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025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 수상작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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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평소의 관심사에서는 다소 먼 분야의 책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죽은 다음》의 신간 소개 글을 읽고는 다소 망설여지는 마음이 든 것이 솔직한 속내다. 더구나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 핍진한 현장 속에서 쓰여졌기에 더욱 마주하기가 망설여졌다. 필연적으로 몇 해 전에 겪은 개인적인 경험을 다시 상기시킬 것이고 나는 아직도 그 경험을 복기하며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망설임 속에서, 유난히 선택의 여지가 많았던 5월의 신간들 속에서,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주해보기를, 읽어보기를 선택했다.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있나? 없다. 죽음을 생각하면 막연하고 두렵고 불안하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으로 미루어 생각하고 싶은 것, 나에게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막연한 공포. 그런데 죽음의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가 성실하고도 담담하게 죽음과 애도를 기록한 작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고찰은 죽음 자체에 대한 나의 인식을 통째로 흔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일련의 취재에 앞서 저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관음'의 시선을 배제하고자 300시간의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장례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직접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이런 과정 속, 장례 노동 현장에서 만나는 장례 지도사, 의전 관리사, 수의 제작자, 선소리꾼, 화장 기사 등 각 분야의 전문 노동자를 만나며 그들 각자가 생각하는 장례 의식을 비롯해 죽음과 애도에 관해 묻는다.



'없다'와 '있었다' 사이의 시차와 간극을 메우는 것이 우리의 슬픔이라고 했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그 슬픔은 어떤 모습인가요? 틈새를 메워야 할 슬픔의 모양을 알 수 없어 내게 죽음이란 슬퍼하기도 어려운, 보이지 않는 도돌이표 같았다. p.14




각 장은 장례 의식의 순서대로 흘러간다. 염습을 하는 과정을 지나 입관을 하고 빈소가 마련되며 문상객을 맞는다. 발인의 과정을 거쳐 승화원까지, 그리고 이어지는 애도의 시간들. 각 과정에서 일하고 있는 장례 노동자들을 차례차례 만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각 과정에서 만나는 장례 노동자들의 업에 대한 생각과 고인을 대하는 태도를 목도하며 읽으면서는 사뭇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런 반면에 직업인으로써 애환과 업계의 비위, 장례 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 수준, 업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차별 등에 대해서도 다루며, 장례업과 장례 노동자를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여러 시선을 제시하는 점도 르포로써 참 꼼꼼한 기록이 아닐 수가 없다.






특히 장례 의식 전체에서 여성이라는 지위가 가지는 차별적인 요소들을 곳곳에서 톺아보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장례식에서의 상주는 반드시 장자여야 한다. 이는 장례식이 가주의 승계라는 정식적인 절차의 과정으로 작동하면서 고착화된 뿌리 깊은 차별의 관습이다. 장례의 여러 과정에서 여성인 사별자는 배제된다. 이러한 반면에 연도라는 섬에서 여성이 장례의 주체가 되어 상여도 메고, 소리꾼도 되어, 배를 타며 장례를 주도하는 예시는 과연 장례라는 의식에서, 소중한 이를 애도하는 자리에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구분과 차별은 너무나 소모적인 논쟁이자 근거 없는 차별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반증이 되어준다. 장례 의식 안에서 여성차별은 장례 의식 밖에서 노동자로 존재하는 여성에게도 피해 갈 수 없는 멍에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20년 경력의 여성 장례 지도사인 이안나 씨와 화장기사 이해루 씨의 기록은 장례업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써의 부침이 아니라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확고한 직업의식을 가진 노동자로서의 기록으로 읽힌다.



장례지도사였던 시절 이해루는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으로 인해 정작 가족끼리 주고받지 못하는 위로를 대신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유족의 자리에 서자, 이별과 애도는 타인이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로 그는 한편에 비켜선 사람이 되고자 했다. p.158





책을 따라가는 과정 내내 개인적인 장례식의 경험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 그다음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선택과 결제로 분절되어 있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정신없이 휘몰아친다고 해야 하나, 지나고 나서 떠올려봐도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고인을 덮기 위한 천, 안치실까지 이동하는 노동력과 안치실 이용료의 결제부터 시작이었다. 빈소가 차려지고 예상 조문객의 식사량, 술, 음료, 제사 음식, 일회용 그릇과 수저, 꽃…. 장지까지 이동하는 운구차 기사의 수고비는 따로 챙겨야 했다. 다양한 유골함이 가격대별로 정돈된 팸플릿이 눈앞에 내밀어지며, 조심스럽게 선택을 권유받는 순간에는 잠시 아찔해졌다. '아, 장례식이 이런 것이었나?' 아직도 장례식을 잘 치른 것인지, 잘 애도한 것인지 모르겠다.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p.233


