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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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나는 책을 결핍된 무엇을 채우기 위해, 혹은 메마른 무엇을 해갈하기 위해 읽었다. 팍팍한 감성에는 시나 에세이를, 순백한 무지에는 교양서를, 강렬한 도파민에는 취향의 장르 소설을 읽어댔다. 책을 덮은 후에는 여지없이 알량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그것으로 세계는 종결이었다. 그러나 《앎과 삶 사이에서》를 덮고 나니 세계는 오히려 활짝 열린 채로 남아있다. 집중에 흔적이 남은 미간을 다소 구긴 채로 잠시 멍을 때린다. 인덱스를 남긴 구절을 찾아 옮기고 감상을 몇 줄 적어보려는데 좀처럼 커서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는 것'과 '사는 것', 그 간극에서 써 내려간 갈등과 고민, 비판과 성찰의 기록이다. 주제는 사회적으로 거대한 담론부터 저자의 개인적인 일화까지 다양하다. 전쟁, 참사, 재난, 장애, 가난, 부조리, 차별, 불평등…. '앎'과 '삶'이 유리된 채 안락한 '삶' 속에서 관망하는 '앎'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저자는 이를 새로 지은 주택에 틀어 앉아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감각하기도 한다. 활자는 어려운 것 없이 술술 읽힌다지만 내용은 꽤나 빈번하게 마음 어딘가에 턱턱 걸려버리곤 해서 곧잘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한 세상이 집 밖에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렇게 모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불편한 말,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데 집이 너무 편안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밖에서는 억수같이 계속 비가 내렸다. p.241-242, [중산층의 집 짓기, 로망과 욕망] 




 그러나 저자는 결코 당위성 따위 같은 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을 가진 유가 계급 중산층, 고등 교육을 받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자신과 세계를 맺음으로써 앎과 삶에서 오는 괴리를 자기고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앎 속에 자신과 삶 속에 자신, 그 괴리와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사고한다. 수치심과 죄책감, 분노와 무기력, 냉소와 체념, 비판과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지만 희망을 바라보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한낱의 소시민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고 저자도 이를 통감하지만 냉소는, 체념은 너무 가볍고 쉬운 선택인 것이다.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69, [죽어가는 것은 사람이다] 

 저자는 파주에서 이웃들과 책방을 운영하며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여러 활동을 한다. 그런 여러 활동의 일환으로 연이 닿아 미얀마 국경 지역에 난민촌을 방문하며 그들과 '민주주의 시민'으로써 연대하는 장면을 보고 문득, 대학 시절에 어느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과에서 개최한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아웅산 수 치'에 관해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던 미얀마 교환 학생, '너희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닮아있다!'라고 말을 맺으며 환하게 웃던 모습. 왜 더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앎이 잊고 지냈던 삶 속에 있던 것이다.





 불법 계엄과 탄핵, 그 이후에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어쩌면 간과하고 싶었던 사실들을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으로 조망할 때는 나도 그 시선의 사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더 큰 '대의'라는 명목하에 묵살되는 가치들은 과연 묵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대의는 정녕 다수를 대표하는가. 거대 양당 정치를 배경으로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인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단으로서의 정치가 교묘하고도 노골적으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지 저자의 확장된 시각을 빌려 바라볼 수 있다. 자, 이제 앎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소시민의 힘은 무용하다고 느껴지는가? 나는 지난 12·3 계엄 사태 이래로 발광하던 수많은 응원봉을 기억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보다 나의 윤리적 자족감이 앞설 수는 없지 않을까? p.318, [밥벌이의 준엄함, 삶의 엄연함] 

 조금 더 일반적인 삶 속에서 앎을 고민했던 사례는 '탈팡'이었다. 저자 또한 새벽 배송을 이용하지 않다가 불가피하게 이용하며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이용자 입장에서 느끼는 하찮은 '윤리적 자족감'을 걷어내면 보다 복잡한 노동자의 사정이 드러난다. 야간 수당, 비대면 환경, 불가피한 야간 노동 사정 등의 이런 '밥벌이의 준엄함'을 묵과할 수 있을까? 결국 이것 또한 구조적인 문제고 해결 방법은 정치 영역에서 입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무용의 도돌이표가 다시 찍히는 기분이다.

