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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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기원은 신묘한 전설처럼 시작된다. 아주 멀고도 먼 옛날, 백호의 눈병을 치료해 준 인간이 있었다. 이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백호는 자신의 속눈썹을 뽑아 그 인간의 눈썹에 심어주며 영생과 함께 신묘한 능력을 부여한다. 신묘한 능력이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형의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었고, 백호는 이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을 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인간은 기꺼이 응하면서도 인간에게 이런 능력과 영생은 독이 아니냐며 항변하자, 백호는 심연에서 헤매는 아이를 구하게 되면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선택지를 남겨준다. 이렇게 백호에게 간택당한 이는 어드메에 터를 잡고 '호랑이의 눈썹', 즉 '호미'라는 이름으로 백호가 부여한 사명 아닌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심연에서 한 아이를 찾아내고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자신은 홀연히 사라진다. 이유요는 그 터에서 사부인 호미를 기다리며, 그가 수행하던 사명 아닌 사명을 이어받아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표지의 예스러운 일러스트와 《호랑골동품점》이라는 제목과 고전 설화 같은 도입은 마치 어릴 적에 읽은 전래동화 같다. 판타지 요소가 가득 한데도 어쩐지 익숙한 기시감 속에서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장에서부터 6장까지, 각 장에서 다루는 기묘한 골동품과 이에 얽힌 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각 에피소드마다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그 전개가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판타지라는 설정 안에서 현대 사회의 생태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점이 핍진성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이런 점이 특히 좋았는데 판타지라는 설계된 세계관에서도 눙치는 요령 없이 성실하게 얼개를 쌓아가는, 유려한 필력 속에서 확보하는 전개의 정당성이 좋았다.



그러한 특징이 가장 짙게 드러난 편은 첫 번째 에피소드인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이었다. 취업이라는 거대하고도 고통스러운 사회적 허들 앞에 좌절한 이 시대의 청년, 김규리가 등장한다. 콜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의 유일한 낙은 담배였다. 짧게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흡연실에서 급하게 담배를 피우며 와중에 신속하고도 신랄하게 팀장을 욕하는 것이 김규리를 비롯한 콜센터 그녀들의 유일한 한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흡연실에서 라이터가 켜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한편, 퇴근길에 김규리는 '우연한 끌림'에 의해서 '호랑골동품점'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곳에서 또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 성냥갑을 훔치게 된다. 이 성냥갑을 훔친 뒤부터 김규리에게 일련의 기괴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본래 퇴사자가 많고 인원 변동이 잦은 콜센터에서 업무를 과중시키는 건 노동조합 와해에 가장 많이 쓰이는 전략이었다. 일단 옆자리 동료와 정붙일 틈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회사는 잘 알았다. 타인의 체온이 온기로 느껴지지 않게 경쟁과 분열이란 이름의 냉기를 적절하게 붙여 넣는 것. 부당함과 착취를 골조로 세워진 회사일수록 효과적으로 냉기를 생성해냈다. p.40,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그러나 모름지기 초현실의 공포는 현실의 공포를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기이하게 타오르는 성냥 불꽃 속에서 모두가 목격한 '체조하는 이미선'의 모습은 콜센터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저항을 표상하면서도, 이미선을 기억하고 그녀를 대하던 동료들의 태도는 반대로 뒤틀린 노동 환경의 시스템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서로 와해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 김규리가 훔친 골동품,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갑'은 과거와의 매개체가 되어 19세기 영국 성냥 공장의 소녀공들을 소환한다. 아, 세기가 지나도 이렇게나 똑닮은 노동 환경이라니…. 노동 운동하면 '투쟁'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는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콜센터의 업무 강도, 실적 압박, 열악한 노동 환경은 결코 생소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아니다. 만연해 있는 노동 문제와 사회의 태만한 인식 태도에 작은 경종을 울리듯 체조하는 이미선을 따라 체조하는 김규리의 모습이 모든 에피소드를 지나서 책을 덮어도 잔상처럼 기억에 남는다. 관련해서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을 검색해 보니 실제 역사적인 사건의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매치 걸스 스트라이크'가 이미선과 김규리와의 연대로 계속되는 것은 희망적일까? 괴담의 형식을 빌린 이야기가 자체로 괴담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래도 복도 끝에 서서 체조를 하며 '하나 둘 셋'을 읊조려본다.