입관을 하는 과정에서 담당 장례 지도사님이 마지막으로 고인께 못다 한 말을 전하라는 권유를 했다. 모두 쭈뼛거리며 망설이자 장례 지도사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꼭 하셨으면 좋겠다고, 안 하시는 분들이 나중에 후회하는 모습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낯가리셔도 한 마디라도 하셨으면 좋겠다고. 그제야 모두 돌아가면서 못다 한 말을 소리 내어 말했다. 입관을 끝내고 나와 주차장에서 오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정신없이 흘러가던 장례의 과정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토해낼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장례식이라는 선택과 결제의 과정에서 애도의 자리는 이리도 빈약했음을 책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마주할 용기를 애써 꺼내야 할 만큼 나의 애도는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한 것이다.


…장례식은 우아할 수 없고 마음껏 슬퍼만 할 수도 없는 자리이다. 그렇지만 슬퍼하는 것만이 떠나는 이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당신이 골치 아프게 판단하고 계산하는 그 일이, 그를 떠나보내는 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이 그에게 보내는 최선의 애정이라고. p.90





철저히 자본화되고 분업화되는 장례식에서 진정한 애도의 자리는 요원해졌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 안에서 여러 대안 장례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종 뉴스로 이슈화되는 생전 장례식의 사례와 공동체 장례식의 본질적인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협동조합 형태의 장례식, 복지 형태로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장례식,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존엄의 형태로서의 공영 장례식,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이루어지는 여러 형태의 장례식…. 본질은 진정한 애도에 있다. 형식과 체면, 혹은 무용한 법 앞에서 좌절되는 애도의 여러 사례 제시와 함께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장례 업계의 특성과 장례 노동자, 사별자, 무연고라는 낙인의 맹점, 자본화 과정에서 소외되는 애도…. 미처 언급하지 못한 죽음과 애도에 대한 저자의 방대한 사유와 성실한 기록과 더불어 세심한 시선에서 때로는 사고의 확장을, 때로는 의도치 않은 위로를 얻기도 했다.



확실히 처음 언급했던 마음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책을 덮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파도처럼 갑자기 기억과 감정이 덮쳐와 어딘가를 울렁이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반면에 막연한 공포로 치환되던 죽음이라는 개념이 이제는 조금 마주할 정도의 용기만큼 실재적인 개념으로 다가왔다. 몇 해가 지나도 이와 비슷한 결의 주제와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은 진정한 애도가 존재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음을 책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는다. 애도의 방식으로써 여러 대안의 장례 형태가 제시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 확실해진 것은 어떤 죽음이라도 애도라는 시간과 정서가 유예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가 책장에서 눈에 띈다. 이제 나도 작가의 방대한 사유와 고찰에 빚을 지고 나만의 사유를 시작해야 할 시간인 것 같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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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 - 건설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 삶, 투쟁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외 기획, 이은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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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었다. 아마도 연차와 여러 휴무들을 살뜰하게 묶은 행복한 연휴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근로자의 날'은 나에게 '유급 휴일' 정도의 가벼운 의미였다.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하고, 잠을 푹 자기도 하고, 미뤄두었던 책들을 읽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온한 휴일이었다. 그런 연휴에 시의적절한 마음으로 집어 든 한겨레의 이번 달 신간은 바로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였다. 이 책은 양희동 열사 2주기를 기리기 위해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과 경남도민일보가 기획한 건설업 노동자들의 노동과 삶 그리고 투쟁에 관한 구술 기록이다.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구술 기록이라서 그런지, 핍진한 현실의 서사이기 때문인지, 마치 얼굴을 면하고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노가다'는 일본어인 '도가타'에서 변형되어 '행동과 성칠이 거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건설업 노동자를 비하하는 멸칭이다. 비난과 혐오, 차별, 희화화의 과정에서 굉장히 뿌리 깊게 사회 속에 박힌 차별적인 언어다. 이런 '노가다'라는 멸칭에 결박되어 있던 '건설 노동자'들이 직접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 한 켠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여러 건설 노동자들의 인생은 각각의 희로애락이 있었지만 모두 인생이라는 터전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그 거친 삶의 터전에서 생을 일구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러 직업에서 좌절을 겪다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먹고 살려야 할 가족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건설업에 뛰어든 것이다. 여타 직군의 노동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는 거죠. 진짜 힘들어서 혼자 노래방 가서 1시간 동안 노래 틀어놓고 울다 나온 적도 있어요.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런다고 내 마음 알아줄 사람도 없고, 어차피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내 삶이니까요. 한 5년에 한 번은 그랬던 거 같아요. p.57


특히 여성 건설 노동자이면서 세 아이의 어머니인 이도연 씨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건설업에서 철근 노동자로 20여 년을 근무해왔다. 처우가 좋지 않은 건설업에서 여성이라는 한계를 매 순간 뛰어넘은 그녀의 위와 같은 고백을 읽으며 먹먹해진다.



