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정신]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느낌은 고급스러운 경건함이었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두께의 양장본, 두툼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그리고 금색의 화려한 책갈피줄까지. 책을 읽는 것이 조심스럽고, 경건한 마음이 절로 든다. 책의 표지를 뚫어져라 보지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을 관통하고 있는 열쇠의 의미는 무엇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대학 강사이자 책에 대한 전문가이다. 도서관에서도 이 책과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한다고 한다.
사실 책을 좀더 잘 읽고 싶다는 마음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책의 방향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목적은 같았으나 제대로 잘 읽기 위해 필요한 책을 소개해주거나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그간 수많은 그동안 수많은 이념과 사상, 권력과 힘에 의해 조작되고, 이용된 '책'이라는 지적인 매체가 만들어 놓은 우매한 결과를 실랄하게 보여준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그 의도된 오류의 일부는 아직도 그대로 유통되거나 맹신되고 있다는 것이다.
분량이 적지 않음에도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엄청난 책을 학문하듯이 읽는 저자는 어렵게 쓰는 것이 결코 멋드러진 것이 아님을 이 책의 서술 방식을 통해서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글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 좋다. 그 점에서는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그는 물리학을 문외한에게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지 못하면 자기도 잘 모른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든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잘 안다는 것'을 확인할 실체가 없으므로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파이만의 명제가 옳다면, 뉴턴은 자기가 알고 있던 그것들을 잘 몰랐던 셈이다." --- p.153
술술까지는 아니지만 강의를 듣는 것처럼 잠깐 딴 생각을 하면 놓칠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쓰여졌다. 물론 책 내용의 깊이가 아니라, 표현의 깊이와 수준이 그렇다. 강의하듯 적절한 질문을 통한 긴장감 조성과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결론으로 독자를 안전하게 이끄는 글의 힘에서 저자의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진다. 더불어 지루할 틈없이 제시되는 많은 사진 자료와 설명은 지치지 않고 책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해준다. 독자를 배려하는 책이란 이런 것이라는 모범을 보여준다.
구성은 그렇고,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일 것이다. 앞서 얘기한 것들은 사실 서막에 불과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충격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책은 처음부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포르노소설이 프랑스대혁명을 일으켰다고?"
이 무슨 억지 주장인가 싶지만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성'을 억압한 동시에 폐쇄적인 공간에서 정작 그 억압을 주도했던 권력층의 대비되는 문란한 '성'에 대한 관념을 보면 조금씩 수긍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버림으로써 민중은 평등에 대한 욕구를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프랑스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억압의 역사는 어처구니 없게도 지금까지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 실제와 표현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통제 당해 왔다. 유독 '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왜 그래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중요한 문제라 좀 길게 대답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르노그래피는 그 자체로 '성'이 아니에요. 성에 대한 표현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전쟁터에 서 있다면 공포에 떨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찍은 사진이나 비디오를 보면서 '즐기고' 있지 않나요? 실제가 아니라 표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표현을 보고 나서 누가 사진이나 비디오, 그림을 만든 사람에게 '나쁜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하나요? 다시는 전쟁하지 말라고 그 예술가에게 말하나요?
여기에서 다룬 포르노그래피는 성 그 자체가 아니라 성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그 표현에 대해 나쁘다거나 좋다는 판단을 왜 '국가'가 독단적으로 내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느냐 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 의식이죠. 더구나 20세기 말에 많은 학자들이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포르노그래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전혀 해가 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외설적인 표현과 관련해서 가장 적절한 비교 대상은 잔인한 전쟁영화나 범죄영화, 장르소설 같은 거예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엄청나게 잔인하고 아주 자세하게 표현해도 괜찮고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는 그렇게 하면 왜 안되는 걸가요? 하나는 죽이는 행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리는 행위에 대한 것이잖아요. 포르노그래피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실까지 있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p.96~97
국가의 이런 개인적인 표현에 대한 통제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과학책과 과학자가 또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철학은 또 어떤 편견으로 권력에 이용되어 왔는 지에 대한 실랄한 폭로가 이어진다.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아 고문을 당하다 사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는 묻혀 버리고, 권력에 복종한 갈릴레이가 역사에 길이 남은 이유. 진정으로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실천가 묵자가 사라지고, 공허하고 싱겁기 그지없는 공자가 살아남은 이유. 모두 그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된 결과임을 저자는 여러 가지 증거로 증명해보인다.
작년 우연히 강신주 님의 '묵자'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충격을 받았었다. 왜 우리는 묵자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을까?
"그런 것을 어떻게 의도적으로 양산하게 만드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류대학의 입학시험에 필요한 것으로 지정하면 된다(지금 한국에서는 진보적인 신문조차 그 의심스러운 고전 읽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물론 그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은 주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고전 해설서에 담겨 있다. 그렇게 해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는 대단하다. 시간의 사용은 마치 기회비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자인 소크라테스를 읽게 만들면 민주주의자인 페리클레스나 솔론을 읽을 시간과 여유가 줄어들고, 엘리트주의자인 공자를 읽게 하면 평화주의자이며 하층민의 대변자였던 묵자를 읽을 시간과 여유가 없다." --- p.179~180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한번 틀어 둔 방향키가 더 이상 권익을 대변하지 않음에도 그대로 관성을 타고 계속 흘러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무수한 이유들로 우리는 책이 펼쳐 놓은 덫에 걸려 버리는 가 하면 억울하게 갇혀 있는 책들을 외면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책은 말없이 몇천 년을 흘러오면서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약이 되기도 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이제 독자의 능력에 달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책읽기,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일까?
"고전은 작품 그 자체보다 맥락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텍스트보다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저작물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전과 관련한 현대의 저작물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그 텍스트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쓰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비로소 그것들은 생명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 p.196
"오래된 고전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학문을 연구하듯 읽어야 한다. 그래야 책에 먹히지 않고 책을 먹을 수 있다.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마시듯 읽을 수 있는 동시대 소설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책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게 고전을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 독자들 가운데는 위에 들먹인 책들 한권 한권의 쪽수를 듣는 것만으로도 체해버릴 수 있다." --- p.198
이어 '인간을 결정하는 것이 본성인가 양육인가'라는 논쟁의 역사 속에서 억압된 우리의 정신과 삶,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혜의 화신이면서도 파괴의 대상이 되어왔던 '책'의 학살에 대한 역사를 다룬다.
머리를 해머로 맞은 듯 각성의 충격을 추스리며 책을 덮는 순간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라는 부제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책의 구석구석에 이 부제가 쓰여 있었을 텐데 이제서야 눈에 띈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인간의 속성이 여지없이 여기서도 발휘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는 이 본성이 바로 책의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책표지 한 가운데 강렬하게 실려 있는 책을 관통하고 있는 열쇠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