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특징이 가장 짙게 드러난 편은 첫 번째 에피소드인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이었다. 취업이라는 거대하고도 고통스러운 사회적 허들 앞에 좌절한 이 시대의 청년, 김규리가 등장한다. 콜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의 유일한 낙은 담배였다. 짧게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흡연실에서 급하게 담배를 피우며 와중에 신속하고도 신랄하게 팀장을 욕하는 것이 김규리를 비롯한 콜센터 그녀들의 유일한 한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흡연실에서 라이터가 켜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한편, 퇴근길에 김규리는 '우연한 끌림'에 의해서 '호랑골동품점'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곳에서 또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 성냥갑을 훔치게 된다. 이 성냥갑을 훔친 뒤부터 김규리에게 일련의 기괴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본래 퇴사자가 많고 인원 변동이 잦은 콜센터에서 업무를 과중시키는 건 노동조합 와해에 가장 많이 쓰이는 전략이었다. 일단 옆자리 동료와 정붙일 틈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회사는 잘 알았다. 타인의 체온이 온기로 느껴지지 않게 경쟁과 분열이란 이름의 냉기를 적절하게 붙여 넣는 것. 부당함과 착취를 골조로 세워진 회사일수록 효과적으로 냉기를 생성해냈다. p.40,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그러나 모름지기 초현실의 공포는 현실의 공포를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기이하게 타오르는 성냥 불꽃 속에서 모두가 목격한 '체조하는 이미선'의 모습은 콜센터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저항을 표상하면서도, 이미선을 기억하고 그녀를 대하던 동료들의 태도는 반대로 뒤틀린 노동 환경의 시스템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서로 와해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 김규리가 훔친 골동품,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갑'은 과거와의 매개체가 되어 19세기 영국 성냥 공장의 소녀공들을 소환한다. 아, 세기가 지나도 이렇게나 똑닮은 노동 환경이라니…. 노동 운동하면 '투쟁'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는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콜센터의 업무 강도, 실적 압박, 열악한 노동 환경은 결코 생소하게 여겨지는 문제가 아니다. 만연해 있는 노동 문제와 사회의 태만한 인식 태도에 작은 경종을 울리듯 체조하는 이미선을 따라 체조하는 김규리의 모습이 모든 에피소드를 지나서 책을 덮어도 잔상처럼 기억에 남는다. 관련해서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을 검색해 보니 실제 역사적인 사건의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매치 걸스 스트라이크'가 이미선과 김규리와의 연대로 계속되는 것은 희망적일까? 괴담의 형식을 빌린 이야기가 자체로 괴담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래도 복도 끝에 서서 체조를 하며 '하나 둘 셋'을 읊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