 마트와 새벽 배송, 배달 앱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거리낌이 느껴진다면 거기에 윤리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 없이는 세상을 바꾼다는 꿈조차 꿀 수 없다. p.319, [밥벌이의 준엄함, 삶의 엄연함] 

 이러한 긴장과 충돌, 갈등과 허탈이 앎과 삶을 연결하는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위태롭게 밟아내는 스텝이 춤인지 몸부림인지 기묘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착한 소비자'가 '선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면서도 계속해서 앎과 삶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을 주목해야 한다. 앎과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줄이 되어 그 두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많은 개인들의 그러한 긴장과 고민, 소소한 실천과 선의를 외면한다면 그 줄은 차츰 삭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위선이야말로 선을 닮고 싶은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을 증거한다. 위선이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인 이유다. 위선은 역겹지만, 위선마저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 냉소하기보다는 위선의 모순 속으로 걸어가야 할 까닭이다. 이 길을 걸어야 한다. p.178, [위선,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 




 사실 많은 문장들에 인덱스를 남겼다. 기대하는 명쾌한 해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의 문장들이 가득하다. 열려버린 세계 속에서 개인적으로 위로를 얻은 문장을 공유하고 싶은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꼽고 싶다. 그 문장은 바로…,



어중간하게 살아왔다.

사실은 당신도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면 좋겠다.

p.5, 들어가며 [어중간하게 살아온 당신과 나에게]







 책을 들어가며 여는 서문의 첫 문장이다. 저자는 어중간하게 살아온 삶을 고백하며 독자도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기를 바라는 문장. 다 읽고 돌아와 다시 서문을 읽는다. 혼란하고 불분명해진 마음에 나와 당신의 '어중간한 정체성'이 서로 다름없음으로 위로가 되는 문장. 그럼에도 뒤를 잇는 문장들의 꼬리에서 저자는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보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소시민의 삶과 앎이 얽히고설켜 끝내 품고야 마는 희망이자 연대에 대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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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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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는 모르는데 '엮은이'와 '옮긴이'는 알고 있습니다. '바바라 몰리나르'는 모르지만 '마그리트 뒤라스'와 '소설가 백수린'은 안다는 말이죠. 잇따를 감상을 예견하듯 희한한 첫인상이었습니다. 바바라 몰리나르는 뒤라스의 친구였고, 글을 썼습니다만 쓰는 족족 찢어버립니다. 무려 8년 동안 그랬다고 하는데요, 보다 못한 그녀의 남편과 뒤라스가 그녀를 설득해 원고를 모아 출판한 것이 이 책,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라고 합니다. 원제는 '와줘, 오라, 와'라는 의미의 《VIENS》이고, 영문판은 '극심한 공포, 공황'이라는 의미의 《Panics》입니다. 각 제목 간에 의미 차이가 굉장히 크지 않나요? 내용이 더욱 궁금해지죠.





 바바라 몰리나르가 평생 유일하게 남긴 이 소설집은 사실 굉장히 난해합니다. 소설들은 대체로 다짜고짜 불가해한 어떤 상황 속에 뚝 떨어지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도시를 방황하거나 혹은 불명한 초대를 받고 기이한 고행을 겪기도 하죠.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지하로 깊이 침잠하거나 도달하지 못할 지상을 계속 오르기도 합니다. 얼굴이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잘린 손을 들고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초현실적이고 아방가르드하지요? 저는 초반에 읽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습니다.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늘어뜨린 채 여자는 시간에 자신을 맡겼다. 그녀가 잘 아는, 그러나 죽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쳐야만 하는 이 죽은 시간 속에. (…) 하지만 또 생각했다. 내일은 다시 시작해야만 하고,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매일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p.22,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




