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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19년 2월
평점 :
“2018년 8월 15일 일본의 아베신조는 A급 전범 도조히데키 등의 합사된 도쿄 구단키타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납부했다. 또한 이날 일본 총무상 등 각료들과 여야 의원 80여명은 집단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2013년에는 아배신조 총리가 직접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 참배를 단행했고, 이후에는 매년 공물을 보내고 있다. -15P-
위 글을 보면 일본 정치인의 행태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이 선출되거나 여야 당대표가 선출되면 어김없이 현충원에 참배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 이유를 이 책에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지적하고 있다. 즉 신사 참배가 문제가 아니라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는 신사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어떻게 해서 A급 전범들이 분류되고,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지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처형당한 전범 7명을 화장해 도쿄만에 뿌렸다. 그러나 1948년 12월 15일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인 산몬지 쇼헤이가 유골 일부를 회수해 근처의 흥선사에 맡겼다가 1949년 5월 이즈산의 흥아관음사에 비밀리에 안장했다. 그 후 전범들이 다시 일본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1960년 8월 16일 아이치현의 산가네산의 정상에 옮겨서 ‘순국칠사묘’로 현창되었다. 인류를 전쟁으로 내몬 전범들이 순국자로 화려하게 재등장한 것이었다. 만일 독일에서 나치 전범으로 사형당한 인물들의 유골을 몰래 수습해 ‘순국지사묘’라고 추앙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유럽 각국에서 단교 조치에 나설 것이고, 독일 내부적으로도 ‘나치즘 군국주의 청산법’, 아우슈비츠 부인에 관한 처벌법’ 등에 의해 사법 처리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법처리는커녕 1978년 일본에 우경화 바람이 불 때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 14명을 합사했다-36P-”
이와 더불어 저자는 1945년 9월에 열린 일본 전범들을 처리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철저하게 전승국의 관점과 이익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의 행적에 국한하고, 1905년 을사늑약부터 40년 동안 한국을 침략한 전범들은 모두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일왕과 재벌을 전범 기소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군국주의의 최정점에 있는 일왕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책임을 묻지 않은 것과 같고, 만주 침략과 중국 침략은 재벌들과 긴밀한 공조 속에 이루어진 것이고 낙후된 일본 경제는 전쟁에 의해서만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으므로 재벌들은 침략전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음에도 일체의 처벌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은 책제목에서 보이듯이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의 아나키즘 독립전쟁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스포일러 일 듯 해 과감히 생략하고, 제 3장에서 언급된 ‘고종은 왜 망국 군주가 되었는가’에 대해 언급하고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만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집단 망명으로 일제 점령에 항거한 세력이 있는데, 이들의 당파적 배경은 대부분 소론 계열이며 사상적 배경은 양명학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한 가지 더 웃기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만동묘 복설’에 관한 것이다.
“최익현의 스승이었던 화서 이항로는 대원군이 내린 벼슬을 사양하면서 ‘만동묘 복설’을 요구했는데. 최익현 역시 1873년 11월 재차 올린 상소에서 황묘(만동묘)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다면서 만동묘 복설과 서원 복구를 건의했다. 만동묘는 군사를 보내준 명나라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우암 송시열이 세운 것이다. 의종(1628~1644)을 끝으로 명나라는 망한지 230여 년이 되었는데, 청나라도 아니고 망한 명나라를 사대하는 만동묘 복설을 요구할 정도로 이항로와 최익현의 현실 인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최익현의 대원군 비판 상소를 계기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140P-”
일단 역사적 큰 사건들을 대략적으로 나열하자면, 1876년 강화도 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 1895년 민비시해 1896년 아관파천 1904년 러일전쟁 1905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을사늑약 1909년 안중근 의거, 1910년 한일병탄 늑약 등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1910년 한일병합(?)이 되기 전까지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종은 개화를 표방했으나 정작 정권은 민청 수구파의 손에 있었다.
“ 급진개화파가 추진하는 조선의 대개혁을 추인하는 듯했던 고종은 상황이 달라지자 태도를 바꾸었다. 고종은 신정부가 대개혁을 단행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마음은 이미 신정권을 떠나 있었다. 고종은 적은 병력의 신정권이 방어하기 곤란한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거듭 요청해 관철시켰고 청군 1500명이 돈화문과 신인문을 공격하면서 수세에 몰린 개화파는 갑신정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화를 추진한다면서 정권은 수구 세력에게 주고, 부국강병한 근대 국가 건설에 목숨을 걸었던 개화당을 제거했다. 아울러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를 제거한 후 일본군과 손잡고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했다.-149-”
동학농민운동관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조선정부(고종)는 동학농민군과 연합함으로써 일본의 침략 저지에 나서야 했으나 오히려 관군을 일본군에게 붙여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즉 한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인 임금과 신하가 한통속이 되어 망국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은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