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사랑, 가족
최석태.최혜경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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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가 이중섭, 넘치는 가족애와 사랑의 화신


   이중섭이라는 작가는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대중적인 화가입니다. 그런데 이중섭을 아는 사람들 중에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아껴서 그를 아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작 논란 때문에 그이 이름을 알게 된 분들이 의외로 많은 화가이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중섭의 작품이 어떤지 평을 할 입장도 아니고 솔직히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그의 작품을 봐도 뭐 그렇게까지 훌륭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평론가나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고 훌륭하다고 거의 억압에 가까운 평을 쏟아내면서 이걸 모르면 무지렁이인 것처럼 하니까 적당히 장단은 맞춰야 하겠으나 저는 그냥 대충 그린 쉽게 재밌는 그림 정도로 느껴집니다.


   제가 이중섭 작가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대단하다라고 느끼는 지점은 그의 작품에 있는 아닙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절절한 그의 가족사랑에 있습니다. 노 여사도 몸서리를 쳤을 만큼(아, 노 여사는 원래 그런 걸 싫어합니다만...), 손발 정도가 아니라 목덜미가 빳빳해질 정도로 오골오골 한 표현들이 넘쳐납니다. 감정 과잉도 이런 과잉이 없어요. 이 양반 완전 애정결핍인데?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개중에 넘치는 감정을 배제하고 비교적 이성적으로 쓴 편지글의 일부분을 보면 작가가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림을 그리는 태도가 어떠한지 엿볼 수 있습니다.


"아고리는 그대처럼 멋지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오직 하나로 일치해서 서로 사랑하고, 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참인간이 되고, 차례차례로 훌륭한 일(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는 것, 계속해서 대작을 제작하는 것)을 하는 것이 염원이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아내를 진심으로 모든 걸 바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소. 독신으로 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고리는 그런 타입의 화공은 아니오. 자신을 바르게 보고 있소. 예술은 무한의 애정 표현이오. 참된 애정으로 차고 넘쳐야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p124


   이 양반의 엄청난 오글오글 글 중에 그나마 엄선하고 엄선한 부분입니다. 제가 옮겨 적으면서 그나마 참을 수 있을 정도의 글 말입니다. 참, 여기서 아고리는 중섭 작가 자신을 표현하는 애칭입니다. 가족사랑에서 민족 사랑으로까지 나아가는 김중섭 작가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라고 하기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작가의 특징이 좋습니다.




#2. 죽을 만큼 사랑하는 가족도 포기하게 만든 작가로서의 상실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지점이 바로 작가로써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천재가 무너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형편이 한없이 나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림쟁이가 할 수 있는 변변한 일은 없었을 겁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봉양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겠지요. 이런 피난통에 가난하고 고단한 상황에 놓인 중섭 가족은 그 와중에도 끈끈한 가족애로 버텨냅니다. 부인 마사코는 그때가 비록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어 행복했다고 회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피난민이 겪는 생활고는 끝이 없었고, 고민 끝에 부인 마사코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이때부터 이중섭 작가가 헤어져 지내는 부인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시작됩니다. 해방 직후 일본인 부인과 결혼한 대한민국 남자다 보니 함께 일본으로 건너갈 수 없는 형편에 있던 그는 그리움을 전하고자 엽서에 그림과 글을 써보내게 됩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던 유일한 희망은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어 작품이 비싸게 팔려나가고 작가로써 성공해서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는 기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떳떳하게 가장의 역할을 하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기가 시기였던지 두차례의 전시회는 완전 실패로 끝납니다. 유일한 희망이 꺾인 작가는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고 사모하는 가족도 포기할 만큼 깊은 좌절을 맛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 이후로 정상궤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병원을 전전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앙리 루소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천재화가는 결국 그렇게도 애타게 고대하던 가족과의 상봉을 이루지 못 합니다. 이 부분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솔직히 저였다면 성공, 실패를 떠나 가족을 찾아갔을 겁니다. 그 어떤 것보다 가족에게는 남편이, 아빠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더 중요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면이 좀 안 서기는 했겠습니다만 자존심보다는 실존이 중요하죠.


   천재적이고 비범한 예술가들은 대체로 이중섭 화가처럼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낙심 또는 스스로의 정서적 민감함 때문에 요절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 분도 마찬가지 형국인데 그때 만약 전시회가 잘 되었더라면 가족과 상봉하고 오랫동안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3. 이중섭 작가를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초반의 평전 부분


   저처럼 이중섭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이름뿐이고 황소 같은 유명 작품 한두 개뿐인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의 초반에 이중섭 작가 전반에 대한 평전이랄까? 개괄적인 해설이 나옵니다. 이 부분으로 작가의 생애 전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어서 상당히 좋았습니다. 짧은 내용에 작가의 성장기부터 환경, 형편, 작품 활동 등등 잘 간추려 소개하고 있어요.


   당연히 중간중간 거의 찬양에 가까운 내용도 있어서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글을 쓰신 분이 이중섭 작가에게 많은 애정과 사랑을 가진 분일 테니 당연한 것입니다만 찬양 일변도랄까?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저는 이 분의 그림 자체가 그리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유화 부분에서는 좀 더 좋게 느끼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몰라서 그런 거다'라는 부분에서는 좀 껄끄러웠습니다. '에.. 저는 잘 모르기는 해도 폄하하지는 않아요~~'라고 변명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니까요.


   사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그림을 보고 별로라고 평하는 건 폄하가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에게는 별로였던 거지요. 소위 전문가들이 보기에 훌륭하니 모두가 그렇게 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아주 엉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죠. 애정이 지나치면 역효과가 납니다. 여하튼 저에게 이 양반 그림은 그냥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의 삶은 무척 안타깝고 애달프고 그랬습니다. 이 분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이런 애잔한 아픔이 잔잔히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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