 기괴한 요소들의 비일상적인 묘사가 꽤나 불편합니다. 주로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가 흐르는 가운데 폭력적이거나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거든요. 그리고 불현듯 끝나버리기 일쑤이고요. 작가는 마침표로 끝을 냈는데 독자는 물음표로 시작합니다. 그런 물음표를 내내 물고 가다, 문득 뒤라스의 서문이 다시 떠올랐어요. 바바라 몰리나르는 자신의 글을 모두 찢어버렸다는 것. 그러니까 책으로 묶인 이 글들도 뒤라스가 아니었다면 찢어질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러니까 이 글들은 '읽혀지기' 위한 글이 아니라 '찢어지기' 위한 글인 겁니다. 애초에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글이고 읽혀지고, 이해하고, 해석되기 위한 글이 아니니 너무나 당연하게 읽기가 난해했던 거죠.

 그녀가 써 내려간 글들은 불안하고 우울하고 강박적이고 때로는 망상적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초월하는 전개와 묘사는 한 편의 환상적인 악몽 같기도 해요. 광적이면서도 동시에 고독하고요. 뒤라스는 서문에서 이런 말도 했는데요, '이 책에 실린 글을 지어낸 것도 꿈을 꾼 것도 아니다. 이 글은 살아낸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살아낸 것에는 글쓰기도 포함되어 있다.(p.11)'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바바라 몰리나르가 삶에서 마주한 불가해한 총체의 기록이었고 '쓰기'라는 행위는 그런 것으로부터 살아내고자 했던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바바라 몰리나르는 왜 그런 자신의 원고를 박박 찢어버렸을까요?







 언젠가 심리학 책에서 본 내용인데요, 부정적인 감정을 종이 옮겨 적고 구겨서 버리거나 찢어버리면 심리적으로 완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외현화'라고 한다네요. 바바라 몰리나르가 자신의 원고를 찢어버린 것도 그런 심리적 기전에 따른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불안·광기·폭력·우울·고독·권태와 같은 삶의 기록을 찢어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일종의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죠.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찢는 것도 세심하고 특정한 방식(p.9)으로 이루어진다는 뒤라스의 전언도 이를 뒷받침할 것 같고요. '쓰고 찢는 행위'는 바바라 몰리나르에게 일종의 의식(ritual)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파기되지 못하고 남은 불가해한 총체의 기록, 해소되지 않고 남겨진 환상적인 악몽의 집합을 텍스트로써 읽어 내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느껴지는 심오한 정서, 감정의 동요, 불온한 심상을 감각하며 읽는 것이죠. 초반에 느꼈던 위화감은 어느새 잦아지고 어느덧 이 기묘한 차원의 세계로 스며들게 됩니다. 찢어지지 못하고 남아버린 불온한 총체의 기록은 독자에게 전가되어 확장합니다. 독자는 그 비틀린 세계를 거울삼아 자신만의 무엇을 읽어내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번에 이를 파기하는 역할은 작가가 아닌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이죠.



 내게 말해준 건 그 사람이다. 저기 보이는 것이 지상이며, 지상이 곧 천국이라고.

 어떻게 그를 믿겠는가?

 나는 절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p.122, 아버지의 집



 솔직히 어렵습니다. 방금 내가 읽은 것이 맞나 싶어서 행간을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고요, 소심한 좌절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뒤라스의 서문과 대담, 옮긴이의 말, 출판사의 책 소개, 책에 따르는 추천사까지를 두세 번 정도 정독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문득 책을 이해하는데 책 밖으로만 나가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갈피 해놓은 문장과 문단, 제목과 작가, 정서와 감상을 곱씹으니 투명했던 감상의 윤곽이 얼핏 보이기도 했죠. 그 찰나를 잡아 횡설수설해 보았습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유령 같은 잔상이지만요.




