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 Blu 냉정과 열정 사이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가슴 한 켠에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잊혀졌다가도 그 무엇이 꼬투리가 될라치면 난 어느새 그(그녀)가 이제는 없는 그 때로 혼자 돌아가 있다.    

 아직도 그(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난 착각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일 뿐이다.     

우리에겐 현재 뿐이지만 내 마음은 과거로만 걸어간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으면 꼭 슬프지만은 않다.      

이제 나의 과거 속의 나를 자유롭게 놓아 줄 수 있을 거 같다.       

이제는 앞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모든 이들도 그러하길 바라며.........책속에서 맘에 와 닿는 구절들을 각 장마다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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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아오이가 그 날 밤의 일을 완전히 잊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

1. 인형의 다리

이 거리에는 늘 햇살이 비치고 있다.

두오모 곁에 선 대성당의 벽면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빛의 원천을 올려다보며, 중세 사람들이 고양된 의식을 상상하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아오이가 잊혀지지 않는다.

사별 같은 것...아오이와 나는 과거에 그런 이별을 했다.

선생의 스케치의 피사체가 되고 있을 동안 가끔 아오이를 생각한다. 옷을 걸치지 않은 탓에, 마음이 대담해지면 질수록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먼 과거로 날아가 아오이를 만난다.

매미 그녀의 길다란 머리카락에 밴 역겨운 다른 남자의 냄새.그래도 나는 불평 한마디 한 적이 없다. 더 이상 상대를 옭아매는 연애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과연 나는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아오이를 일상에서 쫓아 내지 못하는 한, 매미를 진심으로 사랑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들고양이 같은 그녀에게 화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그것을 나는,상대를 옭아매고 싶지 않으니까,하고 얼버무린다.

복원 일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돌이키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잃어버린 생명을 되살리는 작업..........

피렌체는 Rinascimennto(르네상스의 이탈리아어)의 발상지이다.여기서 근대적인 빌딩을 찾기는 불가능한 일이다.16세기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거리. 거리 전체가 미술관이다.겨울은 난방이 안 되어 얼어붙을 듯이 춥고,여름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 찔 듯이 덥다.그것을 사랑할 수 없으면 결코 여기서 살 수 없을 것이다.................나는 이 거리에서 나 자신을 재생시킬 수 있을까. 내 안에 르네상스를 일으킬 수 있을까.

정말 필요한 게 있는 걸까.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 과연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적어도 이 우아한 피렌체 거리에서, 지금 당장 해야만 할 일 따위는 없다.................................이 거리에는 늘 비처럼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2. 5월 "Maggio"

매미와는 대조적인 아오이의 조각품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나는 좋아했다.어디를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우울한 눈길이 마음에 들었다.문득 현실을 벗어나 그녀만이 아는 공간 속으로, 그 시선은 헤엄쳐 가고 있었다. 다소 염세적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그런 눈동자였다.나는 아오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늘 마음에 두면서 그림을 그렸다.그녀가 보려 하는 것을 같이 보고 싶은 바람으로 그림을 그렸다.그녀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물 같은 여자였다.

"5월 25일"

아오이의 스물두 살 생일,그 날도 비가 내렸다.우리는 70주년 기념강당 곁의 콘크리트 계단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 곳은 우리가 즐겨 만나는 장소였다.대학 오케스트라에 소속된 학생들이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에 걸터앉아 첼로 연습을 하고 있다.낮고 우아한 울림은 반 지하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기분 좋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비를 피하면서,하필이면 이렇게 좋은 생일 날 비가 오다니, 하고 말하자, 아오니는, 괜찮아,하고 가냘프게 웃었다.어디로 갈까,하고 묻자 아오이는 억지로 어디 갈 필요는 없잖니,하고 말했다. 우리는 비가 개기를 기다리며 계단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미래의 천재 첼리스트들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빗소리와 첼로 소리,곁에는 아오이가 있고,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아오이가 그 날 밤의 일을 완전히 잊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오늘을 돌이켜보려는 내 귀에 그리운 그 옛날의 첼로 선율이 은은히 들려 왔다.한순간 선명하게 들려오던 그 선율은 이탈리아  팝송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Era una giornata quella di ieri(어제와 똑같은 하루였죠)". 인수는 그 말을 입 속으로 우물거리며 따라한다.어제와 똑같은 하루였죠.이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우리는 언제든 어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