건설 업계 노동자의 처우가 다른 업계의 노동자들보다 열악하다는 현실은 막연하게나마 알고는 있었는데, 현장의 노동자들을 통해서 직접 듣는 현실은 더욱 핍진하다. 먼저 임금 체불의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임금 체불 비율 보다 현저히 높고, 마치 업계의 관례라도 되는 양 모든 건설 노동자들이 꽤 자주 임금 체불을 겪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공정마다 하청으로, 팀 단위로 계약을 수주하는 업계의 특성상 팀장이 그 밀린 몫을 빚으로 충당해서 팀원들에게 지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동청에 신고를 해도 과정과 기간이 복잡하고, 원청과 하청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그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애먼 노동자들만 생계에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아직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이었다.


임금 체불이나 산재는 건설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잖아요. 그걸 해결하려고 노조가 투쟁한 것인데도 외려 불법 단체니, 공갈 협박이니 하며 죄를 뒤집어씌우고 구속시킵니다. 정작 돈 안 준 건설사는 조사도 안 합니다. 건설 현장 체불 금액이 1조 1400억 원으로 나오던데 말입니다. p.262


이런 임금 체불뿐만 아니라 노동 환경의 복지 수준도 형편이 없을 정도로 느껴지는데, 읽다 보면 그들의 요구는 편리 수준의 복지가 아닌 생존에 필수적인 보편타당한 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위험천만한 공사 현장에서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의 부재라든가, 노동 현장 밖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화장실의 설치 문제나 혹서기의 파라솔 같은 그늘막 설치 및 얼음물 구비 요구는 반대로 얼마나 건설 노동 현장이 열악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법정 휴게 시간이나 초과 근로 수당같이 법으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도 역시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이렇게 노동자를 배제한 노동 환경은 결국 최종 소비자에게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지, 우리는 부실시공으로 무너지는 건물이나 인분이 발견된 신축 아파트 등의 기사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무도한 업계 현장에서 건설 노동자들은 서로 연대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하기 시작한다. 각 공정 단위마다, 각 지역마다 노조를 만들고 노조 지부들끼리 연합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노동 환경 처우 개선이나 체불 임금 지불을 위한 공동 행동이나 투쟁을 하기도 하고, 매년 사측과 임금 협상을 위한 노력을 하며 건설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복지 향상을 위해 힘써왔다. 책에서 건설 노동자들은 그동안 현장에서 일하면서 본인과 동료들이 직접 겪은 불법적인 근로 조건, 비인간적인 대우 그리고 스러져간 생명들을 목도하며 개인적인 투쟁의 한계를 느꼈고 비로소 연대라는 희망의 답이 노조였다고 말한다. 노조와 연대하는 투쟁은 그들에게 마땅한 권리와 함께 저녁과 휴일이 있는 삶, 가족이 있는 삶을 되찾아주었고 이런 과정과 함께 직접적으로 개선되어가는 현장 상황은 노동의 효능감과 함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23년 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건설 노동자들을 '건폭(건설 노동자+조폭)'이라는 멸칭으로 매도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무너졌다. 정당한 파업과 공동 행동, 임금 협상은 '공동 공갈, 업무 방해'라는 혐의로 덧씌워져 노조 인원 2000여 명을 소환하여 조사하고 40여 명을 구속시키기에 이른다. 정부의 각 행정처를 비롯해 경찰과 검찰은 무자비하게 수사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원 다수의 증언에 의하면 굉장히 비상식적인 수사 방식이었다고 한다. 노동법에 무지하고 1계급 특진에 혈안이 된 경찰은 실제로 혐의가 없는 사건을 답이 정해진 듯 강압적으로 수사하거나 특정한 답을 유도할 요량으로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윤석열의 건폭 몰이에 23년 5월 1일 노동절에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지부 간부 양희동 열사가 분신을 시도했고, 결국 안타깝게 세상을 지셨다. 이후에도 건설 노조의 투쟁은 계속되었으나 정부와 검찰, 경찰 그리고 언론은 건설 노조를 더욱 '건폭'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조를 탈퇴하는 조원들이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노조의 힘이 약해졌다. 윤석열 정부의 무도한 탄압을 뒷배로 건설사 원청들은 노조와 대면하는 것조차 거부하면서 건설 노동계는 과거로 퇴보했고 그 여파는 25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지금 범국민적으로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언론에서 보도하니까, 무슨 말을 외쳐도 다 알아요. 피켓에 짤막하게 적어놔도 뭐 때문에 그랬는지 다 떠올라요. 그런데 건설 현장에서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면 도대체 어떤 대우를 받길래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건설 노동자가 공안탄압을 받아 구속됐다고 하면 "그럴 만한 죄를 지었겠지" 합니다. 왜 우리가 구속됐는지, 수사가 얼마나 부당했는지 관게자들 외에는 모릅니다. 심지어 같은 조합원도 몰라요. p.282


