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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2 - 경기도 ㅣ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2
신정일 지음 / 박하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서울을 떠나 한 4년 정도 경기도에서 지낸 적이 있다.
서울과 인접했던 곳이었기에 체감적으로는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는데
주소를 쓸 때 '서울특별시' 대신에 '경기도'로 시작할 때면
내가 밟고 있는 곳이 다른 곳이었구나 느끼곤 했었다.
그렇게 4년을 경기도라는 행정구역명을 사용했지만
그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은 한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너무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들어왔던 이름이라
질문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려 현종 9년(1018) 경기는 개성을 둘러싼 주변 구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랐다. 이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그때까지 개성부가 관할하던 적현과 기현을 합쳐 경기라고 불렀다. 적현과 기현을 합쳤으므로 적기라고 불러야 옳았겠지만 당시 적현을 다른 말로 경현이라고도 불렀으므로 경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p.24
막연히 서울의 주변 지역이라 서울 경(京)을 써서
경기라고 쓰게 되지 않았을까 했는데
유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고작 4년 살았고, 그것도 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아서
아는 곳보다는 생소한 곳이 더 많지만
그럼에도 경기도 북부의 인접 지역에 살았기에
꽤 친숙한 곳이 많다.
아는 듯 모르는 경기도를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 같아서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2] 경기편을 읽게 되었다.
1편을 읽을 때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서울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새로운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2편 역시 익숙하지만
낯선 경기도의 모습을 또다른 볼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책은 지역별로 나눠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남한강에서 남한산성까지
여주, 양평, 광주, 성남, 하남시까지 다룬다.
사는 지역이라기보다는 주로
이동의 통로로 접해왔던 지역이다.
가장 인상적이고 꼭 가보고 싶은 곳은
'남한강의 제일 절경 청심루'이다.
해방 직후에 일어난 폭동으로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위치를 알리고 있는 표석만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저렿게 사라져버린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여주에 있는 청심루는 여주의 으뜸가는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누각으로
《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 《연려실기술》과 같은
옛 기록에도 그 아름다움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가정 이곡,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도은 이승은과 조선시대, 서거정, 신용개 등
숱한 문인들이 이 청심루를 찾아 시를 지어서
현판으로 걸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아름다움은 꽤 오래되었나 본다.
또한 하나 뿐인 대들보가 칡으로 된 것도
유명한 것중에 하나라고 한다.
청심루에 올라서면 여주팔경(신륵사의 저녁 종소리,
입암의 아침, 팔대수의 너른 숲, 영릉과 영릉의 맑은 기운,
연탄의 돛단배, 마암의 어선 등불, 파서성의 지나가는 비,
양섬에 내려앉는 기러기)을 거의 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보석같은 유산이 사라져 흔적만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여주에서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이야기가 눈에 띈다.
"여주시 상동에 있는 자안당自安堂 터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철종 때 세도가인 김병기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자안당이라는 당호를 지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이 집을 빼앗아 여주군청으로 삼았다. 그러자 김병기가 바로 그 옆에 똑같은 집을 짓고서 우안당又安堂이라는 당호를 붙이자 그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자식을 낳거든 김병기 같은 놈을 낳아야 한다"라고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현재 자안당터에는 여주교육지원청이 들어서 있다." ---p.42~43
2장은 역사 속 수난의 땅 강화도와 교동도를 다룬다.
강화에는 이름난 산과 절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절은 바로 전등사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길고 길다.
강화도도, 전등사도 몇 번 다녀왔지만
오래 전이라, 그리고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인지
그 느낌과 기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오래된 시간 만큼 절 구석구석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발가벗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인의 형상이 처마를 떠받치고 있다. 바라보기가 무척 애처롭기도 하지만 해학이 넘쳐나는 이 나녀상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온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사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가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여자와 닮은 나체 형상을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했다. 불경을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p.110
다음에 전등사에 다시 한 번 들르게 되면
속죄를 하고 있는 나녀상을 꼭 찾아봐야 겠다.
다음 3장은 남북으로 통하던 중요한 길목인
안산, 화성, 평택, 오산을 살펴본다.
산에 둘러싸인 바닷가 고을 안산,
바닷길이 열리는 대부도,
사도세자와 정조능이 있는 화성,
흥선대원군이 포로로 붙잡혀 간 마산포,
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원효대사 깨달음을 얻은 수도사,
그리고 한강 이남의 최고의 산성인
독산성이 있는 오산까지의 길로 마무리가 된다.
4장은 한양 남쪽의 큰 도회지
안성, 이천, 용인, 의왕, 광명까지의 길로 안내한다.
경기도의 최남단은 안성이라고 한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도 안성을 지나고 나면
아주 멀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성은 '안성맞춤'의 유기가 대표적이지만
남사당패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 간 적이 있다.
사실 바우덕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집에서 적지 않은 거리였지만
꽤 알찬 공연과 구성에 당일로 다녀오면서도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바우덕이는 남사당패를 이끄는 여장부였다. 안성 바우덕이는 전국에 널리 알려졌었다. 경복궁 중건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안성 사당패를 불러 걸판지게 놀이판을 벌였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와 춤, 줄타기는 일품이어서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전한다.