3. 조용한 호흡 Un Alito Traanquillo

팔라초 피티(피티궁) 안의 팔라티나 미술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자주 여길 찾아온다.내가 너무 좋아하는 라파엘로의 그림이 많다.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사투르누스 실에 걸려 있는 <대공의 성모자>이다.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저로 안온해진다.나는 언제부터인지 <대공의 성모자>와 나의 이상적인 어머니 모습을 겹쳐서 바라보아 왔다.외로움을 느낄 때면 이리로 와서 가만히 바라본다. <대공의 성모자? 앞에서만 내 마음을 모두 열어 둘 수 있었다....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대공의 성모자>와 마주 선다. 아오이의 시선과도 닮은, 아래쪽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부드러운 눈길이 향하는 그 대상을 상상하면서, 나는 몇백 년 전에 그려진 성모의 변함없는 아름다움엣 넋을 잃고 만다...."약속은 미래야. 추억은 과거.....미래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늘 우리를 초조하게 해,그렇지만 초조해 하면 안 돼.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달리 반드시 찾아오는 거니까." 이 곳은 중세 시대부터 시간이 멈춰 버린 거리야.이 곳 사람들은 과거에서 살기를 원해. 적어도 미래 따위는 없으니까, 희망 제로가 아닌 미래라도 있으니 쥰세이는 행복한 거야."

아오이와 교제하던 시절, 지금 매미처럼 행동하는 쪽은 항상 나였다. 아오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보다 냉정했다.처음으로 내 마음을 모두 바친 상대여서 그랬는지, 어디서 얼마만큼 힘을 넣고 빼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단 한 순간이라도 아오이가 내게서 눈을 떼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언젠가 미친 듯 질투한 적이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렇게 떼를 쓰는 메미가 그리 밉지 않았다. 얼마나 그녀를 좋아하는지, 나 자신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녀가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하면 할수록 아오이와는 다른 각도로 메미에게서 예전의 풋내 나던 나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또 아오이를 생각하고 있다.우리는 자주 밤에 하네기 공원을 걸었다....아오이는 어떤 심경이었을까.그렇게 행복한 시대를 살아가면서,어딘가 미래를 신용하지 않는 듯한 쓸쓸한 표정을 보일 때가 있어서, 때로 나는 불안했다. "사랑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조심스러워했다.아니,그건 엄밀히 말해 우리가 그랬던 건 아니다.아오이는 내 앞에서 '사랑'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불안해졌다.그래서 따지듯이 물었다."사랑한다고 말해 주시 않을래."더이상 참지 못하고 닦달을 했다.그제서야 비로소 아오이는 사랑해,라고 말했던 것이다.그것은 거의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나는 그 이후로 아오이에게 나에 대한 사랑의 확인을 요구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가, 전형적인 사기 수법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4.가을바람 Il Vento Autunnale

아오이와 나는 몇번이나 붙었다 떨어졌다 했는지 모른다. 그것을 반복하는 사이에 오차가 생겨, 세심한 주의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헤어졌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으로 인하여 진실을 하나로 연결되었다 할 수 도 있다. 다시는 연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지만,평생 짊어져야 할 운명을 우리는 공유하고 만 것이다. 잘려 나간 또 하나의 우리를 대신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메미 곁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은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볼을 서늘하게 애무하고 있었다.

5. 회색 그림자 L'ombra Grigia

미래를 향하여 활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내겠지만, 복원을 거부하는 강인함과 야심적인 새것에 마음을 빼앗긴 도시적인 분위기에는 늘 차가움이 감돈다.

