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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평점 :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책을 받아 든 순간 느낀 첫 번째 느낌은 이 정도면 읽을만 하다 였다. 핸드북 사이즈에 200페이지 가량의 분량은 '인문학'이라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확 줄여주는 요소가 되었다. 책을 읽기 전 아무리 소재가 애니메이션이지만 그를 통해 논하게 될 주제는 인문학적 내용이니 만큼 흥미와는 별개로 시작부터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의외로 작고 가벼웠다. 뭐, 이 정도쯤이야 하는 자신감이 들면서 당장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는 책 속으로 점점 몰입되어 들어가 결국 나는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두껍지 않은 분량이 한 몫을 하긴 했으나 더 큰 이유는 저자가 '현대인'의 난해한 고민을 애니메이션처럼 간단하고 명료하고, 게다가 재미있게 풀어 낸 덕분이다. 그러고보니 처음에 느꼈던 분량이나 사이즈의 부담감 해소 역시 저자가 격의 없이 독자에게 다가가 소통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나 싶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철학'을 끄집어 내어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지를 논한다면, 사실 영화 만큼이나 즐비한 무수한 애니메이션들을 언급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작정을 하면 주제별로 엮어서 수많은 사례를 집어 넣어 좀더 그럴싸해지는 포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로 이 책에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농축해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핵심만을 얘기한다. 마치 신문 칼럼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제한된 분량 속에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쉽게 쓰되, 주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긴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독자는 그래서 쉽게 읽으면서도 지적인 허영을 느낄 수 있다. 쇼펜하우어, 사르트르, 카뮈의 사상을 언급해도 어렵거나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돌아 보면, 내가 그 사상적 배경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잘 버무려서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충분히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것이다.
이처럼 에세이만큼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소재도 아주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현대인'의 영원한 숙제인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원인과 분석, 그리고 명쾌한 해결책을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소비 중독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나'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이 왜 그렇게 되었는 지에 대한 첫 번째 이유로 시대의 변화를 꼽고 있다. 그는 특이하게도 1990년 이후를 '현대'라고 규정한다. 그 이전은 근대요, 더 이전은 중세로 구분의 가장 큰 축은 바로 인간 '개인의 자아 정체성'의 주체에 있다고 설명한다.
중세가 절대 권력에 의해 '자아 정체성'이 부여되는 시기라면, 근대는 국가, 민족, 사회, 가족의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절대자도 집단도 아닌 개인 스스로가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대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집단의 정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오직 '나'라는 '자아'는 내가 획득하고 증명해보여야 하는 시대다. 자원의 한계와 인구의 증가가 치열한 경쟁의 원인이 아니라 국가, 조직이라는 보호막이 벗겨진 개인은 자유를 느낄 틈도 없이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획득한 '자유'에 당황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이 현대의 우리 모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노예를 해방시켜주어도 어떻게 살아갈 줄 모르고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을 보고 바보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해방의 아노미를 겪으며 다시 '조직'의 향수에 매달리는가 하면, 황폐화되어가는 내면을 화려한 겉치레로 채우려는 모습이 결코 그들과 다르지 않다. 자유는 주어졌으나 우리는 진정으로 그 자유를 누릴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과 화려한 소비의 구렁텅이 속에서 급증하는 자살과 갑자기 불어닥친 어색한 인문학 열풍은 이러한 현대인의 자아 분열을 탈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아이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현대인도 지금 그 성장통을 겪고 있는 지 모른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반드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인 성장은 하겠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답을 인문학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세를 탈피한 최초의 인물로 '돈키호테'를 꼽는다. 그는 처음으로 개인적인 '자아'에 눈 뜬 인물이다.
그리고 국가와 조직,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근대의 인물들을 <그렌라간>에서 찾는다.
"<그렌라간> 이 특히나 더욱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집단성'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근대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전면적 긍정과 옹호 위에서 성립되었다. <그렌라간>에서 그렌단이 하는 것, 그들이 긍정하는 것, 그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소의 핵심에는 결국 무엇이 있는가? 그건 인류를 위한 '역사적 행위'이다." ---p.47
한 때 어른과 아이들을 모두 매료시켰던 <원피스>는 바로 개인에게서 '자아'를 찾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원피스>가 그린 이상향의 모습만으로는 복잡한 '현대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강철의 연금술사>, <충사>, <진격의 거인>을 통해 현대인이 자아를 찾는 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부정적인 측면 속에서, 어떻게 현대인으로서 삶을 보다 진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검토해봤다. 하나는 우애, 즉 더 이상 국가 같은 집단에의 함몰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유대감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삶, 즉 우리가 늘 보고 살아가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 그 배후에 나만의 삶을 '지닐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 보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지님으로써 보다 진정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인간은 진정 인간다운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온갖 소비 생활과 현실의 강요에서 벗어나, 이 세 가지 차원을 복원시켜나가는 것이 현대인에게 걸린 중요한 과제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내달려온 '현대'라는 지점을 진정한 '현대인'으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p.126~127
이 책의 1부와 2부에서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모습을 찾았다면, 3부에서는 좀더 고차원적인 삶을 꿈꾼다. 저자의 애니메이션 감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지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 <초속 5cm>로 알려진 신카이 마코토 감독,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아이>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저자는 이 부분은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앞의 두 파트는 교양 삼아, 뒤의 한 파트는 구경삼아" 읽으라고 권하고 있다. 나 역시 인물에 대한 분석보다는 그저 작품 전체가 주는 메시지와 감동에 마음을 맡기고 싶다.
인문학이 주는 위안과 힘에는 늘 공감을 한다.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늘 현실에서의 접목이 숙제로 남는다. 현실과 이상의 갭으로 때때로 좌절감을 느끼게 하고 이전의 상태로 회귀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도 이것을 모를 리 없다.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는 '현대인'에게 그는 분명하게 얘기한다.
그 메시지는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보람 중에 하나다.
"현실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늘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그냥 살아가다보면 때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 현실과 삶은 모두 우리 인생의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대체로 현실에만 장악되어 있는 현대인에게는 삶이 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삶의 추구란, 바로 우리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며, 꿈을 잊지 않는 것이고, 매일 마주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것이며, 이 순간의 소중함으로부터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룬 애니메이션들은 분명 그 점을 중요하게 속삭이고 있다. 삶을 잊지 말라고, 우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