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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iano避我路 > [퍼온글]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과 표민수 PD의 대화

<표민수PD,노희경작가와의 대화 >


" 사랑은 있죠? " " 그럼요 , 사랑은 있어요 "

“세상 사람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우리도 한번쯤은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그게 정말 바보 같은 사랑이라 해도….”(<바보 같은 사랑>中 상우의 마지막 내레이션)

분명히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허준>과 맞서기엔 그들은 너무나 바보같이 약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아이들은 밀고당기는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공장구석에 피어난 질퍽한 30대의 불륜이야기가 뭐 그리 궁금할까? 잘나고 뻔쩍거리는 것 투성이 세상에 지지리도 못나 궁상맞은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듣기 좋았으랴. 지난 4월24일 첫 방송된 <바보 같은 사랑>은 6월27일 그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고했다. 첫날 애국가보다 낮은 시청률을 보고 원망하며 돌아설 수도 있었을 텐데 꾸준히 그들만의 사랑을 만들어갔던 두 사람. 첫사랑이 아님에도 언제나 첫사랑처럼 서로에게 ‘빛’ 같고 ‘소금’ 같은 존재. 그들이 만들어온 사랑이야기. 짝사랑 혹은 안쓰런 연민.

“넌 누굴 사랑하는 게 겁나지, 사랑이 널 바보로 만들까봐. 아서라. 세상은 바보같애. 바보같이 사는 게 옳아. 재호야.”(<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中)






표민수/ 정말 이번처럼 결말을 오래 고심했던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죠? 다른 작품 할 때는 시놉시스 단계에서 이미 결론을 내고 갔었는데, 이번엔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어요. 시작할 때 노희경 작가는 옥희(배종옥), 나는 영숙이(방은진)에게 손을 들어줬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우리 둘 다 옥희에게 상우(이재룡)를 보내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나갔어요.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모두 ‘무사하길’ 바랐는데 결국 상처를 주게 되네요.
노희경/ 사실 상우가 영숙이에게 갈 이유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영숙이가 임신을 한 상태에서 상우가 영숙일 택한다면 다른 만 가지 이유가 ‘임신’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통속적 결말을 피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윤리·도덕적으로 그래야지 하는 것에 대한 반항도 아니였어요. 사실 우리 둘이 얼마나 ‘보수적’인 인간들인데요. (웃음) 그저 ‘사랑’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어요.


시작

표/ <아직은 사랑할 시간> <거짓말> <슬픈 유혹> 이번 <바보 같은 사랑>까지 4번이나 작품을 같이 했네요. <엄마는 치자꽃>에서 같이 일했던 나문희씨 소개로 처음 봤는데, 그게 언제지? 96년 6월쯤 일거예요. 우리 둘 다 술은 잘 못해서 처음 본 날 차만 마시면서 이야기 했는데 한 6시간 정도를 앉아서 줄곧 쉬지 않고 얘기만 했었죠?
노/ 처음 표 감독 볼 때 깔끔하고 왠지 반지르르한 게 별로 내 과는 아니다 싶었는데 저렇게 생긴 얼굴에 촌스런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니까 ‘푹’ 웃음이 나더라구요. 우린 생각하는 게 똑같지 않아요? 요모조모 따지는 말투도 똑같고 고집센 것도 같구요, 한번은 표 감독 부인이 ‘어쩜 둘이 그렇게 비슷하냐’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같이 사는 마누라가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정말 닮은 걸 거예요. 서로 안주하지 않게 채찍이 되어주고… 표 감독이야 늘 감동이지, 뭐.
표/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인간을 보는 눈이 비슷해요. <거짓말> 찍을 때쯤 이었나? KBS 건너편 공원에 앉아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작품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동이 훤이 트더라구요. 이야기 하는 중에 다음 작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요. ‘주인공을 누구누구로 가자’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은 뭘까, 사랑은 뭘까’ 같은 식의 이야기다보니 끝이 있나요. 평생해도 모자랄 이야기지.