꿈속에서 내 품에 안겨 잠든 사람은 아오이였다. 낮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살아가다가, 밤만 되면 무서운 꿈을 꾸고 몇번이나  잠에서 깨어나 어린애처럼 가슴에 안겨 온다. 왜 그러니, 하고 묻자, 무서운 꿈을 꿨어,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변했어, 나를 모른대, 쥰세이가 죽었어, 다른 사람이 내게 전해 줬어.....그녀는 꿈을 떠울리며 울고 있었다. 결의에 가득 찬 낮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오이는 지금도 그런 무서운 꿈을 꾸고 누군가 곁에 있는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일까. 그녀를 안는 사람이 부러웠다. 한밤중에 그녀에게 넉넉한 가슴을 빌려 줄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누구에게도,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살아가는 과정에 어두운 그림자 한둘은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사람 분의 쾌활함을 가지고 있는 메미의 가슴에 깃들인 그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인생과도 겹치는 회색 그림자이기도 했다.

밀라노의 두오모 : 외부와 내부의 이런 이미지 격차야말로, 중세 사람들의 위대한 상상력을 말해 주는 지도 모른다.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화려함에 얼을 빼고,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숭고한 신앙적 분위기에도 압도 당하도록 연출해 놓은 것이다.

"메미:올라가도 될까?" 나는,응,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갑자기 아오이와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 속에 밀폐시켜 두고 싶었던 오랜 약속. 그 때 우리 둘은 먼 옛날 유년 시적을 보냈던 이 밀라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는데, 그 날 아오이는 드물게도 열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다, 엉뚱한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농담 반으로, 또는 이야기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겨 버린 듯이.

- 약속할 수 있니?

- 무슨? 

- 내 서른 살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 피렌체의 두오모? 왜 그런 곳에서?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되니?           

- 밀라노 쪽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오모이고, 피렌체 쪽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두오모라고, 페데리카가 말했어   

- 또 페데리카로구나.    

- 땀을 흘리며 몇백 계단을 필사적으로 오르면, 거기에 기다리고 있을 피렌체의 아름다운 중세 거리 풍경에는 연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미덕이 있다고 했어                                  

- 그렇다고 딱히 거기서 만날 약속은 안 해도 되잖아. 서른살 네 생일 때, 우리 같이 가도록해. 

- 응, 우리 헤어지지 않는다면.                  

- 그런 소리 하지도 마. 꼭 우리가 헤어질 것처럼 말하네.네가 무슨 예언자니?    

- 모르잖니, 미래 일은. 그러니까,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약속해 줘. 오늘의 이 마음을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으니까 약속하는 거야. 내 서른 살 생일날, 쿠폴라에서 기다려 주는 거야 

- 네가 먼저 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 아니, 영원히 날 마음에 간직한다면 자기가 먼저 가서 기다려줘야 해      

- 서른살. 앞으로 10년 후의 일인데..............

나는 과거를 쫓아가도 좋은 건지, 또한 미래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약속. 그 주술적인 올가미에 묶여 있는 나 자신.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도 과거가 기다리고 있다. 서른 살 생일날, 5월 25일........

6. 인생이란 Che Vita E

아릴 정도로 차갑고 팽팽한 공방의 아침 공기는 무척 상쾌하다. 아무도 없는 작업장에서 혼자, 가까운 가게에서 사 온 파니노에 카푸치노를 곁들여 위 속에 흘려 넣는 것도 특별한 맛이다. 카푸치노의 향기에 섞여 복원 때 사용하는 에탄올, 암모니아 수, 강화 왁스, 바니스 등의 냄새가 콧구명을 자극한다. ...........나는 선생의 회전 의자에 걸터앉아, 누가 올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그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오이와 보낸 투명한 시간을 떠올리고 만다.........아오이의 사진 한장...긴머리 사진 이것 한 장뿐이다.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직모. 그것이 싫다고, 어느 날 밤, 그녀는 스스로 가위를 들고 그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눈동자는 어딘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빛이 반사되어 빨갛게 물든 탓에,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다 식은 카푸치노를 바닥까지 들이켰다. 추억도 함께 마셔 버렸다.............밀라노에서 돌아와서 나는 오랜만에 이런 나의 은밀한 사치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

클립으로 꽂아 둔 그 시편과 함께 아오이의 사진이 한 장 있다. 운전 면허를 딸 때 쓰고 남은 한 장을 받은 것이다. 긴 머리 사진은 이것 한 장뿐이다.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직모. 그것이 싫다고, 어느 날 밤, 그녀는 스스로 가위를 들고 그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눈동자는 어딘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빛이 반사되어 빨갛게 물든 탓에,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다 식은 카푸치노를 바닥까지 들이켰다. 추억도 함께 마셔 버렸다.