 이쯤에서 처음에 언급했던 제목을 살펴보며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와줘, 오라'는 뜻의 원제 《VEINS》는 작품 속에서 인물을 추동하게 만드는 존재가 건네는 말입니다. 이 목소리의 초대, 요구, 약속을 쫓는 인물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방황하죠. 고로 '고통'을 야기하는 근원적인 욕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문판의 제목인 《Panics》는 좀 더 직관적입니다. 책 그 자체에서 서술하고 묘사하는 상황과 모든 것이 모두 패닉적이거든요. 그리고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는 마지막으로 수록된 작품의 제목이자 마지막 문장인데요, 바로 그 앞에 문장을 주목을 합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p.211) '밤에 혼자 있는 나'는 곧 자유입니다. 모든 혼란과 방황이 소거되어 홀로 남은, 깊은 밤의 고요를 닮은 자유라고 말하고 싶네요.

 D 허무, 그건 뭘까요?

 M 그건 오히려 여기죠.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게 허무예요. 바보짓이죠. 허무는 어디에나 있어요. 도시에도, 사람들 속에도요. 인간이란 종(種)은 더 나아져야 해요. 우리는 정말 보잘것없어요.

 D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죠? "제가 저답게 살려면 약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M 그래요. 저는 자신을 넘어서려 하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압도되지도 않을 거고요. 저는 그저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p.224, 지하 납골당,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기록한 작가와의 대화 (D-뒤라스, M-몰리나르)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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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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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장르와 분야를 읽자고 다짐하면서도 유난히 가까워지지 못하는 장르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시'입니다. 알고 있는 시인과 시라고 하면 중·고등학생 시절에 배운 시와 시인이 전부입니다. 사실 이것도 너무 오래전에 배운 터라 지금은 거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하죠. 시집을 한두 권 사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낭패감. 난해하고 어지러웠거든요. '그저 느끼면 된다, 감상에 정답은 없다'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 세계는 다른 차원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시인이 쓴 산문이라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읽어갑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에 관한 것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듯,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항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삶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p.9, 여는 글

 최지인 시인이 쓴 《일렁이는 음의 밤》의 독특한 구성이라고 한다면 각 글과 상응하는 음악이 병치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글마다 첨부된 QR코드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 시각, 음악을 듣는 청각, 책을 잡은 촉각, 공간이 풍기는 후각, 커피가 주는 미각까지 함께 하며 오감으로 《일렁이는 음의 밤》을 감각할 수 있죠. 덕분에 책을 읽으며 들으며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읽고, 듣고 나니 이 모든 총체적인 감각이 딱 표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옅은 푸름이 겹겹이 덧칠해져 끝내 짙어진 푸름 속에서 고요한 사색을 나누는 기분이 들거든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사유합니다. 그런 사유를 관통하며 음악이 내내 흐르는 거죠. 결국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가족, 친구, 동료, 스승, 지인 등과 너른 관계 속에서 파동 하는 주파수를 섬세하게 끌어올려 음악과 함께 공명합니다. 음악은 대체로 위로가 되어주고, 때로는 감상을 대변해 주기도 하죠. 시인이 글에 녹여낸 한 음절의 가사를 따라 읽으며 흥얼거리다 보면 '아 이것이 다시 '시'인가, 아 결국 '시'와 다름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시인의 산문은 역시나 시를 닮았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시라는 것은 제게 조금 달라진 의미였고요.





 '시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내게 한 선배는 '무엇이 시가 될 수 있을까' 물으라고 했다. 그 말이 '삶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삶이 될 수 있을까' 묻는 태도처럼 들렸다.

 네게 무엇이든 삶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p.84, [너의 말투로 때아닌 여름을 불러줄게], 끝없이 울려 퍼지는 청춘의 소리, 아이묭 『청춘의 익사이트먼트』

 음유시인吟遊詩人, 거리나 마을을 떠돌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던 이들을 이르는 말이죠, 시인인 저자는 현대의 음유시인으로써 시인의 사회적인 역할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이주 노동자, 참사 유가족, 전쟁 피해자… 사회를 떠돌며 그들을 위해 시를 읊는다는 것에 대하여 사유하는 것이죠. 시대를 앓으며 계속해서 시를 쓰는 것은 또 다른 치유의 과정처럼 읽힙니다. 고민과 성찰, 사유와 사색, 청음과 낭송, 사람과 사람. 모든 것이 적절한 농도와 색채를 띠고 적당한 깊이로 침잠합니다. 깊은 바닷속 고요한 적막을 덮어쓰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체온이 주는 만큼의 온기로 읽는 기분이랄까요.