거짓말 vs 바보같은 사랑

노/ <거짓말>이 ‘수채화’ 같았다면 <바보 같은 사랑>은 ‘화투짝’ 같아요. 그래서 <바보 같은 사랑>이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수채화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지만 빨강 파랑 조잡한 ‘화투짝’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수채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그래도 ‘화투짝’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당성을 부여해야 하니까.
표/ 잘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딘가 모자라고 덜렁대고 조금은 악랄한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게 만드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울까.
노/ 사실 <거짓말> 할 때는 사람들이 대사가 너무 어렵다는 그런 말을 하면 ‘알아 들을 사람만 알아 들으라 그래’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그게 안 되요. 가령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라는 말을 하면 이 사람들은 ‘뭐? 사랑이란 사람이 교통사고를 냈데?’ 하고 물을지도 모르거든요. 순간순간 사랑의 정의니 멋진 말들을 쓰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지만 ‘밥 먹었니’ 같은 말에도 가슴이 아플 만큼, 어떻게 일상용어를 가지고도 짠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어요.
표/ 그래서 <바보 같은 사랑>에서는 ‘사랑한다’라는 말도 얼마나 아꼈게요. 참 이상하죠? 상황은 더 편안할 수 있는데 말 한번 꺼내는 건 더 성스러워지는 거.
노/ 대사를 최대한 아끼면서 배우와 감독을 믿었어요. 대사의 힘보다는 플롯에, 상황에 의해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표/ <거짓말>은 그래도 여유있는 사람들이었잖아요. 하지만 <바보 같은 사랑>의 배경은 철저히 대치되죠. ‘빡빡한’ 시장과 공장에 어떤 ‘여백’을 줄 수 있을까, 그게 제일 고민이었어요. 결국 옥희네 넓은 마당이나 상우집 앞의 긴 계단 또 음악 같은 것에서 그런 여백을 살렸죠. <거짓말>에서는 고급스런 첼로나 현악기를 주로 썼는데 이번엔 단순하지만 건반과 건반 사이의 여백이 느껴지는 피아노를 주로 썼어요.
노/ <거짓말>의 주인공들은 정말 모두 똑똑했던 것 같아, ‘너 이렇게 생각하지? 난 그걸 알아’ 식으로. 은수(유호정)가 스스로에게 ‘은수야, 너는 강해’라고 읊조리는 등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켜야 할 만큼 우리는 너무나도 주관적이었죠. 극중 인물에 우리 스스로가 빠져 있었던 거죠. 표 감독에게서 준희(이성재)를 많이 따오기도 했고 나도 ‘내가 성우(배종옥)라면, 은수라면 어떡할까?’ 하며 끊임없이 자문하기도 했어요.
표/ 하지만 <바보 같은 사랑>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했어요. 주변사람들조차 그들의 사랑에 개입하거나 편을 들지 않거든요. 그나마 우방인 미숙이(박원숙)조차 ‘정신 똑바로 차려’라는 말 이상의 개입이 없어요.
노/ ‘바보 같은 사랑’이란 마을에 이런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하자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며 글을 썼어요. <거짓말>은 내가 다가가면서 썼는데 <바보 같은 사랑> 속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통에 그걸 쫓아가면서 쓰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불륜

표/ 그러고보니 우리가 만든 작품이 다 윤리적으로 벗어난 작품이긴 해요. <아직은 사랑할 시간>은 AIDS 환자 이야기였고, <거짓말>도 유부남과의 사랑이었고, <슬픈 유혹>은 동성애, <바보 같은 사랑>도 불륜, 사실 선정적이라는 말도, 불륜을 포장했다는 비난도 들어요. 하지만 그 윤리라는 것이 사회적인 잣대가 아닌가? 사회적 윤리는 중요하게 여기면서 개인의 마음속 윤리가 깨어지는 건, 마음의 불륜을 저지르는 건 왜 쉽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노/ 이제는 우리가 개인의 생각에 대해 읽어줘야 할 때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키가 ‘당신은 왜 멜로만 쓰느냐’는 질문에 ‘한 개인이 사회를 대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전 그 말에 동의하거든요. 과거가 노동자라는 ‘집단’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젠 옥희나 상우 같은 한 개인의 ‘노동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요?
표/ 이 세상을 멸망시킬 방법은 원자폭탄 몇개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더 쉽게 생각하면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끝나는 게 아닐까?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데올로기가 끝난 시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윤리를 조금 흔들더라도 사람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그들도 ‘행복 할’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좋아요.