(할아버지曰)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틈을 보여서는 안 돼. 남자란 일단 밖에 나가면 일곱 명의 적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야

"일은 재미있니?" 마치 나의 그런 망설임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이 할아버지가 물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복원 일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니?" 거기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사명감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과거를 미래로 이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솟았다. 내 손으로 복원한 그림이 천 년 후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복원되리라고 생각하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득한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살아 있을 동안에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글쎄, 잘 모르겠어. 맞지 않을지도 몰라." 겨우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내쪽을 돌아보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갑자기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서,내 인생인데도 나 혼자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난 고집이 세잖아. 옛날부터 고집 덩어리였으니까. 자기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인간은 복원 일에 고통을 느낄 때가 있는 것 같애', "방황하고 있구나", ........"템페라를 그려 보면 어떨까","너무 갑작스러워서...","그냥 해 본 말이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서 해" 웃었다.  메미도 웃었다.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사람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입김이 화랑을 흐르는 공기를 따라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아마 템페라 화가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충고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자신의 미래를 너무 한정시키려 했다. 조금 더 유연하게 세계와 대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림은 선생 자신이 찢은 거야.......", " 선생은 널 질투한 거야.","왜?", "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선생은 자신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느 너에게 질투를 느낀 거야. 그건 엄연한 사실이야."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유행가가 그 말과 함께 귀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che vita e, che vita e.......(인생이란..)"

7. 과거의 목소리, 미래의 목소리

우메가오카, 하네기 공원이 나지막한 둔덕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어머니처럼 따르던 사람(조반나)에게 배신당했으니,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아오이와의 추억에 매달려 본다.................10월 어는 날, 모교인 세이죠 대학에 가 보기로 했다. 오다큐 선전철을 타고, 세이죠 대학 앞에서 내렸다. 역은 당시 그대로였다. 개찰구를 나서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교문을 들어서자 기억은 내 가슴을 한층 더 격하게 뒤흔들어 놓았다..........내 서른 살 생일날, 페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어때?.............약속도 아닌, 어린애들 장난 같은 어투로,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그녀가 한 말이지만,아오이가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후 헤어질 때까지, 우리 사이에서 그 약속이 화제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녀(메미)를 부드럽게 끌어 안은 채, 씁쓸한 눈길로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문 건너편에 피렌체의 거리가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르노강,조반나의 공방,베키오달, 시뇨리아 광장, 우피치 미술관, 그리고 두오모. 다시 가슴속에서 과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8.엷은 핑크 빛 기억

시간은 흐른다.그리고 추억은 달리는 기차 창 밖으로 던져진 짐짝처럼 버려진다. 시간은 흐른다.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던 일들이,매 순간 손이 닿지 않는 먼 옛날의 사건이 되어 희미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시간은 흐른다.인간은 문득 기억의 원천으로 돌아가고 싶어 눈물 흘린다.또 봄이 왔다. 나는 하네기 공원의 매화가 엷은 분홍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푸른 하늘과 땅 사이를 수채 물감으로 그은 듯이 엷게 물들어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려 본다. 내 곁에는 메미가 있고, 난 아직 백수이고, 게다가 나는 과거의 사슬에 얽매어 아직도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마음의 오랜 상처가 점점 더 아파 오는 이유는 그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 가지, 꼭 말해 둬야 할 게 있다" 다카시 특유의 엄숙하고 진솔한 표정으로 하나의 사실을 고했던 것이다. 나는 과거에서 미래로 역류해 가는 기억의 강 위에서 헤엄치고 있었ㄷ. "너를 속이고 그녀 마음대로 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 오해야" 다카시는 내가 모르는 아오이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카시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거기에 10대의 아오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상상 속의 그 모습을 향해 소리 높여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가냘픈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지금이라도 쓰려져 버릴 듯한 고독한 그녀의 모습을 향해. 그 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메미 몰래 아오이에게 보낼 긴 편지를 썼다.

