>에서는 스턴트맨인 주인공을 대신하여 '야키마 H1'이 다분히 '인간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언캐니'한 정서가 다소 복잡한 마음을 일게 한다. '당신은 무사할 거예요, 아미고.(p.216)'라고 말하던 야키마 H1의 묘한 대사를 곱씹으며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던 비인간적인 존재 '아미고'가 인간을 향해 행한 숭고한 희생정신을 두고 '인간성'이란 대체 무엇인지, 인간에게만 국한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연 본질적으로 인비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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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 

 p.229 <아미고> 






 어설프게 닮으면 불쾌하고, 보다 우월하면 경이롭지만, 구별되지 않으면 공포스러워진다. 

 p.280 <고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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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아닌 인간. '인비인'의 의미를 내내 생각해 본다. 결국 '인간'에 대한 정의를 뒤흔들게 만들고야 만다. 자세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오늘' 파트에서 다루는 인간 또한 도구적으로 소비되거나 쉽게 대체되고 현재에서의 존재성이 얄팍하다.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기준점으로서의 인간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생각보다 빈번하고 쉽게 무너진다.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아닐 텐데 그럼에도 끝까지 '인간'이 붙는 '인비인'이라는 단어가 건조하고 불쾌한 농담처럼 들린다. '인간이 아닌' 것까지 결국 인간이 되고 말아버리는, 인간에 대한 서늘하고 불쾌하며 기묘한 한 권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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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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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것은 대체로 어렵고 쓰는 것은 항상 어렵다. 해설도 아니고 분석도 아니고 그저 감상을 나열할 뿐인데도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것부터 일단은 말이 되는 문장을 만드는 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매가리 없는 문장을 지탱하는 행간에는 그런 과거의 분쇄된 좌절의 파편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를 균열내기》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이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 내는 것. 적극적으로 파괴하고 해체하며 붕괴한다.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축적하며 균열의 틈새를 거침없이 파헤치며 또 다른 무엇을 세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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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힌 모서리를 펼치면 무엇이 될까.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나를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이 표면을 부순다면.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이 막을 내리찍을 수 있다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p.6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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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아니 에르노, 밀란 쿤데라, 가엘 파유, 조르주 페렉, 엘렌 식수, 카미유 로랑스….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가들의 작품과 삶을 넘나든다. 그들이 응시하고자 했던 시선을 따라 당도한 소실점 끝에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들, 그 시선이 훑어가는 일련의 풍경이자 과정 속에서 독자는 스스로를 해체하고 붕괴하기도 하며 새로운 본질을 탐구해 보는 것이다. 마치,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야 한다는 《데미안》의 어느 구절처럼,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야 하는 도끼를 말했던 카프카의 명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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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문학에서 우리가 얻으려 기대하는 무엇의 이면, 그 그림자 속에서, 아니 그 그림자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져 탐험하는 것만 같다. 또렷한 결괏값이 아닌 그 과정에서 감각하고 체득하는 것. 일상, 권태, 무력, 무감, 체념 등과 같은 감각을 끊임없이 깨부수고 균열을 만들어내며 존재를 끊임없이 추동하게 만드는 문학이라는 여정을 밀도 있게 써 내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고 아담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손에 든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까닭일 것. 저자는 프랑스 문학을 통해 묵직하고 농밀한 사유와 통찰을 예리하게 벼리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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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삶이란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축적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투명한 거울이 세상을 온전히 비추듯, 비워진 영혼만이 타인의 슬픔과 세계의 기쁨을 가감 없이 받아낼 수 있으리라. p.56 나로부터 가장 먼 곳, 장 그르니에 






 그 와중에 특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은 인상적이다. '부조리'라는 키워드로 카뮈의 삶과 작품을 톺아보는 동시에 다른 주제 아래 묶인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은 살해당한 아랍인을 조명하면서 카뮈의 세계를 다시 균열시켜 새로운 세계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이 내게는 몹시 강렬했다. 또 가엘 파유를 형성하는 정체성과 그가 비극을 문학으로 증언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참사를 기억하는 것에 의의를 짚어보는 내용 또한 무감해지는 감각에 파동을 일으키며 잔상을 오래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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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리마니의 불은 세계의 어둠을 가차 없이 비추고, 그 안에는 솔직한 만큼 폭력적인 진실이 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문명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이중적 선물이었듯, 슬리마니의 불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한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이 불을 가져가겠는가. p.131 불을 가져가는 여자, 레일라 슬리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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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이자 번역가인 저자는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의 활자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의 삶 또한 저자만의 사유와 통찰을 거쳐 번역을 이루어낸다. 문학이라는 여정을 통해 우리는 비워지고, 부서지고, 깨지면서 자아의 본질에 다가간다. 《나를 균열내기》를 곁에 두고 언급된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싶어진다. 과연 나를 균열하게 만드는 작품과 그 지점은 어디일까. 그 균열은 고통일까, 아니면 환희로 가득 찰까. 문학의 정수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균열의 과정을 담금질처럼 반복하며 가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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