1장을 개인적으로는 다소 진중하게 읽었지만 전혀 다른 결의 에피소드들이 공존한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그런 결을 따라서 특히 3장인 〈3. 1977년 체신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가 인상적이었다. 호랑골동품점의 현주인인 이유요의 출장 수거 에피소드. 이유요는 낡고 오래된 공중전화기의 회수 요청을 받고 어느 산골의 게스트하우스로 출장을 떠난다.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던 정지운이 그를 맞이하면서 정지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의뭉스러운 계획을 짜고 있던 정지운에게 이유요의 방문은 달갑지 않았으나 무람없이 하룻밤을 청하는 이유요와 저녁 식사 과정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바로 그 낡고 오래된 공중전화기에서!


"공중전화라는 건 개인이 소유한 휴대전화와 다르게 낯선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막연히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지요. 아이들에겐 그게 마법의 상자처럼 보이지 않았을까요." p.126, 〈3. 1977년 체신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정지운은 이유요와의 불편하고 맛없는 저녁 식사를 하며 일본의 유명한 사토루 괴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정지운은 어린 시절 자신의 외로웠던 과거를 떠올린다. 매 순간이 외로웠던 소년의 삶에 등장한 박서현이라는 존재를 떠올린다. 정지운의 삶에 와락 하고 등장한 박서현은 정지운에게 연극부를 제안하고 둘은 성인이 되어서도 극단을 차려 함께 배우와 감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으레 그러하듯, 비극은 이런 찬란한 시절을 비웃으며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극단을 같이 꾸려가던 다은과 박서현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그렇게 죄책감과 비애감에 잠겨있던 정지운은 그날, 한밤중에 일어나 사토루 괴담을 떠올리며 공중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려본다.





묻지 못했던 말, 듣고 싶었던 이야기, 전하고 싶었던 마음들이 일상처럼 오간다.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게 된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그 기회를 실현시켜준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힘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아도 박서현과 정지운은 각자가 꼭 들어야 했고, 건네야 했던 마음을 나눈다. 외로운 인생에서 구심점이 되어준 운명적인 존재는 정지운의 삶을 다시 생동하게 만든 것이다. 어른을 위한 환상 동화처럼 흘러가는 이야기가, 혹자는 다소 감상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불특정 다수의 경험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체화될 때 느끼는 감상의 밀도는 그 결이 제법 다르다. 진부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새삼 다시 생경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레토르트 카레와 막걸리, 늦게 핀 5월의 벚꽃은 정지운으로 대변되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일종의 희망이자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든 너무 외로워하지 말기를 바라며….




이 책, 《호랑골동품점》에는 아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취업에 좌절한 청년과 홀로 투쟁하던 노동자, 가정 폭력의 정당화를 체화한 노년의 남성과 그 피해자, 동물의 생명을 도구적으로 소비하는 자, 학교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학교와 가정에서 소외된 아이들까지. 호랑점을 지키는 이유요를 비롯한 이들 사이사이에는 외로움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는 마치 자력처럼 호랑점의 골동품들이 자리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으로 흘러간다. 두말없이 이런 전개는 어쩔 수 없이 참 좋다. 외로운 사람을 보듬고, 뒤틀린 일들은 마땅히 그 자리를 찾아가는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의 진리. 세상은 다층적으로 복잡해지고 가치 판단의 일 또한 그렇게 되어가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않아야 하는 것들을 수호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힐링 호러 소설'이라는 압축적인 책 소개 멘트를 보고 끄덕여지는 이유다.





책을 다 읽고 범유진 작가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았다. 몇몇 눈에 익은 제목들이 보였고, 무엇보다 청소년을 위한 다수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읽고 나니 뭔가 끄덕여진다. 문장과 문장들이 유려하게 흘러가서 잘 읽히고 온당한 전개성에서 비롯하는, 이야기의 탄탄한 서사가 즐거웠다. 마치 넷플릭스 시리즈를 무아지경으로 몰아보는 듯한 기분. 전대 호미의 서사와 이유요의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로 이어지는 《호랑골동품점》의 또 다른 에피소드가 기다려진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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