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하창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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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플링, 정글북의 저자, 영국의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즘의 전형..등의 고삐풀린 자유연상으로 책을 골라 들기가 조금은 꺼려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편견이나 기존 프레임에 기대지 말고 직접 읽고 판단한 후에 그에 걸맞는 명패를 걸어주리라 생각하길 잘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 믿는 아일랜드계 혼혈인도인 소년 킴(블), 그리고 진리를 찾아 티벳에서 인도로 온 노승의 구도기가 주된 이야기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물론 그 둘이 보여주는 '케미'는 지금도 전혀 올드하지 않은 쫀득함을 선보일 뿐더러, 서양인이 썼다기엔 무척이나 심도있는 동양적, 종교적 깨달음의 묘사는 더할나위 없지만. 게다가 힌두교와 이슬람교와 불교 등에 대해 자연스럽게 구분해내는 인상적인 분별력까지 더하면 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 퉁쳐서 신비화하는 건 불공정하다.

그 둘을 멀고 가깝게 아우르는 훨씬 더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등장한다. 단순한 성장소설이나 서양의 눈으로 바라본 동양적 가치를 정형화하는 소설을 넘어서는 지점이 거기다. 인도의 수많은 소국들과 영국/러시아 등 외세의 영향을 업고 위태롭지만 짜릿한 줄타기중인 숱한 사람들이 명멸하는 모습이 지극히 현실적인 거다. 키플링은 인도를 둘러싼 정치 상황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명철하게 발라낸다.

그러고 보면 당대의 현실 감각과 고민을 얼마나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갈아냈는지, 그걸 다시 문학이라는 형태로 궁글려 오래도록 빛을 발하도록 만들어내려는 작업은 무척이나 쉽게 폄하당하곤 한다. 그새 올드해졌다며, 주류에 영합했다며, 고정관념에 기댔다며, 손쉽게 삿대질당하거나 라벨이 붙곤 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돌부리를 베고 눕듯 자명한 것처럼 느끼는 불편함과 곤란함이란 게, 꼭 그때 그들에게도 훤히 보였거나 조금만 신경써도 감지할 수 있는 무엇이리란 법은 없는 것 아닐까. 오히려 우리의 독법은, 지금 이만큼 커져버린 돌부리가 그때는 얼마나 지면 아래에 숨어있었는지, 아니면 단단한 돌이 있기나 했는지를 되짚어 보는 거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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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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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자의 머릿속은 어떨까. 정신적으로도 살아남으려면 어떤 거짓말이나 위로가 필요했을까.

그는 분명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거나 폭력을 혐오하는 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1945년 2월, 히로시마에 앞서 그보다 더 큰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드레스덴 대공습. 그곳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미군 전쟁포로 중의 한명이었던 그는 살아남아 삶을 이어간다.

글쎄, 이어간다란 표현은 잘못됐다. 그는 어느순간 시간과 공간을 랜덤하게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헝클어진 삶을 살고 있으니까.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을 만나고 난 이후 가능해졌다는 그 초능력은 공교롭게도 그가 피하고 싶은 전쟁의 순간이나 기억들을 맞닥뜨릴 때 발휘된다. 우연이겠지만.

왜인지 등장인물들도 약간씩 우스꽝스럽고 초현실적이다. 비행접시에 대해, 죽음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천착하는 얼치기 SF소설가는 그의 생각을 그대로 베끼고 있는 듯 하고, 액자 바깥에서 소설을 써내리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까지 반영하고 있으니 이 역시도 또다른 꼬임이다. 소설 주인공의 안과 밖과 작가의 삶이 뒤섞이는 혼몽스러움. 이 역시 천연덕스럽게도 우연이겠지만.

그렇게 우연인 척 거짓말의 힘을 빌어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위로하고, 전쟁을 겪은 이들과 본인의 삶을 위로한다. 아마도 이토록 가혹했던 역사를 블랙유머로 숙성시켜 그나마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꿔주는 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덕목 중 하나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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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 - 기술공상가, 억만장자, 괴짜가 만들어낼 테크노퓨처
마크 오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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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의 기본전제는 우리 모두가 고쳐져야 할 대상이고, 인간의 몸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장애라는 인식이다. 생각해 보면 노화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근본적인 질곡이 되었는지. 인류는 태곳적부터 종교나 도교식 연단술, 연금술류 유사과학의 힘을 빌어 죽음을 피하려 했으니, 어떤 점에선 낯선 단어의 느낌과는 달리 인간 존재만큼이나 오래고 끈질긴 관점인지 모른다.

변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제 기계와 생명공학은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만큼의 진전을 성취했고, 해당 개념의 주인인 레이 커즈와일은 죽음과 노화는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라고 장담한다. 이제 AI는 인간의 뇌를 대체하거나 디지털 공간에 옮겨놓을 방법을 찾기 직전이고, 노화와 죽음 역시 과격하게도 '늙어서 죽기 전 기술발전으로 이를 추월해 탈출한다'는 수명탈출속도를 가속화해 해결한다는 투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뇌나 몸뚱아리는 사실 참 제약이 크고 불현한 게 맞다. 뇌란 놈은 갈수록 잘 까먹고, 단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그나마 써먹기까지의 부팅시간과 성능 업스레이드에 십여년이 필요하고, 그래봐야 그다지 이성적이지도 빠르지도 않다. 몸뚱이는 뭐 말할 것도 없다. 성능은 보잘 것 없고 내구성도 약하다.

