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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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것은 대체로 어렵고 쓰는 것은 항상 어렵다. 해설도 아니고 분석도 아니고 그저 감상을 나열할 뿐인데도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것부터 일단은 말이 되는 문장을 만드는 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매가리 없는 문장을 지탱하는 행간에는 그런 과거의 분쇄된 좌절의 파편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를 균열내기》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이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 내는 것. 적극적으로 파괴하고 해체하며 붕괴한다.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축적하며 균열의 틈새를 거침없이 파헤치며 또 다른 무엇을 세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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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힌 모서리를 펼치면 무엇이 될까.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나를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이 표면을 부순다면.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이 막을 내리찍을 수 있다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p.6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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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아니 에르노, 밀란 쿤데라, 가엘 파유, 조르주 페렉, 엘렌 식수, 카미유 로랑스….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가들의 작품과 삶을 넘나든다. 그들이 응시하고자 했던 시선을 따라 당도한 소실점 끝에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들, 그 시선이 훑어가는 일련의 풍경이자 과정 속에서 독자는 스스로를 해체하고 붕괴하기도 하며 새로운 본질을 탐구해 보는 것이다. 마치,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야 한다는 《데미안》의 어느 구절처럼,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야 하는 도끼를 말했던 카프카의 명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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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문학에서 우리가 얻으려 기대하는 무엇의 이면, 그 그림자 속에서, 아니 그 그림자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져 탐험하는 것만 같다. 또렷한 결괏값이 아닌 그 과정에서 감각하고 체득하는 것. 일상, 권태, 무력, 무감, 체념 등과 같은 감각을 끊임없이 깨부수고 균열을 만들어내며 존재를 끊임없이 추동하게 만드는 문학이라는 여정을 밀도 있게 써 내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고 아담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손에 든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까닭일 것. 저자는 프랑스 문학을 통해 묵직하고 농밀한 사유와 통찰을 예리하게 벼리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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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삶이란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축적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투명한 거울이 세상을 온전히 비추듯, 비워진 영혼만이 타인의 슬픔과 세계의 기쁨을 가감 없이 받아낼 수 있으리라. p.56 나로부터 가장 먼 곳, 장 그르니에 






 그 와중에 특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은 인상적이다. '부조리'라는 키워드로 카뮈의 삶과 작품을 톺아보는 동시에 다른 주제 아래 묶인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은 살해당한 아랍인을 조명하면서 카뮈의 세계를 다시 균열시켜 새로운 세계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이 내게는 몹시 강렬했다. 또 가엘 파유를 형성하는 정체성과 그가 비극을 문학으로 증언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참사를 기억하는 것에 의의를 짚어보는 내용 또한 무감해지는 감각에 파동을 일으키며 잔상을 오래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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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리마니의 불은 세계의 어둠을 가차 없이 비추고, 그 안에는 솔직한 만큼 폭력적인 진실이 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문명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이중적 선물이었듯, 슬리마니의 불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한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이 불을 가져가겠는가. p.131 불을 가져가는 여자, 레일라 슬리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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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이자 번역가인 저자는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의 활자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의 삶 또한 저자만의 사유와 통찰을 거쳐 번역을 이루어낸다. 문학이라는 여정을 통해 우리는 비워지고, 부서지고, 깨지면서 자아의 본질에 다가간다. 《나를 균열내기》를 곁에 두고 언급된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싶어진다. 과연 나를 균열하게 만드는 작품과 그 지점은 어디일까. 그 균열은 고통일까, 아니면 환희로 가득 찰까. 문학의 정수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균열의 과정을 담금질처럼 반복하며 가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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