9. 인연의 사슬 Legame

 다카시가 내게 고한 그 사실이 과거의 모든 수수께끼와 의구심들을 깨끗이 날려 버렸다. "유산?" "응,어차피 구할 수 없었대"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어, 아오이 앞에 나타난 네 아버지가 아기를 지우라고 강요한 거지"

아오이에게 사죄하는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과거를 이겨 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혹한 시간 속에서 그녀는 나를 저주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려서, 그녀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오랜 세월의 끝자락을 우리 두 사람은 헤엄쳐 나가고 있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는 사죄였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순간, 나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울었다.

"아오이에게 뭐라고 했어, 아오이에게 사죄하란 말이야, 하고 아바지를 향해 외쳤어. 응, 아오이, 누구? 쥰세이가 이전에 스케치북에 얼굴을 그렸던 그 동급생이야? 오래전에 그녀와 나를 혼동했잖아. 나를 안을 때, 나를 아오이로 착각하고 이름을 불렀잖아. 응, 아오이, 누구? 그 사람을 아직도 못 잊는 거야? 쥰세이와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오이와 내 아이를 돌려 달라고 외쳤는데, 혹시 그건......."

그 때 아오이는 혼자 병원에 가서, 혼자 처리했다. 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모든 것을 혼자서 했다. 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고통스러울 때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는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러워했고, 동경했고 또 저주했다

"나는 아오이가 없는 공간을 메워 주려고 쥰세이를 사랑한 게 아냐. 쥰세이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난 이렇게 살 수 없어. 더 이상 모욕당하기 싫단 말이야"

복원사로서 무엇을 어떻게 복원시켜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다음 날부터,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아오이가 전화를 걸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시간만이 더 차갑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편지를 보내고서 이윽고 해방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지 않은가. 집을 나간 메미도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얽혀, 나를 바닥 없는 늪 속으로 빠뜨리는 것 같았다.

인연의 사슬을 되돌이킬 수 있을까

"너도 좀 여유를 가지고 살도록 해라. 널 보자니,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아슬아슬해","옛날?","응 옛날에 나는 늘 격정에 휩싸이는 성격이었어.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충족되지 못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지.처음에는 여자라서 화단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랬어. 걸작을 그려도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말이야.차별이라고 생각한 거야. 개중에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화단에서 기어오른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기야 아직은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해. 그런 사람들 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는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어. 그 당시, 내가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하고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그렇지만 이제는 그게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아. 예술가란 쓸데없는 일이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정상으로 올라설 수 있어. 남자건 여자건, 명성이건 성공이건, 그건 창작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야.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흉내내서, 남편과 이혼하고 전세계를 방랑한거야. 좋은 경험이었다. 인간이란 걸 좀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뭘?" "지금까지 내게 그런 이야기한 적 없잖아요" "난 쓸데없는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럼 왜 이제 와서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 거죠?" "그럼 좀 어떠니, 피를 나눈 사인데" 나는, 피, 하고 중얼거렸다. "지금 널 보고 있노라면, 너무 굴레가 많아서 고통스러워하는 것같애. 옛날에 나도 그랬지. 예술가는 굴레를 가지면 끝장이야." 난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난 예술가가 아닌걸요. 기술자지요. 예술가가 만든 것을 고치는 복원사잖아요" "그렇지 않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네가 선택한 일은 예술을 단순히 소생시키는 마법의 지팡이 같은 일이 아닐거야. 시간을 만들어 내는 예술이라 생각해. 복원사는 멋진 예술가야. 그것도 시간을 소재로 하는." 글쎄요, 하고 말을 끊은 다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미에는 복원 일을 다시 하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딘지 모르게 후미에가 아버지와 같은 인종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아버지가 해야 할 말을 부모도 아닌 후미에가 해 주었다는 것이 내겐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문득 얼굴을 들자, 할아버지의 작품 <인연의 사슬>이 눈에 박혀 왔다.