이러한 탄압에서 자신들이 겪은 고초를 서술해나가는 건설 노동자들의 일화들을 읽다 보면 우리가 마땅하고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누군가의 희생과 투쟁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아들과 같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마주친 김중근 씨의 소회는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동안 그들이 투쟁해서 쟁취한 모든 것들이 무위로 돌아간 것에 대한 무기력과 건폭 몰이에 대한 분노를 함께 느끼면서도 그들의 선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의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놓지 않는 것에 작은 응원을 보내게 된다. 




책에서 건설 노동자들의 노동과 삶과 투쟁을 읽다 보면 농도 짙은 생의 애환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 '노가다'를 '막일꾼'으로 고쳐 쓰라는 국어사전의 권고도 또 다른 차별처럼 느껴진다. 건설 노동은 '막일'이 아니라 엄연한 기술을 가지고 수년의 숙련 기간을 거친 하나의 직업군인 것이다. 건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받는 모멸적인 인식 수준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땀 흘린 만큼 번다는 정직함과 성실함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부당한 하도급 구조나 열악한 건설 노동 환경, 관련 노동법 등의 개선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건설 노동자에게 찍은 모멸적인 낙인의 시선의 변화가 급선무로 필요하다.



'행동과 성칠이 거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노가다'로 그들이 불렸던 까닭은,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우의 건설업에서 '노동자'로써 당연한 권리, '인간'으로써 생명을 보장받을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투쟁마저 비하할 의도로 견고하고도 거대한 프레임이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의 왜 집회를 열고, 소리 높여 투쟁하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봐주길 바라는 책 속, 건설 노동자들의 당부와 요청이 부디 많은 이에게, 결국은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에게 멀리 가 닿아 들렸으면 좋겠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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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AI 시대를 산다면 - 2500년을 초월하는 논어 속 빛나는 가르침
김준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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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논어》는 여러 방면에서 추천을 많이 받는 책이기도 하고, 시중에 다양한 주제로 묶여 자기 계발서로도 많이 찾아볼 수 있기에, 비록 제대로 읽은 적은 없지만 나름 익숙하다고 느껴진다. AI도 역시 그러한데, 여러 매체에서 그 이슈를 다루는 터라 역시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챗지피티를 크게 활용해서 사용해 본 적은 없다. 한번은 지인이 챗지피티를 활용한 여러 내용을 공유해 준 적이 있었다.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 재고를 입력한 후 이에 걸맞은 다이어트 식단을 설계하거나, 직장에서 업무적인 관계에 대한 애로 사항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건설적인 해결 방안을 설계해 준다. 또 재미로 AI에게 여러 가지를 시키는 와중에 사주팔자와 현재 커리어를 입력해서 직업군을 추천해 주고 비전까지 제시해 주는 것을 보며, 이 과정에서 과연 몇 가지의 직업군이 무용해졌는지를 가늠해 보다가 서늘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공자와 AI. 참 낯설고 생경한 조합이다. 공자와 AI 사이에 어마어마한 시대적 간극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공자의 시대와 AI의 시대의 배경이 지닌 공통점을 답의 근거로 삼는다. 철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비약적으로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이 필요했으나 문명의 전환을 아우르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며 시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공자와 같은 성인군자의 가르침을 필요로 했고, AI의 등장으로 또다시 문명의 전환기에 이른 현시점에서, 다시 공자의 말씀에서 그 답을 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p.5) 그야말로 온고지신의 정신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고, 인간이 어떻게 존재 가치를 찾아야 할지를 논의해야 할 때인 겁니다. 무엇이 사람다움인가, 어떻게 사람다움을 가꿔 갈 것인가를 묻는 공자의 질문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는 지금의 우리에게 훌륭한 기출 문제집이자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p.8


AI 시대에 AI와 가장 구별되는 특성인,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성'을 인, 의,禮,의 순서대로 '사람', '올바름', '관계', '배움'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나누어 AI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살펴본다. 다섯 부 아래, 여러 작은 꼭지들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매일매일 짧게 끊어 읽기에도 좋다. 마치 격언집이나 잠언집처럼 여러모로 일상에 적용하기 좋은 내용과 구성이다.