연민과 동정

표/ <거짓말>에서 준희는 성우를 왜 사랑하게 됐는냐는 물음에 ‘선밸 보면 내마음이 참 아퍼요’라고 말하고 <바보 같은 사랑>에서 상우는 옥희의 사랑 한번 못 받고 주눅든 모습에서 감정이 싹 트죠. <슬픈 유혹>에서 준영(주진모)은 사회에서 이제 퇴물 취급 받아가는 40대 문기(김갑수)의 처진 어깨를 사랑하구요. 물론 모든 동정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상대편을 염려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사랑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노/ ‘밥 먹었는지’ ‘아프진 않는지’가 걱정되는 마음, 영숙이가 리어카를 맡기고 터벅터벅 걷는 뒷모습에서 느끼는 감정만큼 절실한 게 있을까? 그냥 바라는 것없이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 같아요.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 헤어지면서 ‘너한테 할 만큼 다했다’라고 하더라구요, 그순간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싫어졌어요. 아, 이 사람은 자신이 해준 것만 기억하는구나. 사랑에서 해준 것만 기억하면 함정에 빠지게 되거든요. 받은 것만 기억하면 사랑이 얼마나 행복할까.


나이

표/ 난 나이든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거짓말>에서 영희(윤여정)가 이런 말을 해요. ‘사람이 늙는다는 거 참 불쾌하고 서글픈 일이다…, 얼굴에 진 주름이 서글픈 게 아니라, 이왕 늙을 거면 몸따라 마음도 늙지… 마음은 청춘인데 몸만 늙는 게 서글퍼. 엄마 나이, 쉰둘이다. 그런데 오늘 그 오빨 보는 순간 내가 꼭 열몇살 같더라. 그때 그 나이에 가졌던 꿈들, 그 생기발랄했던 모습들 호기심, 설렘 작지만 내깐엔 아팠던 기억들… 왜 그리 또렸한지….’ 사실 우리 나이 들어도 똑같이 무모하고 질투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할까봐서, 사랑이 또 찾아올까봐서 두려워하는 거 같아요, 우리가 만드는 드라마에서는 그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요.
노/ 요즘 <당신 때문에>라는 드라마 보면서 정말 느끼는 게 많아요. 부모에게 자식만으로 위로가 안 되는 부분이 있구나, 내 어머니가 사랑 때문에 나처럼 흔들리고 나처럼 아파할 수 있구나. 하는 것들 말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드라마들이 10대, 20대의 사랑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그 나이가 아니면 사랑이란 건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게 참 안타까워요.


공짜 글 , 공짜 TV

노/ 책 내자 하는 제안을 많이 받았었는데 시간이 없어요. 세상엔 소리내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그 사람들 이야기를 쓰기도 이렇게 빠듯한데 말이죠. 그리고 텔레비전은 공짜잖아요, 전 ‘공짜글’이 좋아요.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사실 아직까진 돈 생각해서 딴 작업하는 건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보 같다는 소릴 듣나?
표/ 아니, 사실 무슨 일이든 사사로운 욕심이란 게 생기면 바라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노/ 글을 쓰리라 생각한 순간부터, 드라마란 걸 쓰겠다 생각한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끊임없이 사람을 대변해야되는구나, 우리의 관점으로 누군가를 이야기에 다룰 수 있고 없고를 선택할 권리가 없구나, 누구를 손가락질하는 입장이 아니라,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설 수 밖에 없구나. 영원한 대변자가 이 직업이 가지는 멍에인 것 같아요.
표/ 참 ‘대변자’란 말이 좋은 것 같아요. 감독이란 직업은 ‘군림’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 끝없이 귀 기울여 줘야 하고 대신 말해줘야 하는 직업이죠.


사랑은 있다

표/ 인물과 상황에 따른 많은 변주가 있지만 결국 우리가 그려내고 싶은 건 ‘사랑’인 것 같아요. 모든 문학작품에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결국 ‘사랑’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노/ 김정수 선생님이 얼마 전에 ‘사랑은 상대를 위해 죽어 줄 수 있는 힘이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이야말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에요. 그걸 믿어요. 그런데 표 감독님, 사랑은 있죠?
표/ 그럼요, 사랑은 있어요. 이들이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은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 폭력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함에도 안쓰럽게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라고 한다. <슬픈 유혹> 때 였던가, 두 사람한테 함께 공부해나가는, 사이좋은 ‘학우’ 같다는 말을 했더니 그 말이 듣기 좋다고 했다. 부디 한 작품 한 작품 인간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는 이들의 노력이 ‘짝사랑’으로 남지 않기를, 이들의 바보 같은 사랑이 기다림으로 그치지 않고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어차피 짝사랑이란 없는 거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마음이 전해지기 마련이지.”(<내가 사는 이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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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 한국시에 대하여