 문학은 시대를 구할 수 있을까. 시절이 어수선할 때 문학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 걸까.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들며 내가 다짐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존재하기를 통해 실천하며 상상력을 기르는 것이다. p.155,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는 사람들], 첼로 음악을 새롭게 정의한, 파클로 카살스 『J.S. BACH: Six Suites for Solo Cello』







 지나간 시간은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몸 어딘가에 머물다 불쑥 되살아난다. 그 밤들은 음악의 힘을 알게 했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음音에 불과하지만, 그 음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한 존재를 살게 하는 것은 다른 존재이다. p.161, 닫는 글

 뒤돌아 보며 안녕하고, 앞으로 나가 다시 안녕을 건넬 바로 지금 이 계절에 읽기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일상과 삶에 여러 부침 속에 침잠하고 부상하기를 반복하겠죠. 《일렁이는 음의 밤》은 그런 삶의 기록이라 읽힙니다. 그런 삶의 장면마다 삽입할 수 있는 음악이 있는 것은 분명 제법 멋지고 근사한 일이고요. 음악이 또 그런 삶의 부침을 견딜 수 있게 변주해 주기도 하잖아요. 음악이 때로는 불명한 삶의 사건을 그대로 품어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운율과 음절을 따라 마음껏 일렁이는 밤을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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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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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고 나니 짐짓 숙연해졌습니다. …라고 쓰고도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레터를 통해 먼저 접한 책 소개에서 '박래군'이라는 이름이 낯설면서도 아주 낯설지는 않았어요. 뉴스나 기사에서 종종 마주하곤 했던 이름이었거든요.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는 인권 운동가 박래군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그런데 분명 에세이라고 했는데? 읽고 나니 대한민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책을 한 권 읽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도한 시대가 초래한 슬픔과 분노의 역사 속에 항상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눈물을 흘리는 자 옆에 항상 박래군이 있었습니다. 그 눈물에 온기가 있다는 믿음으로요.





 1961년 노동절에 태어난, '來올 래, 群무리 군'의 한자를 쓰는 박래군은 본래 소설가를 꿈꿨습니다만 무도한 폭력의 시대는 그를 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문학회 소속 선배가 강제 징집을 당하면서 시대적 부채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사상과 이론을 배워가며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강제 징집을 당하게 되고 전역 이후에는 인천 부평 지역에서 노동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미 은행 점거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죠. 첫 수감 후, '왜 그렇게 사느냐'는 아버지의 일갈에 자신의 이름처럼 서로 모여 데모하기 딱 좋은 이름처럼 살고 있다고 받아치는 기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모진 폭력과 고문을 감내하면서도 박래군은 이 시절을 활동가로써 내실을 다지는 단단한 시절이었다고 정의합니다. 마치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경구처럼 말이죠. 사실, 비단 이 시절뿐이 아니라 박래군의 삶 전체가 저 한 문장을 고스란히 체화한 것만 같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 도래하고 맙니다. 박래군의 동생이었던 박래전이 '광주 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며 분신하여 88년 6월 6일, 스물여섯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동생 박래전의 죽음은 그에게 엄청난 상실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박래군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준비된 유가족은 없다. 유가협뿐만이 아니다. 나는 인권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유가족을 만났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유가족들, 제주 4·3의 유가족들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죽어갈 때조차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고 했다.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남은 이들은, 그러나 침묵만 하지 않았다.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았지만 끝내 그들은 말했고, 그들의 말은 가해자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었다. p.431