사람

1부에서 인간의 정의에 관한 화두를 던지면서 AI와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성을 서술해 간다. AI와 인간의 정의가 모호해지는 순간에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특성은 무엇일까. 공감하는 능력, 손익에 근거하지 않는 도덕적 판단으로 인한 희생, 스스로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 등을 공자의 말을 빌려 해석한다. 1부의 화두를 생각하면서 그간 읽거나 보고 들은 SF 작품들이 생각났다.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은 윤리적인 딜레마를 건드리며 갈등을 일으킨다.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이나 지넷 윈터슨의 《프랭키스슈타인》에서 등장하는 인공지능들은 감정을 지니거나 인간의 뇌가 데이터로 존재하는 포스트 휴먼의 개념을 다루는데, 공자가 말하는 인간성을 대입해 보며 나름의 기준을 가늠해 보는, 나름의 생산적인 계기가 되기도….



올바름

2부에서는 '의'를 주제로 '인'을 실천하기 위한 기준으로써 '의'를 살펴본다. 의의 개념을 크고 넓게 '기준, 근본'으로 해석하고,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 선과 악, 옳고 그름에 관해 나름의 기준을 고찰하는 계기가 된다. 기준은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를 수 있으나, 그것을 관통하는 본질은 의로워야 하고 그 기준이 의로운지에 대한 고민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기준은 AI를 만드는 개발자들에게 특히 강조해야 할 점으로 느껴진다. 이런 고기능을 가진 프로그램들이 개발되면서 당면하는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개발자들부터 치열하게 고민해야 이를 이용하는 이용자들 또한 기준점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관계

3부는 '예'의 관하여. 공자는 '관계'를 중요시한 만큼 '예'의 필요성도 중요시했다고 한다. 예 하늘의 이치를 인간 세상에 구현한 것으로, 도덕적 이상 사회 건설의 기초로써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갖추어야 할 태도로 해석한다. 3부는 저자가 밝히기를 AI 시대의 논어를 읽는 방향성에서 잠시 벗어나 시대를 관통하는 관계의 원리를 소개하는데 이런 관계의 원리는 인간 대 인간에서 확장시켜 인간 대 비인간인 AI와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람을 중용할 때, 그를 중용하는 자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그 관계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AI를 이용하는 자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그 가능성과 활용도의 차이가 나는 것과 비슷하다. AI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공자의 덕목을 깨달아 갈 수 있다.



배움

4부는 '지'를 이해하며, 이를 AI 활용에 적용하는 법을 살펴본다. 일단 '지'는 곧 '배움'으로 해석하며, 평생직장이 사라진 다단계의 삶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배움이 아닌, 내 삶과 인생에 적용 가능한 진정한 배움의 의미를 설명하며 이러한 배움의 태도는 AI를 만나며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정보의 취득이 빨라지고, 그 양이 방대해진 까닭에 우리는 그 정보와 지식이 올바른지에 대해 분석하는 안목을 키우고, 그 정보와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고 적용할지에 대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또, 이러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챗지피티와 같은 AI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문해력에 대한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부는 인, 의,禮, 외에도 삶을 아우르는 공자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도록, 공자의 격언을 삶에 적용시킨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5부에서는 전체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책을 쭉 읽으며 마지막 5부까지 도달하면 공자의 격언들이 어렵거나,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에게 들어온, 좋은 의미로의 훈계나 격언 같은 느낌이 든다. 종종 인류애가 실종되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인간의 온당한 도리를 공자의 격언으로 다시 끔 상기시켜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AI 시대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를 공자의 언어를 빌려 톺아보는 책의 전체적인 방향성이 완만하고도 느슨해서 꼭 AI와 결부되지 않고, 현재 우리의 전체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을 더욱 확장해서 읽을 수 있게 만든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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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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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기원은 신묘한 전설처럼 시작된다. 아주 멀고도 먼 옛날, 백호의 눈병을 치료해 준 인간이 있었다. 이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백호는 자신의 속눈썹을 뽑아 그 인간의 눈썹에 심어주며 영생과 함께 신묘한 능력을 부여한다. 신묘한 능력이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형의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었고, 백호는 이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을 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인간은 기꺼이 응하면서도 인간에게 이런 능력과 영생은 독이 아니냐며 항변하자, 백호는 심연에서 헤매는 아이를 구하게 되면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선택지를 남겨준다. 이렇게 백호에게 간택당한 이는 어드메에 터를 잡고 '호랑이의 눈썹', 즉 '호미'라는 이름으로 백호가 부여한 사명 아닌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심연에서 한 아이를 찾아내고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자신은 홀연히 사라진다. 이유요는 그 터에서 사부인 호미를 기다리며, 그가 수행하던 사명 아닌 사명을 이어받아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표지의 예스러운 일러스트와 《호랑골동품점》이라는 제목과 고전 설화 같은 도입은 마치 어릴 적에 읽은 전래동화 같다. 판타지 요소가 가득 한데도 어쩐지 익숙한 기시감 속에서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장에서부터 6장까지, 각 장에서 다루는 기묘한 골동품과 이에 얽힌 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각 에피소드마다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그 전개가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판타지라는 설정 안에서 현대 사회의 생태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점이 핍진성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이런 점이 특히 좋았는데 판타지라는 설계된 세계관에서도 눙치는 요령 없이 성실하게 얼개를 쌓아가는, 유려한 필력 속에서 확보하는 전개의 정당성이 좋았다.