한 교외강좌에서 3주 연속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됐다. 오늘이 첫날이었는데,  대략 '한국 현대시 개관'이란 제하의 강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좌이기 때문에(모두 여성이고 대부분이 주부) 가급적 평이해야 한다는 게 제1원칙이고, 웬만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요즘은 대학강의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요구되는 듯해서 유감스럽지만). 모두가 경청해주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요즘은 대학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게 만난다).

강의자료로 쓴 것 중 일부는 이미 6년전에 써두고 강의했던 것이어서 이번이 말하자면 '재탕'이었는데, 그간에 늘어난 건 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래저래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청'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 분열증적 읽기'에 포함돼 있었던 간략한 현대시사를 조금 보충해가며 다시 올려놓는다. 이 또한 '재탕'일 텐데, '이미지-버전'이란 핑계가 없지는 않다(능청과 핑계가 어쩌면 나의 왼팔과 오른팔인가?). 읽기에/보기에 편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군더더기말들을 더러 집어넣었다.

강의는 시 일반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20세기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시의 대표적 시인들을 거명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시사에 대한 간략한 리뷰만을 정리해둔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러시아에서 '토마스 엘리어트'의 두툼한 비평적 에세이 선집이 작년에 나왔었는데, 나는 그가 '티. 에스. 엘리엇'이란 걸 뒤늦게야 알았다. '토마스'란 이름이 너무 낯설었기에! 거기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평문 '전통과 개인의 재능' 등이 포함돼 있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책을 구입할 여유가 내겐 없었다. 참고로, 엘리엇은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비록 요즘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란 <황무지>의 시구를 읊조리는 중고생들을 만나기가 아주 힘들 뿐더러 젊은 시인들조차도 '열심히'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시의 위상>),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고로, 시작법이 아니라 작시법이 거의 부재하는 한국 현대시에서 '천재'가 나오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조건'이다. 그러니 '치기'나 '도취'로 시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론은 필수적이다. 새삼 확인해두자면, '시론'이란 시에 대한 로고스, 즉 논리를 갖추는 걸 말한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한국 현대시의 세 가지 원천으로 나는 민요, 한시, 그리고 번역시를 꼽는다. 김소월과 이육사는 각각 민요적 전통과 한시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시인들이다. 이상은 많이 밝혀진 바이지만, '한국어'라는 자연어가 아닌 '기호'로 시를 썼던, 보다 정확하게는 문학행위를 했던 시인/작가이다)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혼의 시), 이육사(정신의 시), 이상(기교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김윤식의 분류이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물론 미당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의 시업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다. 때문에 백석은 '제도로서의 문학'과는 거의 무관한 시인이다. 물론 그의 계보를 따르는 시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인 안도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이 '부족시'는 상대적으로 '국가'나 '민족'과는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던 그의 시를 보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참조)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참고로, 요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미당의 시들이 거의 빠져 있다고 한다. 문학 교과서에서 경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라고. 대개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곤 하므로, 역설적이지만 미당 시의 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다. 학생들에게 미당의 시를 안 읽히는 방법은 교과서에서 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물리도록' 혹은 '신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참고로, 한국시에 형이상학적 깊이가 결여돼 있다는 비판은 김우창 교수의 평문 '한국시와 형이상'을 참조할 수 있다(<궁핍한 시대의 시인> 혹은 <김우창 전집1> 참조. 나는 이 절판된 전집에 재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며 유감스럽다. 더불어 유감스러운 건 김화영 교수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도 절판된 채로 다시 구해보기 어렵게 된 것. 본격적인 시인론이자 시분석론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부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민집단'을 뜻하는 걸로 안다)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이른바, '미당스 패밀리' 되시겠다. 문단 용어로는 '미당 사관학교'라 하고).