 이 시절을 계기로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었던 이소선 여사를 만나게 되어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인권 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죠. 관련 활동을 이어가다가 UN 세계인권대회에 참가를 계기로 더 넓은 영역에서 바라보는 인권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인권 단체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발하게 인권 운동을 전개하는데요, 《인권하루소식》이라는 기존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인권 관련 뉴스를 발굴하여 알리는 일간지를 발행하기도 하였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인권 영화제'를 개최하여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한국 인권 활동의 저변을 넓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의 활동가 인생에 변곡점이 도래합니다. 바로 2014년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그 유가족 곁에도 박래군이 있었습니다. 진상 규명 활동과 더불어 유가족을 지원하고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또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죠. 그는 세월호 참사를 가까이 목도하면서 생명 안전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4·16 재단을 설립합니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함께, 또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과 함께 연대합니다. 너무 많은 죽음이 이유도 없이 스러져가고,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죠. 진실을 외치는 투쟁마저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 퍼지곤 하지만 결코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고난은 투쟁이라는 동력이 되어 끊임없이 그를 추동하죠.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들의 증언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고통에 더 공감해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바로 나와 내 가족이 피해자가 되고, 유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p.433





 너무 많은 죽음들, 눈물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알고 있었던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이었고요, 용산 참사도 세월호 참사도 그랬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분노하고 울고 있었어요. 선진 민주 사회라고 운운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안타까운 죽음이, 의뭉스러운 죽음이, 인권이 유린당한 죽음이 흘린 피를 자양분으로 그저 비대해지기만 한 것 같달까요. 정말 곳곳마다 박래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며 같이 눈물을 훔칩니다. 그가 지나온 인권 투쟁의 길에는 느리지만 확실하고도 분명한 변화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편하게 누리고 있는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도 잘한 일이 있다면? 눈물 흘리는 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려 했고, 그 눈물의 온기를 기억하려고 애썼던 일일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흘리는 눈물에는 온기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음을 잊지 말자." 그래야 사람으로 살 수 있으니까. p.439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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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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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일 아침 자습 시간에 칠판에 적힌 대여섯 개의 한자를 줄줄이 받아 적었던 기억이 나요. 정규 과목은 아니었고 교과목이 시작되기 전 조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의 재량으로 한자를 배우던 것이었죠. 나중에는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를 알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복잡하고 작은 글자 하나에, 획과 획이 모여 쌓인 서사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참 신기했더랬죠. 삐뚤빼뚤 그리듯이 써나가던 한자와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각 한자의 유래가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요. 아 그리고 감사하게도 선생님 덕분에 그 시절 어휘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기도 했죠.





 한문을 좋아하게 된 건, 한 글자라도 손에 꼭 쥐고 여러 번 공글리며 그 안에 담긴 뜻을 헤아려보게 해주는 이 공부의 사려 깊은 방법이 매력적임을 알게 되어서이다. p.219, 習[습] 익히다

 그래서 종종 복잡한 한자를 마주할 때면 검색 보다 먼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합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획들을 가늠해 보며 과연 이 한자는 무슨 뜻을 품고 있을지 짐작해 보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한자의 기분》도 그 결을 같이 한다고 느껴졌습니다. 다만 '한자'와 '기분'이 서로 상통하는 내밀한 접근이랄까요. 한문학자인 저자는 그것을 오롯이 해냅니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한자로 하나, 하나 엮어냈거든요. 하나의 한자를 두고 깊게 톺아보는 과정에서 흐르는 감성적인 사유들을 읽다 보면 그 전체적인 과정이 퍽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열의를 가지고 수학하는 학문 속에서 그 주체(한자)를 가지고 감정까지 톺아보는 관계의 확장도 놀랍고요.







 《한자의 기분》은 총 12부, 각 부마다 열 자의 한자 다루고 있습니다. 무려 120자의 달하는 '한자'와 그에 얽힌 '기분'이 있는 것이죠. 학문에 대한 열의와 학자로서의 고민, 관계의 차고 더운 온도, 부대끼고 가라앉는 감정, 그럼에도 불현듯이 반짝이는 영감과 고요하게 흐르는 사유들이 한 자의 한자를 통해 정의됩니다. 혹시 '한자'라서 괜스레 어렵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나 기우였고요. '기분'에 초점을 맞추고 각 한자에 대한 저자만의 고유한 해석을 타고 흐릅니다. 낯선 한자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고 익숙한 한자들은 다시 새로워집니다.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던 한자들이 저자의 감정과 만나 비로소 유의미하게 생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또다시 생활을 집어삼키려는 기분 앞에서, 기분의 해명이라도 세세히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매일 한자 한 글자씩을 골라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 고쳐서[改] 좋은[善] 쪽으로 가려고 애쓰며 살아낸 날들을 증명할 글을 써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덩그러니 기분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한자에 기대어 기분을 비추어볼 수 있는 시간이기에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p.247, 改[개] 고치다