그러한 특징이 가장 짙게 드러난 편은 첫 번째 에피소드인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이었다. 취업이라는 거대하고도 고통스러운 사회적 허들 앞에 좌절한 이 시대의 청년, 김규리가 등장한다. 콜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의 유일한 낙은 담배였다. 짧게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흡연실에서 급하게 담배를 피우며 와중에 신속하고도 신랄하게 팀장을 욕하는 것이 김규리를 비롯한 콜센터 그녀들의 유일한 한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흡연실에서 라이터가 켜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한편, 퇴근길에 김규리는 '우연한 끌림'에 의해서 '호랑골동품점'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곳에서 또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 성냥갑을 훔치게 된다. 이 성냥갑을 훔친 뒤부터 김규리에게 일련의 기괴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본래 퇴사자가 많고 인원 변동이 잦은 콜센터에서 업무를 과중시키는 건 노동조합 와해에 가장 많이 쓰이는 전략이었다. 일단 옆자리 동료와 정붙일 틈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회사는 잘 알았다. 타인의 체온이 온기로 느껴지지 않게 경쟁과 분열이란 이름의 냉기를 적절하게 붙여 넣는 것. 부당함과 착취를 골조로 세워진 회사일수록 효과적으로 냉기를 생성해냈다. p.40,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그러나 모름지기 초현실의 공포는 현실의 공포를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기이하게 타오르는 성냥 불꽃 속에서 모두가 목격한 '체조하는 이미선'의 모습은 콜센터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저항을 표상하면서도, 이미선을 기억하고 그녀를 대하던 동료들의 태도는 반대로 뒤틀린 노동 환경의 시스템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서로 와해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 김규리가 훔친 골동품,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갑'은 과거와의 매개체가 되어 19세기 영국 성냥 공장의 소녀공들을 소환한다. 아, 세기가 지나도 이렇게나 똑닮은 노동 환경이라니…. 노동 운동하면 '투쟁'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는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콜센터의 업무 강도, 실적 압박, 열악한 노동 환경은 결코 생소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아니다. 만연해 있는 노동 문제와 사회의 태만한 인식 태도에 작은 경종을 울리듯 체조하는 이미선을 따라 체조하는 김규리의 모습이 모든 에피소드를 지나서 책을 덮어도 잔상처럼 기억에 남는다. 관련해서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을 검색해 보니 실제 역사적인 사건의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매치 걸스 스트라이크'가 이미선과 김규리와의 연대로 계속되는 것은 희망적일까? 괴담의 형식을 빌린 이야기가 자체로 괴담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래도 복도 끝에 서서 체조를 하며 '하나 둘 셋'을 읊조려본다.

1장을 개인적으로는 다소 진중하게 읽었지만 전혀 다른 결의 에피소드들이 공존한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그런 결을 따라서 특히 3장인 〈3. 1977년 체신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가 인상적이었다. 호랑골동품점의 현주인인 이유요의 출장 수거 에피소드. 이유요는 낡고 오래된 공중전화기의 회수 요청을 받고 어느 산골의 게스트하우스로 출장을 떠난다.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던 정지운이 그를 맞이하면서 정지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의뭉스러운 계획을 짜고 있던 정지운에게 이유요의 방문은 달갑지 않았으나 무람없이 하룻밤을 청하는 이유요와 저녁 식사 과정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바로 그 낡고 오래된 공중전화기에서!


"공중전화라는 건 개인이 소유한 휴대전화와 다르게 낯선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막연히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지요. 아이들에겐 그게 마법의 상자처럼 보이지 않았을까요." p.126, 〈3. 1977년 체신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정지운은 이유요와의 불편하고 맛없는 저녁 식사를 하며 일본의 유명한 사토루 괴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정지운은 어린 시절 자신의 외로웠던 과거를 떠올린다. 매 순간이 외로웠던 소년의 삶에 등장한 박서현이라는 존재를 떠올린다. 정지운의 삶에 와락 하고 등장한 박서현은 정지운에게 연극부를 제안하고 둘은 성인이 되어서도 극단을 차려 함께 배우와 감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으레 그러하듯, 비극은 이런 찬란한 시절을 비웃으며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극단을 같이 꾸려가던 다은과 박서현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그렇게 죄책감과 비애감에 잠겨있던 정지운은 그날, 한밤중에 일어나 사토루 괴담을 떠올리며 공중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려본다.