 

 

 

 

 

 

 

 

한편으로, 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지난주 고종석도 자신의 연재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대평가'에 한몫한 것은 이 세 시인이 모두 훌륭한 인격으로 후배 시인들이나 학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들과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문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김현의 어투이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박인환, 김수영 등이 참여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한편, 미당학교의 '장학생'이었던 박재삼 등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울'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돼지들아!"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비록 그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이미지가 지원되지 않는군. 이게 언제적 유하인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소설을 쓰다가 급기야는 <삼국지>까지 옮기고 방송진행자까지 되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성공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미친짓은 아니다. 특히 요즘은.

 

 

 

 

 

 

 

 

 

그리고 기형도. 그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이 글은 전체가 사실 기형도론의 서론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선 얼마전에도 몇 자 적어둔 바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규모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이 전사(前史) 또한 제대로 된 규모로 재구성되어야 하리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0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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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정투쟁'과 민주화 시대: 호네트와 강준만

'인정투쟁'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주제의 원천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개인적으론 지젝 이전에, 읽히지 않는 헤겔을 그래도 읽어보려고 애쓰면서 자료들을 모으고 했던 건 순전히 이 테마에 관해서 뭔가 글을 써보기 위해서였다.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제목으로(조만간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유효한 프로젝트이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간명한 소개서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동녘, 1996)이고, 이와 관련한 연구서 서너 권을 나는 갖고 있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1949년생이고, 하버마스의 수제자로서 현재는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소위 3세대 프랑크프루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방한한 적이 있다). 물론 예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아니지만. '사회와 철학연구회'의 사회와 철학 시리즈 중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에 그의 대담이 실려 있다. 내용 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종합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잠시 옮겨본다.

질문: 당신은 <인정투쟁>에서 인정투쟁 개념이 푸코의 이론적 성과를 의사소통 이론 속에 통합시키는 개념적 장치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인정투쟁 개념으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통합시킬 수 있는가?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결함은 무엇인가?



 

 

 

답변: 나는 인정투쟁 이념을 통해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관심을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푸코의 관심사는 근본적으로 모든 형태의 공동체, 모든 형태의 사회를 항구적 투쟁의 일시적 휴전상태로 보려는 데 있다. 즉 푸코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은 투쟁이며, 기존의 질서는 단기적인, 일시적인 휴전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푸코에게는 투쟁의 동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분석이 결여돼 있다. 홉스와 니체의 유산을 이어받은 푸코는 사회에서 투쟁하는 이유를 자기본존을 위해서나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학적으로나 사회이론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아마도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의사소통적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는 하버마스의 이념에 헤겔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투쟁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인간은 개별자로서든 집단으로서든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한 사회 속에서 투쟁한다. 이 점이 바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인정투쟁 모델은 의사소통이념과 투쟁이념을 결합시킨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모델을 갈등이론과 충분히 결합시키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개인의 사회화 과정이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투쟁의 요소가 자주 사라지곤 한다. 하버마스는 부명 의사소통 능력을 과신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빈번히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때문에 요구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푸코의 최대의 결함은 그가 투쟁의 동기를 너무나 홉스적으로 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사회를 자기보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니까 호네트의 이론적 기획을 요약하면 푸코(투쟁이념)과 하버마스(의사소통이념)를 접속시키는 것이겠다. 덧붙여서, 그의 학문적 '아버지' 하버마스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하버마스에게서 성장한, 이제 어른이 된 제자이다. 그러나 배신자이거나 살부를 감행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성장한, 그러나 자립적 사고를 감행한 그의 아들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생각은 계승발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보완은 아니다. 결코 보완이나 단절은 아니다. 나는 하버마스가 기초한 프로젝트를 자립적으로 계속해서 사고한 것뿐이다..."

호네트가 푸코나 하버마스보다 더 멀리 가기를 기대해보지만, 아직 '후속타'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아 아쉽다(우리 '통신원들'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주제에 관하여 내가 당장에 보탤 말은 없고, 대신에 작년에 여름 <한겨레21>(05. 08. 11)에 실렸던 '우리시대의 마당발' 강준만 교수의 기고문 "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을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추려보겠다. 부제로 붙어 있는 건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였다(인용문에서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편 그의 책들이 예외없이 올해도 '행진'을 시작했는데, 첫타자로 나선 책은 <대중문화의 겉과 속3>(인물과사상사, 2006)이다. '사람들은 왜 인정투쟁에 빠져드는가"란 꼭지가 들어 있는데, 아마도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성싶다. 나머지 책들은 관련서들과 '인정'을 모티브로 한 처세서들.

