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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 정적의 조화
박홍규 지음 / 가산출판사 / 2009년 2월
평점 :
[구스타프 클림트, 정적의 조화]는 미술관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나에게 예술의 세계는 이런 곳이야 라고
알려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모르고,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무지한 사람에게는 다소 벅찬 느낌의
책이였기에, 대중적인 책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든 슬픈(?) 책이였다.
외술과 예술의 차이는 뭔가요?
당신의 눈에 클림트는 에로티시즘 화가인가요? 아니면 철학과 지성을 겸비한 정적인 화가인가요?
사실 클림트가 누구인지 조차 나는 몰랐다.
다만 책 표지에 그려진 그림들이 눈에 익은 느낌에
'이 참에 그림 공부 좀 해볼까?'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였다.
TV속 가전제품 광고나 두통약 광고에서도 등장하는
그 그림의 화가가 클림트였다는 것을 알고선,
대중적인 화가였나...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가 미술계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것은 20세기가 끝나갈무렵
또는 바로 지금 이라고 저자의 이야기에 의아함을 느껴본다.
많은 그림을 그렸고, 또 분리파의 수장으로서 많은 역할을 한 그가
이렇게까지 미술계에서 천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의 에로티시즘 화가라는 이미지 타이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처음에 이 <키스>라는 작품을 보고 클림트를 무척이나
싫어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유럽여행 중 미술관에서 다시 만난
<키스> 를 보고 클림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도대체 이 그림의 어떤 면이 그를 이렇게 줏대없는 이로 만든것일까?
그림과 음악등의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는것이 없으니 그저 느낌으로 가야할듯 싶다.
그런 무지의 내 느낌으로 이 <키스>라는 작품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외설이라 불릴만큼 에로틱하지도 않았고, 작가가 미술관에서 느꼈던 그 숭고한 사랑의 느낌 역시 받질 못했다.
그냥 평범한 사랑하는 연인의 그림...딱 그거 아닌가...근데, 왜 이리 호들갑이야..하는 생각밖에는.......
도대체 이 그림의 어딜 봐서 에로티즘이 보인다는 건지...라는 생각에 툴툴 거릴때즈음 등장해주시는 야시시한 그림들.
<철학> 이나 <법학>과 같은 그림들은 정말 야했다.
이런 그림들을 대학의 그것도 보수적인 법학부 천장에 그렸다는 클림트의 사상에 의문이 생겼다.
그도 분명 보수적인 대학의 천장에 어울릴만한 그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않았을까? 이렇게 홀라당 벗은 여인네들이
데굴데굴 붙어있는 그림을 반겨줄 철학과 교수님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본 상식이
아닌가 싶었기에 내 눈에 그는 정말 야한것을 좋아하는 에로티시즘 화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보수적인 미술계에 맞서 분리파라는 혁신을 일으켰다는 부분에서
그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이런 에로티시적인 그림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러고 나니 그의 또 다른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스>와 더불어 우리 눈에 익숙한 <아델레 브로흐 바우어>
클림트의 장식적 여인초상화가 극단에 이르게 한 작품으로
관능적인 느낌을 강화시켜 클림트가 2번이나 그림을 다시 그리게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클림트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II>를 그렸다.
<키스>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에서도 볼 수 있듯이 클림트는 단순히
야한 그림만 그린 화가가 아니라, 여성 내면의 관능적인 느낌을 끌어내어
마치 발가벗겨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렸던 것 뿐이다.
그만큼 그의 화가로서의 개성과 능력이 돋보였지 않나 싶은
그런 작품이라 생각되어진다.
뚜렷한 주관과 철학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온 클림트에 대한 평가는 정말 극과 극이다.
외설과 예술의 차이를 설명하기 힘든 것처럼 클림트에 대한 평가 역시 클림트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처음에는 외설적이다 라고 했던 <키스>가 유럽의 어느 카페에나 걸려있는 흔한 그림이라는 점이 상통할때쯤,
예술이다라고 평하는 순간 고급스러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키스> 가 활용되고 있다는 점등은
내가 믿는 만큼,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그렇게 클림트를 딱 어떤 잣대에 갖다 붙이기 전에 내가 그에대해 어떤 편견이나 오해를 하고 있는 지는 아닌지 부터
살펴보고 그의 그림 앞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눈에는 에로티시즘도 정적인 화가도 아닌 그저
외설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개성만점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