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생각하는 게 귀찮고 사는 게 버겨울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식하며 살아가는게 어디 쉽겠는가. 그래서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집요함과 통찰이야말로, 부조리와 희망과 죽음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비인간적 유희를 구경하는 관객의 특권적 자질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삶의 지겨운 시간들을 인식하고 현실의 답답함을 직시하며 담담히 살아갈 인간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영화나 신화에서 가능할 뿐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학생시절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시험들을 준비하다 소리없이 사라졌고, 혈기왕성 때에는 생활의 궁핍함과 성적 허전함을 해결할려는 순간 훌러덩 지나갔으며, 지금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출퇴근과 예금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 한 해가 가버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끽연을 하며 사색을 도모해 보지만 어느새 간사한 손가락은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나마 빈틈없이 흘러가는 시간속에 감정적 충족을 주는 것은 옛 선인들이 남긴 생각이나 신간의 책장을 넘기는 순간인 것 같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책 제목을 보니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제목이 마뜩찮다. 위대하다기보다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야기아닌가. 철학이란 단어가 두번이나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렵지 않다. 어렵지 않다는 말은 생각했던 것보다 내용이 너무 평이하다는 애기다. 철학적으로 안살았다는 측면으로 보면 당연히 어렵지 않아야 하지만 뭔가 색다른 냄새를 풍기는 듯한 책제목에 끌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교육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인 이유로는 저자의 다른 책인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가 집에 어엿하게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이던 아이에게 철학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선물했던 책이 저자의 책이었고 그 다른 모습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철학자하면 서양의 기라성같은 철학자들이 먼저 떠오르는데 그 지면을 유독 동양의 철학자들에게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동양의 철학적들은 흔히 철학자라고 말하지 않는데 말이다. 공자, 노자, 장자를 누가 모르겠는가. 누가 공자를 철학자라고 하고 누가 노자를 철학자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도가도 비상도"처럼 철학자를 철학자라고 부른다면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구성상 다행은 탈레스를 처음 언급해서 균형이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상앙이나 현장이나 이규보나 김시습은 정말 예외다. 그들을 누가 철학자라고 부르겠고 그것을 누가 쉽게 언급이나 하겠는가. 부럽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과연 철학을 했을까. 철학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배고픈 자는 허기를 달래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다복했다. 너무 다복해서 무료함에 힘겨워 서커스를 원했던 것이다. 철학 자체가 정신적 유희가 아닌가. 이 책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사람은 스피노자이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철저하게 파문당했던 스피노자야말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도 휠씬 인간적이고 철학적으로 살았다. " 스피노자의 철학 외에 철학이라 할만한 것은 도대체가 없다. 213p" 하물며 괴테조차 나의 정신보다 더 심오하고 순수하다고 말했겠는가. 스피노자에 말로 유명한 철학자가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라 감히 선언하고 싶다. 내가 진리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 두어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정말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