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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 - 기술공상가, 억만장자, 괴짜가 만들어낼 테크노퓨처
마크 오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트랜스휴머니즘의 기본전제는 우리 모두가 고쳐져야 할 대상이고, 인간의 몸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장애라는 인식이다. 생각해 보면 노화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근본적인 질곡이 되었는지. 인류는 태곳적부터 종교나 도교식 연단술, 연금술류 유사과학의 힘을 빌어 죽음을 피하려 했으니, 어떤 점에선 낯선 단어의 느낌과는 달리 인간 존재만큼이나 오래고 끈질긴 관점인지 모른다.
변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제 기계와 생명공학은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만큼의 진전을 성취했고, 해당 개념의 주인인 레이 커즈와일은 죽음과 노화는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라고 장담한다. 이제 AI는 인간의 뇌를 대체하거나 디지털 공간에 옮겨놓을 방법을 찾기 직전이고, 노화와 죽음 역시 과격하게도 '늙어서 죽기 전 기술발전으로 이를 추월해 탈출한다'는 수명탈출속도를 가속화해 해결한다는 투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뇌나 몸뚱아리는 사실 참 제약이 크고 불현한 게 맞다. 뇌란 놈은 갈수록 잘 까먹고, 단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그나마 써먹기까지의 부팅시간과 성능 업스레이드에 십여년이 필요하고, 그래봐야 그다지 이성적이지도 빠르지도 않다. 몸뚱이는 뭐 말할 것도 없다. 성능은 보잘 것 없고 내구성도 약하다.
몸을 기계화한다거나 디지털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등의 과격한 비전에 대해 왠지 모르게 갖게 되는 불편함과 거부감만 빼면, 대체 이런 트랜스휴머니즘의 조류에 반대할 꼬투리는 딱히 없다. 지팡이에 짚신이 전동식 휠체어와 에어조단으로 바뀌어 왔고, 양피지와 깃털펜이 스마트폰과 터치로 바뀌어 왔지 않은가. 문명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류의 수명과 체형이 바뀌어 온 건 또 어떤가.
문제는 죽음에 대한 태도, 그래서 삶에 대한 태도일지 모르겠다. 이 책의 뒷편으로 넘어갈수록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 짙어지는 이유도 실은 그런 탓일 게다. 죽음은 해결되어 퇴치해야 할 문제인 걸까. 끝내 무덤을 박차고 죽음에 맞서 승리하리라던 종교적 이상에 대해,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이 말했듯 사실 죽음을 파는 상인들이라는 독설이 필요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에 짓눌려 살지 않고, 삶과 죽음의 한쌍을 그대로 인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엄연히 다른 한축을 차지해왔다.
실리콘밸리와 굴지의 IT기업들의 서포트를 받는 지금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가진 기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낙관주의는 또 별개의 이야기다. 인간의 뇌와 몸뚱이는 그저 기술 발전을 체현하는 단말기에 불과한 걸까. 인간의 이성은 뇌의 문제해결능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까. 이성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조율하고 북돋는 역할도 맡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들의 눈에 비효율과 저성능으로 보이는 부분은 분명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