 언젠가 읽은 뇌과학 책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명확한 이름을 지어주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읽은 적이 있는데요, 이는 여러 가지 효용성이 있습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우선 그 감정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되고, 모호했던 감정의 실체가 명확해지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대처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또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타인과의 의사소통 과정 속 불필요한 오해로 인한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되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전반적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한자의 기분》도 이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물론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서요.





 하늘도 땅도 훤해서, 낱낱의 사물들이 자신의 빛깔을 다 드러내버리는 낮이 자주 버겁다고 느낀다. 겨울과 여름 아닌 가을과 봄이 어렵고 버거운 것과 같은 이치다. 낮에 위안 삼는 건, 기다리면 곧 밤의 고요가 온다는 생각. 그리고 밤 너머엔 또 아침이 있다는 생각. 기다리는 것이 분명한 사람은 마냥 슬퍼만 하거나 울적한 기분에 빠져 있지 않을 수 있다. p.49, 晝[주] 낮

 晝(낮 주)를 떠올리며 '낮이 버겁다, 낮에 위안을 삼는 것은 밤의 고요가 온다는 생각'이라는 구절에서 오래 머물기도 했습니다. 너무나도 밝은 낮의 빛이 숨기고 싶은 마음 구석구석을 여지없이 파고드는 느낌 때문에 그늘이라면 조각이어도 좋으니 어디든 숨어버리고 싶었던 기분을 느낀 적이 있던 터라 '晝'는 제게 잠시 따갑고 무거운 감각을 일깨웠기 때문이죠. 이렇듯 저자가 감각한 한자는 다시 독자에게로 흘러 새로운 감상을 떠올리게 만들며 공명하기도 합니다.







 한두 페이지 정도의 짧은 산문들이라 산뜻한 리듬으로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素[소] 하양'은 마치 산문시처럼 잔잔한 운율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팔랑팔랑 넘기다가 마음에 들거나 궁금한 한자가 나오면 멈춰 골라 읽기도 좋습니다. 압축적인 한자를 풀이하며 감정과 상통하는 과정은 감성적이기도 해서 버스럭 거리는 마음에 적절한 수분감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소란스럽지 않은 사유들 덕분에 책을 넘기면서 가볍게 사색도 해봅니다. 한자를 한 획, 한 획 톺아보고 마음의 결을 한 결, 한 결 고르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흐르곤 했거든요.





 옛글에선 겨울·밤·장마의 시간을 아울러 '삼여三餘'라고 썼다. 이 세 종류의 시간에는 여유롭게 방 안에서 독서에만 몰두하기 좋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밥 식食'자가 들어가 있는 '餘' 자는 애초에 밥이 남을 만큼 넉넉하다는 뜻이다. 눈 내리는 겨울, 세상이 잠시 멈춘 밤, 비가 쏟아지는 여름은 모두 소란한 세상의 반대편에 마련된 비밀기지와도 같다. p.216, 餘[여] 남다

 삼여, '세 가지의 여가'. 좀 더 찾아보니 독서삼여(讀書三餘)라 한다고 합니다. 겨울은 농사일이 없고, 밤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친 후이고, 장마는 궂은 날씨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이 시간들을 활용하면 공부할 여유가 충분하니,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거죠. 계절이 계절인지라 눈이 펑펑 내리는 깊은 밤의 심상이 떠오릅니다. 작은 스탠드 하나 키고, 폭닥한 이불을 덮으면 '소란한 세상의 반대편에 마련된 비밀기지' 품에서 《한자의 기분》을 읽는 기분은 또 어떨까요.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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