몸을 기계화한다거나 디지털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등의 과격한 비전에 대해 왠지 모르게 갖게 되는 불편함과 거부감만 빼면, 대체 이런 트랜스휴머니즘의 조류에 반대할 꼬투리는 딱히 없다. 지팡이에 짚신이 전동식 휠체어와 에어조단으로 바뀌어 왔고, 양피지와 깃털펜이 스마트폰과 터치로 바뀌어 왔지 않은가. 문명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류의 수명과 체형이 바뀌어 온 건 또 어떤가.

문제는 죽음에 대한 태도, 그래서 삶에 대한 태도일지 모르겠다. 이 책의 뒷편으로 넘어갈수록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 짙어지는 이유도 실은 그런 탓일 게다. 죽음은 해결되어 퇴치해야 할 문제인 걸까. 끝내 무덤을 박차고 죽음에 맞서 승리하리라던 종교적 이상에 대해,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이 말했듯 사실 죽음을 파는 상인들이라는 독설이 필요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에 짓눌려 살지 않고, 삶과 죽음의 한쌍을 그대로 인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엄연히 다른 한축을 차지해왔다.

실리콘밸리와 굴지의 IT기업들의 서포트를 받는 지금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가진 기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낙관주의는 또 별개의 이야기다. 인간의 뇌와 몸뚱이는 그저 기술 발전을 체현하는 단말기에 불과한 걸까. 인간의 이성은 뇌의 문제해결능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까. 이성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조율하고 북돋는 역할도 맡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들의 눈에 비효율과 저성능으로 보이는 부분은 분명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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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반납 여행 - 전후 일본 사학사의 한 컷 오래된 책을 찾아 자박자박 1
아미노 요시히코 지음, 김시덕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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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 중세시대의 역사를 농경민 혹은 지배층이 아니라 흔히 비주류로 여겨지는 어민을 위시한 비정주민의 어업경제를 중심으로 읽어내리는 '아미노 사학'을 주창한 역사가다. 이 책은 이런 그의 연구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간접적이나마 그의 관점을 알 수 있을 뿐더러 어떻게 고문서 자료를 조사하고 보전하고 관리하는지, 여러가지로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은 그가 연구에 의지한 변방 어촌마을의 고문서들을 전후무렵에 빌리고 우여곡절 끝에 길게는 40여년이 지난 시점까지 이르러 기어이 반납하는 모험담처럼 읽힌다. 그는 이를 사료 조사와 보존, 관리에 대한 실패사로 규정짓고 가차없이 반성하며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관련 영역의 연구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반성과 교훈의 지점보다는 1차 사료의 조사와 관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생생함이 우선이다.

일본의 잘 알려진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변경, 오지처럼 여겨지는 바닷가 마을에서, 오래된 고택의 창고에서, 또 창호문에 덧대어진 폐지에서 발견하는 수백년 전의 기록들. 보물이라도 찾은 듯 환호하고 나서는 일일이 복구하고 해석하는 수십년간의 지난하고도 섬세한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런 자료를 매개로 마주치는 그 후손들의 신실한 삶과 조상을 기리는 마음가짐이 귀하다.

아, 해양사를 중심으로 다시 쓰여지는 일본 중세 역사란 건 한반도 역사에도 꽤나 큰 반향이 될 것 같다. 그저 굶주린 도적떼로 여겨졌던 '왜구'가 의외로 바다의 영주라 불릴만큼의 조직과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거나, 제주도와 한반도 남부지역이 일본열도와 해상 무역권으로 크게 묶여 흥성했다거나 등. 게다가 삼면이 바다라느니 하면서도 늘 '농업적 근면성'을 내츄럴본 민족성인 양 내세웠던 한국사에도 그의 사관이 되짚을 부분이 적잖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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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이 만날 때 - 우리의 편견을 허무는 일상의 모험 테드북스 TED Books 11
키오 스타크 지음, 김성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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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던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눈빛을 교환하고 말을 섞으며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가족과 다짜고짜 연결되어야 하는 학교나 직장의 사람들 말고, 내 바깥에 존재하는 낯선 이들.

국가나 종교, 인종같은 문화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첫단추가 시민적 무관심(civil inattention)이란 지적은 꽤나 중요하다. 상대를 위압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태도이자 서로의 사회적 물리적 거리를 지켜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시작하는 거다.

특히나 요새처럼 모든 이슈가 젠더라는 큼지막한 경계 하나로 재단될 때, 사실 이는 비단 캣콜링이나 성희롱으로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인간에 대한 문제상황이자 예의임을 환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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