 

 

 

 

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그러니까 인정욕구는 생물학적 본성은 아니더라도 이차적 본성쯤은 되는 듯하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내가 이 글을 치고 있는 PC방 옆자리들에도 초등학생들이 죽 늘어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나 같은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나 백수들 외에 PC방에 죽치고 있는 아이들은 대개 저소득층 자녀들인 듯싶다. 집에서 오락을 할 만한 처지가 못되는 수준일 테니까. 해서 이들의 안쓰러운 유해환경은 '오락'이 아니라 오락실의 '탁한 공기'이다. 한번이라도 동네 PC방에 들러본 부모라면 담배 연기 자욱한 이런 곳에 아이들을 내돌리지 않으리라. 요즘 떠오르는 화두대로, 건강의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반복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끝)

 

 

 

 

전반적으로 시의적절하고 발빠른 진단이다. 더불어 또다른 숙제까지 떠맡게 하는. 내가 임의로 골라본 참고서들이 숙제 해결에 도움을 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티티테인먼트와 더불어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염려하고 공부해야 할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06. 01. 24.

P.S. 이렇듯 자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나대로의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문득 반성하면서, 이성복의 '서시(序詩)'를 떠올려본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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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CSI 관련서적 목록

- CSI Comics라고 표시해놓은 것을 CSI Grapic Novel과 CSI Comics로 나누었습니다.

Grapic Novel : 우리의 개념으로는 '만화'라고 부르는 것을 미국에서는 코믹스와

그래픽 노블으로 나누어 부른다. 둘다 그림 속 주인공들의 대사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은 같으니, 그래픽 노블은 코믹스에 비해 분량이 긴 것을 주로 일컫

는다. 성인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많으며, 실제로 코믹스에 비해 가격도 훨씬

비싸다.                   -무비위크 184호에서

- '*' 표시가 달린 항목은 출간 예정인 서적입니다. 출간예정일이 같이 적혀있습니다.

- 만들어놓고 보니 지름신 강림용 가이드로 보이는 이유는-__-);;

 

 

 

CSI : CRIME SCENE INVESTIGATION   by Max Allan Collins

SIN CITY(October, 2002)                         악의 도시  

COLD BURN(April, 2003)                          냉동화상

DOUBLE DEALER(April, 2003)                   이중인격

BODY OF EVIDENCE(October, 2003)        증거의 덫

GRAVE MATTERS (October, 2004)            무덤의 증언

BINDING TIES (April, 2005)                     죽음의 끈

*KILLING GAME (October, 2005)             (국내미출간)

 

 

 

 

 

CSI : MIAMI    by Max Allan Collins

FLORIDA GETAWAY (August, 2003)        플로리다 겟어웨이

HEAT WAVE (April, 2004)                        다크 인사이더

*THE BODY SYSTEM (December 27, 2005)   (국내 미출간) by Donn Cortez

 

 

 

 

 

CSI : NEW YORK

*DEAD OF WINTER    겨울의 죽음 (September, 2005)  by Stuart M.Kaminsky

*BLOODY MURDER (February, 2006) by Max Allan Collins

 

 

 

CSI Grapic Novel

작가명은 특별한 표기가 없는 경우 스토리라이터-일러스트레이터 순으로 정렬되어있습니다

[LV] SERIAL (August, 2003)  by Jeff Mariotte, Gabrill Rodriguez, Ashley Wood

[LV] BAD RAP (April, 2004) by Max Allan Collins, Gabriel Rodriguez, Ashley Wood

[LV] DEMON HOUSE (October, 2004) by Max Allan Collins, Gabriel Rodriguez, Ashley Wood

[LV] DOMINOS (March, 2005)    by Kris Oprisko, Gabriel Rodriguez, Steven Perkins

* [LV] SECRET IDENTITY (October, 2005) by Steven Grant, Gabriel Rodriguez, Steven Perkins

 

 

CSI Comics

[LV] THICKER THAN BLOOD (August, 2003) by Jeff Mariotte, Gabrill Rodriguez, Ashley Wood

[MIAMI] SMOKING GUN (October, 2003) by Jeff Mariotte, Jose Aviles, Ashley Wood (Illustrator), Anthony E. Zuiker (Creator), Kris Oprisko (Editor)

[MIAMI] BLOOD/MONEY (October, 2004) by Kris Oprisko, Renato Guedes, Stephen Perkins

 

 

Etc.