10. 푸른 그림자 L'ombra Blu

나의 광장. 예전에 그렇게 부르며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떠돌며 살아가던 내게 있어 그녀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도시의 광장처럼 시원스런 존재였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노인처럼 매일 그 곳을 찾아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자신이 고독하지 않고, 행복한 존재라 생각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조국을 모르고 자란 나에게, 같은 얼굴의 동년배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회로가 다른 이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고방식이 전혀 달라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들뿐이었다. 여기는 미국이 아냐, 누군가가 내 삶의 방식을 비판했다. 대학 생활에서 겨우 마음을 쉴 수 있는 광장을 발견했을 떄, 나는 그것이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온 힘을 기울여 그녀를 사랑하고, 그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가 사랑이 도를 넘어 버렸다. 서둘지 말라고, 늘 냉정한 그 사람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영원하지 못한 찰나의 꿈과도 같은 여름 햇살은 왜 이다지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순진무구한가. 여름이 올 때마다, 그 밝은 햇살 아래서 갈 곳을 몰라, 어두운 그늘을 가려 걸어가는 나였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그 옛날, 그렇게 이 우메가오카의 집을 나가 버린 여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쫓겨난 여자가 있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에 넣은 나만의 광장이었다. 놀이터, 마음의 쉼터, 미래를 생각하는 장소.......

- "왜 헤어져아 하는거야? " 그녀는 현관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냉정을 잃은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내 가슴에 스스로 못질을 하면서 부숴져 갔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왜냐고? 널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머리 속이 백짓장으로 변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애? 웃기지 마. 네가 한 짓을 좀 생각해 봐, 그것도 모르겠어. 나가 줘. 두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흥분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가만히 내 발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들지 않고, 소리도 없이, 현관 바깥으로 사라졌다. 광장을 잃어버린 후, 인생의 종언을 기다리는 만년의 노인처럼 나는 더 이상 산책도 하지 않고, 다시금 고독의 방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 흘러가는 구름만 멍하니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메미는 소리 높여 울었다. 이번에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왜 그 날, 아오이는 울지 않았을까. 내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있었다. 울면서 무너져 내린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인상은 갑옷을 걸친 자 다르크처럼 언제나 꿋꿋하고 강했다.

아오이. 모든것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복원할 생각일까.

아오이. 나는 지금, 복원 방법을 잃어버린 상태다. 어떻게 이 마음 속에 바람 구멍을 뚫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하듯이 차근차근, 조각조각, 고쳐 나가는 수밖에 없지만, 손이 움직여 주질 않는다. 미래라는 이름의 완성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11. 3월 Marzo

"(쥰세이)선생의 죽음이 나를 이 곳으로 불러들인 건 사실이지만, 이 곳에 온 것은 아마도 아오이와의 약속 때문일거야.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편으로, 나는 아오이와의 약속한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나도 메미를 좋아해. 그냥 겉치레로 하는 말은 아냐. 그렇지만 아오이를 잊을 수 없어. .........시간이 흐르면서, 내 속의 아오이가 점점 더 커져 가는 것을 느꼈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아오이를 잊을 수 없을거야"

"(인수)" 내게도 예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가졌고, 사회적인 책임도 있으니까. 내가 서울을 떠난 것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야. 여기서 이렇게 과거를 죽이고 있는 것도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이지....잊을 수 없는 사람. Una persona non posso dimenticare.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싸구려 호텔의 딱딱한 침대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나는 나를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런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오이를 잊을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밀라노로 달려가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입속말로 중얼거려 보지만, 그것은 도중에 한숨으로 변해 추락하고 만다. 꿈을 꾸었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그 곳이 겨울의 센트럴 파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눈앞에 어머니의 사체가 누워 있었다. 눈이 내려 어머니의 몸은 반쯤 눈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달려가서 어머니를 안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조반나였다.너무 놀라서 손을 뗐다. 선생의 몸은 눈 속에서 서서히 잠겨 갔다. 세찬 바람이 눈을  몰고 와 선생을 눈 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이었다. 온통 새하얀 풍경 속에서 선생이 흘린 붉은 피가 세상을 선명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선생은 눈을 부릅뜬 채 투명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울었다. 꿈속에서 선생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울음소리에 내가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일거에 쏟아 낼 기세로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쏟아 낼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나의 업을 눈물과 함께 모두 쏟아 내고 싶었다