그런 사연으로 인하여 1910년 안성 남사당패에는 여자인 바우덕이가 꼭두쇠 자리에 앉는 '변혁'이 일어났다. 그 후 안성 바우덕이는 13년간 안성 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병을 얻어 거리에서 죽었다고 전해온다." ---p.183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할머니 덕분에
나 역시 초등학교 때 전 영세를 받고
데레사라는 세례명도 가지게 되었다.
그즈음 난생 처음으로 성지순례라는 것을
가게 되었는데 버스로 한참을 가서 내린 곳은
낯선 성당이 있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성당을 둘러보면서 각인이 되었던 이름이
'김대건 신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라는 것은
한참 후에나 인식하게 되었지만
갔을 때의 느낌,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 때 갔던 곳이 바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비롯
프랑스 선교사였던 주교 페레올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그리고 참수형 후 버려졌던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업고 서울에서부터 150리 길을
달려와 무덤을 만들었던 신도 이민식이 묻혀있는
미리내 성지였고, 미리내 성당이었던 것이다.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시흥·용인·양평·화성·안성 일대 초기 천주교 선교 지역 중 하나였다. 이곳이 미리내로 불리게 된 사연이 이채롭다.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촌을 형성하여 살았는데, 밤이면 밤마다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미리내가 되었다고 한다." ---p.203
5장은 수원 화성에서 서해안까지
수원, 안양, 과천, 부천, 인천, 김포의
너른 지역을 살펴본다.

수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원 화성'이다.
아쉽게도 오가면서만 봤을 뿐
직접 발로 밟아보지는 못했는데
지척이라면 지척에 두고도 다녀오지 못해
가장 아쉬운 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기도 하다.
가장 과학적으로 축조된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지켜야 할 유산이다.
이 책 역시 다른 곳보다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정교하면서 기능적으로 계획된 도시.
그래서 자랑스럽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
경복궁 재건 시 국고는 파탄이 날 정도였고
백성은 노역과 공물로 피폐해졌었는데
이렇게 도시 하나를 건설하는데
아무리 과학적으로 만든다해도
경제적인 부담과 백성의 원성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미장공 295명 등을 비롯해 총 동원된 사람이 1만 1820명이었다. 그때 사용된 돌덩이가 18만 7600개에 벽돌은 69만 5000장, 목재는 2만 6200주, 철물이 55만 9000군, 기와 53만 장, 돈 87만 3250냥, 곡식은 1만 3300석이 소요되었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경비는 관가에서 염출하거나 백성들에게서 거두지 않고, 금위영과 어영청의 상번군을 10년 정지한 재원과 지방에 있는 예비비로 지출했다. 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일반 백성들이나 승군을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인부와 장인들에게는 노임을 주고 일을 시켰다." ---p.238
정조는 설계부터 동원된 사람과 장비, 공사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까지 이렇게 모두《화성성역의궤》에
기록해놓았다고 한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이면서 합리적인 멋진 왕이다.
6장은 서울 동쪽의 고을들인
구리, 양주, 남양주, 의정부를 다루고 있고,
7장은 경기 북부의 땅 포천, 연천, 가평을 가본다.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 마지막 8장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목 고양과 파주로 마무리가 된다.

어려서부터 살던 집 근처에 '서오릉'이 있었다.
그래서 학창시절부터 단골로 가던
대표적인 소풍지가 바로 '서오릉'이었다.
12년간 너무 자주 가서 아마도 한동안은
그쪽으로 발길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을 지나 다시 찾은 서오릉은 예전의
흥겨웠던 장소가 아니었다.
옛 선인들이 잠들어 있는
그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현장이었으며
훼손되지 않은 숲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자연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지척에 살고 있어
오전에 산책겸 운동을 하러 종종 들른다.
맑은 공기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놓고
정신을 쉬게 해준다.
너무 오래 봐와서 소중함을 몰랐던 것중에 하나가
바로 '서오릉'임을 다시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사적 제198호)이 있다. 서오릉의 총면적은 55만 3616평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5개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오릉은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기에 알맞다.
서오릉이 능지로 선택된 것은 세조 3년(1457) 때였다. 세자였던 원자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상 좋은 능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이 추천되자 아버지인 세조가 직접 답사한 뒤 경릉 터로 정했다.
그 뒤 성종 1년(1470) 덕종의 아우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이 들어섰다. 숙종 7년(1681)에는 숙종의 부인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쌍릉, 그리고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명릉이 들어섰다. 영조 33년(1757)에 영조의 부인 정성왕후의 홍릉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왕릉이 5기가 되어 '서오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p.363~364
이 서오릉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게 된 것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와 주인공이 되었던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초라하게 한 구석에 있는 그 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
살아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화려하게 누렸어도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마감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한다.
산책로 중간쯤에 위치한 그 능을 지날 때면
늘 한 번씩 그 무거운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래서 다른 곳보다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비록 책으로나마 경기도를 한 바퀴 돌고 나니
한 때 적을 두었고 바로 이웃해 있는 경기도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서울편보다 야화가 더많아 이야기를 따라
곳곳을 누비니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다.
이제 경기도일 뿐이다.
앞으로 전국을 누비고 더 나아가 북한의 곳곳까지
누빌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책으로 고스란히 나올 것이라고 믿으며
다음 행선지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