묻지 못했던 말, 듣고 싶었던 이야기, 전하고 싶었던 마음들이 일상처럼 오간다.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게 된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그 기회를 실현시켜준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힘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아도 박서현과 정지운은 각자가 꼭 들어야 했고, 건네야 했던 마음을 나눈다. 외로운 인생에서 구심점이 되어준 운명적인 존재는 정지운의 삶을 다시 생동하게 만든 것이다. 어른을 위한 환상 동화처럼 흘러가는 이야기가, 혹자는 다소 감상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불특정 다수의 경험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체화될 때 느끼는 감상의 밀도는 그 결이 제법 다르다. 진부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새삼 다시 생경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레토르트 카레와 막걸리, 늦게 핀 5월의 벚꽃은 정지운으로 대변되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일종의 희망이자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든 너무 외로워하지 말기를 바라며….




이 책, 《호랑골동품점》에는 아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취업에 좌절한 청년과 홀로 투쟁하던 노동자, 가정 폭력의 정당화를 체화한 노년의 남성과 그 피해자, 동물의 생명을 도구적으로 소비하는 자, 학교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학교와 가정에서 소외된 아이들까지. 호랑점을 지키는 이유요를 비롯한 이들 사이사이에는 외로움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는 마치 자력처럼 호랑점의 골동품들이 자리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으로 흘러간다. 두말없이 이런 전개는 어쩔 수 없이 참 좋다. 외로운 사람을 보듬고, 뒤틀린 일들은 마땅히 그 자리를 찾아가는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의 진리. 세상은 다층적으로 복잡해지고 가치 판단의 일 또한 그렇게 되어가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않아야 하는 것들을 수호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힐링 호러 소설'이라는 압축적인 책 소개 멘트를 보고 끄덕여지는 이유다.





책을 다 읽고 범유진 작가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았다. 몇몇 눈에 익은 제목들이 보였고, 무엇보다 청소년을 위한 다수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읽고 나니 뭔가 끄덕여진다. 문장과 문장들이 유려하게 흘러가서 잘 읽히고 온당한 전개성에서 비롯하는, 이야기의 탄탄한 서사가 즐거웠다. 마치 넷플릭스 시리즈를 무아지경으로 몰아보는 듯한 기분. 전대 호미의 서사와 이유요의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로 이어지는 《호랑골동품점》의 또 다른 에피소드가 기다려진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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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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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식목일'은 공휴일이었다. 그래서 작은 묘목을 심거나 나무와 관련하여 포스터나 표어를 그리는 숙제를 하던 기억이 난다. 왜 일부러 나무 심는 날을 지정한 것일까? 포스터 가득 무성한 나무를 그려 넣으면서 궁금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답해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방금 검색을 해보았는데 그 유래가 무려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성업을 완수한 날에 제를 지냈던 날이라고 한다. 제를 지내기 위한 곡식을 왕이 농민을 논밭을 두어 경작하게 했는데, 이날은 왕이 몸소 나와 경작하던 날이기에 기념했다고. 정의는 '나무를 심으며 국민의 나무 사랑 정신을 북돋우고, 산지의 자원화를 위해 제정된 날'이라고 한다.(*네이버 한국민족대백과) '오, 그렇구나' 하면서도 '자원화'라는 단어에서 주는 어감이 이제는 어쩐지 낡은 위화감이 든다.


이제는 더 이상 공휴일이 아닌 식목일이 있는 4월에는 묘목을 심는 대신, 식물에 관한 에세이를 읽는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이 노거수에 실태에 관한 르포 형식의 에세이였다면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식물분류학자가 숲을 기록한 일지 형식의 에세이로 그 결이 제법 다르지만 저자들이 나무와 식물, 자연과 숲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거시적인 관점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느꼈다.