12. 석양 Il sole del tramonto

낮은 언덕을 흘러가는 5월의 바람이 거칠어진 볼을 스쳐 간다. 햇살이 눈부신 느슨한 경사지에 몇개의 묘가 사이 좋게 피렌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일 두오모에 오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자 노파가 달력을 보았다. "목요일이니까, 괜찮을거야. 기도 드리러 가니?" "몇 시부터 코폴라에 오를 수 있나요?" "아침 여덟시 반부터"

아직 해뜨기 전이었다.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콧구멍 안쪽이 찡하면서, 폐 속으로 아침 공기가 퍼져 나간다. 5월 25일이었다. 이 거리 사람들은 몇 세대 전부터 저 쿠폴라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오모가 가까워 질수록 큰 기대와 불안이 번갈아 밀려와 서로를 밀쳐 냈다. 만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최후이 순간까지 쿠폴라 위에서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면서 8년이란 시간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아오이가 오지 않아도 나는 무너져 버린 나를 스스로의 힘으로 재생시키고 당당히 내려올 것이다. 숨을 죽이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8시 30분, 대성당 문이 열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400개의 계단...........그냥 이렇게 계단을 올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현기증이 일었다..........나도 모르게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아오이와 만나 격렬한 사랑에 빠져 들 무렵의 일들, 동거하는 거나 다름없었던 즐거웠던 시간, 중절, 이별, 그런 일들이 땀을 닦을 때마다 뇌리에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괴로웠다. 한 계단 한 계단, 기억의 발걸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그 무게가 등을 타고 나를 아래로 찍어 눌었다. 숨이 가빠와 몇 번이나 도중에 멈춰 서서 허리를 펴고 쉬어야 했다. 이윽고 쿠폴라 위로 나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봄바람이었다. 아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 쳤다. 방황의 터널을 빠져 나온 직후, 이런 풍경이 나를 기다려 주고 있다니, 나는 구원 받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기다리는 시간, 그것은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기다림의 저 앞에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람은 기다람의 시간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것은 8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13. 새로운 백년 Il nuovo secolo

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오지 않을 사람이 온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당연히 아직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남아 있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었다. 8년 따위 10분이나 다름없다고 오해하고 마는 그런 흥분 속에 빠져 있었다.

남자란 과거를 질질 끌며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스위치를 전환하는 데는 여자보다 훨씬 서툰 것 같다

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안고 있는 것은 8년 전의 아오이였다.아오이도 필시 8년 전의 나를 안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와 잔 것이다. 1초라도 빨리, 현재를 과거로 물들이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계곡을 메우고 싶었다. 임시로라도 다리 하나 놓고 싶었다. 그러나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험했다.

고작 사흘로, 당연한 일이지만 통속 멜로 드라마처럼 우리는 8년의 공백을 복원싴킬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그림을 바라보면서도 제각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을 따름이다. 어느 쪽애ㅔ도 그림을 복원시킬 만한 열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움만 간직한 냉정한 동창회와도 같았다.

우리는 8년이란 시간을 한꺼번에 토해 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ㅐ에게 전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그 8년을 납득시키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사흘동안 우리는 필사적으로 8년이란 세월을 메우려 했다. 결코 며칠 사이에 넘을 수 있는 강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아오이가 8년 전의 아오이와는 다른 사람임을 깨닫는 데 고작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꼭 가야 하니?"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장소인 것 같아서"

"맛있는 점시 먹으러 가. 나, 오후 기차로 갈 거야"뭔가를 떨쳐 내려는 듯이 활기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마치 졸업 여행의 마지막 날 같은 느낌이었다. "괜찮아. 억지로 잡지 않을 테니까"."...........아오이".........."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겨우 역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발걸음은 무겁고 눈앞은 캄캄했다. 바쁘게 오가는 저녁 시간의 사람들 틈에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는 걸었다. 이 거리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낯익은 거리도 사람도 모두, 모든 것이 아무 데서나 판매하는 그림 엽서 속의 피렌체 같았다.

