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자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일 아침 자습 시간에 칠판에 적힌 대여섯 개의 한자를 줄줄이 받아 적었던 기억이 나요. 정규 과목은 아니었고 교과목이 시작되기 전 조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의 재량으로 한자를 배우던 것이었죠. 나중에는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를 알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복잡하고 작은 글자 하나에, 획과 획이 모여 쌓인 서사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참 신기했더랬죠. 삐뚤빼뚤 그리듯이 써나가던 한자와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각 한자의 유래가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요. 아 그리고 감사하게도 선생님 덕분에 그 시절 어휘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기도 했죠.





 한문을 좋아하게 된 건, 한 글자라도 손에 꼭 쥐고 여러 번 공글리며 그 안에 담긴 뜻을 헤아려보게 해주는 이 공부의 사려 깊은 방법이 매력적임을 알게 되어서이다. p.219, 習[습] 익히다

 그래서 종종 복잡한 한자를 마주할 때면 검색 보다 먼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합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획들을 가늠해 보며 과연 이 한자는 무슨 뜻을 품고 있을지 짐작해 보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한자의 기분》도 그 결을 같이 한다고 느껴졌습니다. 다만 '한자'와 '기분'이 서로 상통하는 내밀한 접근이랄까요. 한문학자인 저자는 그것을 오롯이 해냅니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한자로 하나, 하나 엮어냈거든요. 하나의 한자를 두고 깊게 톺아보는 과정에서 흐르는 감성적인 사유들을 읽다 보면 그 전체적인 과정이 퍽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열의를 가지고 수학하는 학문 속에서 그 주체(한자)를 가지고 감정까지 톺아보는 관계의 확장도 놀랍고요.







 《한자의 기분》은 총 12부, 각 부마다 열 자의 한자 다루고 있습니다. 무려 120자의 달하는 '한자'와 그에 얽힌 '기분'이 있는 것이죠. 학문에 대한 열의와 학자로서의 고민, 관계의 차고 더운 온도, 부대끼고 가라앉는 감정, 그럼에도 불현듯이 반짝이는 영감과 고요하게 흐르는 사유들이 한 자의 한자를 통해 정의됩니다. 혹시 '한자'라서 괜스레 어렵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나 기우였고요. '기분'에 초점을 맞추고 각 한자에 대한 저자만의 고유한 해석을 타고 흐릅니다. 낯선 한자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고 익숙한 한자들은 다시 새로워집니다.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던 한자들이 저자의 감정과 만나 비로소 유의미하게 생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또다시 생활을 집어삼키려는 기분 앞에서, 기분의 해명이라도 세세히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매일 한자 한 글자씩을 골라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 고쳐서[改] 좋은[善] 쪽으로 가려고 애쓰며 살아낸 날들을 증명할 글을 써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덩그러니 기분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한자에 기대어 기분을 비추어볼 수 있는 시간이기에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p.247, 改[개] 고치다

 언젠가 읽은 뇌과학 책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명확한 이름을 지어주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읽은 적이 있는데요, 이는 여러 가지 효용성이 있습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우선 그 감정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되고, 모호했던 감정의 실체가 명확해지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대처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또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타인과의 의사소통 과정 속 불필요한 오해로 인한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되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전반적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한자의 기분》도 이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물론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서요.





 하늘도 땅도 훤해서, 낱낱의 사물들이 자신의 빛깔을 다 드러내버리는 낮이 자주 버겁다고 느낀다. 겨울과 여름 아닌 가을과 봄이 어렵고 버거운 것과 같은 이치다. 낮에 위안 삼는 건, 기다리면 곧 밤의 고요가 온다는 생각. 그리고 밤 너머엔 또 아침이 있다는 생각. 기다리는 것이 분명한 사람은 마냥 슬퍼만 하거나 울적한 기분에 빠져 있지 않을 수 있다. p.49, 晝[주] 낮

 晝(낮 주)를 떠올리며 '낮이 버겁다, 낮에 위안을 삼는 것은 밤의 고요가 온다는 생각'이라는 구절에서 오래 머물기도 했습니다. 너무나도 밝은 낮의 빛이 숨기고 싶은 마음 구석구석을 여지없이 파고드는 느낌 때문에 그늘이라면 조각이어도 좋으니 어디든 숨어버리고 싶었던 기분을 느낀 적이 있던 터라 '晝'는 제게 잠시 따갑고 무거운 감각을 일깨웠기 때문이죠. 이렇듯 저자가 감각한 한자는 다시 독자에게로 흘러 새로운 감상을 떠올리게 만들며 공명하기도 합니다.







 한두 페이지 정도의 짧은 산문들이라 산뜻한 리듬으로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素[소] 하양'은 마치 산문시처럼 잔잔한 운율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팔랑팔랑 넘기다가 마음에 들거나 궁금한 한자가 나오면 멈춰 골라 읽기도 좋습니다. 압축적인 한자를 풀이하며 감정과 상통하는 과정은 감성적이기도 해서 버스럭 거리는 마음에 적절한 수분감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소란스럽지 않은 사유들 덕분에 책을 넘기면서 가볍게 사색도 해봅니다. 한자를 한 획, 한 획 톺아보고 마음의 결을 한 결, 한 결 고르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흐르곤 했거든요.





 옛글에선 겨울·밤·장마의 시간을 아울러 '삼여三餘'라고 썼다. 이 세 종류의 시간에는 여유롭게 방 안에서 독서에만 몰두하기 좋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밥 식食'자가 들어가 있는 '餘' 자는 애초에 밥이 남을 만큼 넉넉하다는 뜻이다. 눈 내리는 겨울, 세상이 잠시 멈춘 밤, 비가 쏟아지는 여름은 모두 소란한 세상의 반대편에 마련된 비밀기지와도 같다. p.216, 餘[여] 남다

 삼여, '세 가지의 여가'. 좀 더 찾아보니 독서삼여(讀書三餘)라 한다고 합니다. 겨울은 농사일이 없고, 밤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친 후이고, 장마는 궂은 날씨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이 시간들을 활용하면 공부할 여유가 충분하니,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거죠. 계절이 계절인지라 눈이 펑펑 내리는 깊은 밤의 심상이 떠오릅니다. 작은 스탠드 하나 키고, 폭닥한 이불을 덮으면 '소란한 세상의 반대편에 마련된 비밀기지' 품에서 《한자의 기분》을 읽는 기분은 또 어떨까요.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