저자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환경연구센터에서 난초와 관련 곰팡이를 연구하며 숲속 식물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미국에 처음 살게 된 한국인, 해외 연구소에 있는 어린 과학자, 미래를 고민하는 여성 과학자, 과학과 예술 사이에 있는 사람, 자연을 마주하는 인간으로서(p.9) 기록한 세상과 자연, 사람에 대한 사랑 이야기에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썼다고 한다.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라는 소제목에서 보듯이 저자의 이야기는 계절을 하나하나 지나가며 변화하는 숲속 식물과 타지에서 외지인으로 지내는 자신의 여러 경험과 느낌을, 여러 갈래의 소회로 이야기한다. 더불어 책 곳곳에 저자가 그린 식물 세밀화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의 첫 줄인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의 면모를 곳곳의 세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생 좋아하는 것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하기 위해 기꺼이 낯선 곳을 향하는 열정 속에서도 저자는 솔직하게 낯선 곳에서의 고립과 외로움을 고백한다. 하지만 기어코 머나먼 이국에서의 향수병 보다 미지의 숲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식물에 대한 탐구 열정이 저자를 미국 메릴랜드의 숲으로 이끌었다. 저자는 연구를 위해서 숲에 가기도 하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도 숲에 가며 식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식물을 다 덮어버리고야 마는 펑펑 내린 소복한 눈을 바라보면서,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 늪지대의 길을 잃은 물고기 한 쌍을 바라보면서 인간관계의 고충을 털어버리기도 하고, 자연 생태에 대해 경탄하기도 하며,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자연을 보고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것은 새삼 인간의 신비한 공감각적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겪은 숲과 자연에 관한 개인적 경험이 읽는 내내 같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초의 씨앗은 스스로 싹을 틔울 영양분이 부족해 특정 곰팡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곰팡이는 난초의 씨앗에 외부의 영양분을 전달한다. 그리고 많이 연구되지 않았지만, 그 곰팡이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정한 박테리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박테리아는 곰팡이를 도와주고, 곰팡이는 난초를 도와주는 것이다. p.92


이런한 감상을 겸한 식물의 생장에 관한 과학적인 사실들도 흥미로웠다. 저자가 연구하는 난초가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곰팡이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곰팡이는 또다시 박테리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어떤 씨앗들은 생장하는 속도의 차이가 있는데, 발아 시기가 길게는 몇 년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어떤 꽃의 향기는 꽃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꽃에 있는 미생물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러한 서술에서는 마치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인의 시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머나먼 숲까지 저자를 떠나게 한 저자의 열정이 어떻게 기원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만든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일, 애정을 쏟는 일은 구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저자가 식물을 보고 삶을 이해해 보듯이 나도 조금은 이해해 본다.




계절을 따라 걷는 책의 구성처럼 저자를 따라 메릴랜드의 숲속을 따라걸으며 계절마다 변화하고 적응하는 식물들의 생장을 살펴보는 일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가을에 씨앗을 심는 것을 생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저자가 이내 그 이유를 알고는 깨닫는 장면은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여름에 열매를 맺고 씨앗을 떨구어 가을 동안 토양 속에서 성실히 영양분을 쌓아 혹한의 계절을 견딘 후, 봄에 싹을 틔우는 식물의 생장 과정은, 인간의 생애를 빗대어도 설명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이러한 식물의 생장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것을 보며 책에서 언급한 생명의 영속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숲속에는 맞거나 틀린 것, 좋고 나쁜 것, 기쁘고 슬픈 것이 없을 거라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생물의 생존방식을 경쟁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경쟁이나 공생도 자연을 설명하기엔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조화, 연결, 순환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자연의 모든 건 조화롭게 연결되어 순환한다. p.97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어쩌면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겠지만 저자의 '조화, 연결, 순환'이라는 자연 상태에 관한 정의는 식물이라는 작은 단위의 객체로 보아도, 숲이라는 보다 거대한 단위로 보아도 '조화, 연결, 순환'이라는 정의가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숲의 구성은 객체들이 모여 그저 단순히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에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순환하며 생동하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된 나무를 인위적으로 죽이기 위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거들링과 프릴링을 언급하는데 그런 방법을 써도 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한 번에 고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생명력을 보면 묵묵하고 고요해 보이는 숲속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숲속의 유기체들이 얼마나 견고한 순환의 고리를 가지고 역동적으로 생동하는지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먹은 열매가 녹음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던 모습을 떠올린다. 또한 그 맛에서 여름의 햇빛, 더위, 비, 곤충의 수고를 생각한다. 열매는 먹는 숲속 동물들처럼 우리가 태초 자연에서 어떤 순환고리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인지 깨닫는다. p.109


곰팡이, 박테리아, 곤충, 소동물, 꽃, 나무… 숲을 인식하는 범위가 한껏 넓어졌다. 인식의 범위가 늘어나니 감각할 수 있는 영역은 더욱 다양해졌다. 종종 등산을 하다가 만나는 울창한 숲에서 느끼는 정체 모를, 설명할 길이 요원한 압도감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거대한 규모가 주는 실체적인 압도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의 숲이 품고 있는 수많은 생장의 서사가 깃들어 있기에 그런 것을 아니었을까 이 책을 빌려 미루어 짐작해 볼 따름이다. 숲의 서사를 목도하며, 저자의 지식에 기대어, 인간적 고민과 위로, 공감을 나누며 숲속을 도닥도닥 걷는 기분이었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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