"아오이"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다. 무엇보다 소중한 현재. 산타 마리아 노베라 역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아무런 시도로 하지 않았다. 아무런 노력도 해 보지 않고, 그녀를 그녀의 현재로 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 8년을 다시 얼어붙게 해서는 안 된다.

역 구내에 걸린 커다란 시각표를 올려다본다. 가장 빠른 열차는 18시 19분 발 국제특급이다. 그걸 타고 밀라노에 도착하면 21시 정각. 아오이가 탄 국내특급보다 15분 빨리 도착할 수 있다. 15분, 고작 15분이지만, 나는 그것으로 미래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다..단지,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어쨌든 다시 한번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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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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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인공의 어릴적 부터 시작해서 중년에 이르러 엄마가 돌아가실 때 까지

간단하면서 계속되는 글쓰기를 읽어내려가는 시간은 다소 지루하였다

마지막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주인공의 엄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부모님 살아 생전 효도하라" 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인간으로서 기본도리를

주인공과 엄마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호소하였고

적지않게 눈시울이 뜨거운 소설이다

2006년 일본의 책방추천도서 1위라는 것이 사실 이해가 안 가지만

사실 요즘 인간으로서 기본도리를 많이 망각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기본으로 지켜지지 않고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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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슈프리머시 - 아웃케이스 없음
폴 그린그래스 감독, 멧 데이먼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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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보면서 정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닌가?

왜 그 이면의 삶은 공허하고 외로운 걸까?

진정한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삶에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맷 데이먼 본을 멋지게 연기해 주었다, 멋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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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스톰 (1disc) - 할인행사
볼프강 피터슨 감독, 마크 월버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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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 있어

"퍼펙트 스톰" 이 한번쯤 지나가리라......

피해 갈 것인가...정면으로 부딪혀 멋진 승부로 끝낼것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공무원, 공공기관을 선호하는 경향이다....인생을 가늘고 길게~~

한번쯤 퍼펙트 스톰을 온몸으로 맞아 승부해보고 싶다

 

그들은 멋진 사나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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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 댈러웨이 부인 (도서) [스펙트럼베스트외화20종행사]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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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그래도 살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1923 영국 리치몬드 교외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만)가 자살하고,

1951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버지니아 울프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빠져 있던

로라(줄리안 무어)가 자살을 기도하고,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댈러웨이부인"이라는 별명의 클래리사(메릴 스트립)의 친구이자,

1951년 로라의 아들인 리차드 브라운(애드 해리스)가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마치 버지니아 울프가 모든 원인제공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영화는 전개 되는 듯도 하다................나에게까지 파장이 밀려드는 듯 하다

많이 슬펐고, 많이 울었다, 누구나 이 영화를 보고그렇게 슬퍼하고 울었을까?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1920년대 느꼈던 그 공허함이 내 폐속 깊숙이까지 전해져

지금 나의 들숨,날숨에도 같이 동행한다

 

*** 버지니아 울프가 기차역에서 한 대사 ****

난 어둠 속에서 혼자 고통받는데
그 고통을 아는 건 나뿐이란 거에요.
내가 사라질까봐 당신 두렵다고 했죠?
당신처럼 나도 두려워요.
이건 내 인생이에요.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줘요.
내가 원하는 건 이 적막함이 아니라
그 격렬한 도시의 삶이란 말이에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에요.
아무리 내가 더러운 병에 걸렸다고 해도
나도 원하는 게 있단 말이에요.
미친 사람도 인간이니까.
나도 이 고요함 속에서 행복하면 좋겠지만
리치몬드와 죽음, 둘 중에서라면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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