CSI : COMPANION (August, 2004)  by Mike Flaherty, Corinne Marrinan

 

 

CSI를 재미있게 보셨다면..

죽은자들은 토크쇼 게스트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 마이클 베이든의 법의학 이야기  -마이클 베이든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로버트 K.케슬러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 : 법의학과 과학수사  -브라이언 이니스

한국의 시체, 일본의 사체  -문국진, 우에노 마사히코 공저

법의학의 세계  -이윤성

파리가 잡은 범인 -M.리고프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범죄의 현장 -  리처드 플랫

프로파일링 - 브라이언 이니스

돌하우스 머더스 - 토머스 P. 모리엘로, 앤 다비

수사와 과학 - Richard safersteein

The Casebook of Forensic Detection: How Science Solved 100 of the World's Most Baffling Crimes - Colin Evans

Forensic Science of CSI -Katherine M. Ramsland

 

 

 

 

 

 

 

 

 

 

출처 : 네이트 CSI 클럽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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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달의 제단 "

아름답고 고즈넉한 효계당, 그런곳에서 살고 싶다

아름답지만,  오늘의 효계당으로 있기 위해,  굴절되고 왜곡된 과거를 강요하고,

열녀문으로 치장한 채, 효계당은 아름답고 위엄 있는 듯 지금도 서 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위선적인 과거만큼이나 저마다의 상처를 저 안 깊은 곳에 묻어 둔 채, 그들의 영혼은 결핍되고 그들의 관계는 굴절되어있다

치유되지 못한 자신의 상처가 세계 속에서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엿볼 수 있다

쓰러져가는 종가를 지키려는, 다시 일으키려는 의지가 강한 종주인 할아버지,  그에 비해 여리기만 하고 약해 보이는 현재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서자 종손 상룡과의 심리적 갈등, 자식이 없어 남편을 다른여자에게 빼앗기고 결국 다리병신 딸만 낳아 쫓겨나다시피한 달시룻댁 ,  불구다리에다 생산이 불가능한 태를 가졌으며, 상룡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딸 정실....... 

< "잘못했다, 상룡아...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상룡아... 내는 그냥 효계당에 살게만 해주믄...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을게. 니가 내를 가지고 놀든지... 내를 걸레라꼬 욕하든지... 내가 니한테 머신 할 말이 있겠노."
정실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 거대한 살 무더기에 깔려 정신이 아뜩하도록 숨이 막혔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천하 병신 권정실 앞에서 울고 불었으니 사실 죽는 편이 나았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죽기를 바라는지 살기를 바라는지, 사랑하기를 바라는지 미워하기를 바라는지. 바라기로는 오로지 정실에게서 육체적인 쾌락만 취할 수 있기를 원했건만, 천하 병신 정실조차 다소곳이 동의한 일이었건만, 그마저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 본문중에서 - >

정실의 불임의 자궁이 어떻게 생명을 잉태 하게 되는지.......감동이다 .......정실의 상룡에 대한 지고지순한 순정이  자연의 거대한 질서를 움직이게 했던 걸까? 

아마도 정말 소설속의 표현대로 효계당의 지금은 죽어 귀신이 되어 버린 마지막 종손며느리가 정실의 차가워진 자궁을 잉태 할 수 있도록 따뜻한 기운으로 열어 주었던 걸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성룡의 母를 사랑한 남편에 대한 복수인가?

효계당(종주, 종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인가? 

그들이 효계당을 배경으로 엮어가는 모습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제목이 주는  흡인력과 겉표지가주는 마법적인 색채에 이끌어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  쿨한 사람, 쿨한 관계, 쿨한 소설, 쿨한 영화들이 이 세상을 휩쓸어 버린 것이 어느 시점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자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 버렸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남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도 싶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 해도. - 작가의말중에서 -   >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렸고, 맹렬히 불타오르는 재조차 남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도 싶다는 작가의 말에 절대 공감하며, 소설의 엔딩에서 깜깜한 밤, 밤의 장중한 위엄 속에 서 있던 효계당이 붉은 화염 불길 속에서 재로 사그라 들어 갈때의 그 충격!, 그 충격이 안타까움으로, 안타까움이 서운함으로 , 결국은 안위로 잦아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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