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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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내 취향 저격 소설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문체도, 완벽한 기승전결을 따르는 구성도,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니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같은 책에서 자꾸만 감동받고 눈물이 맺히고야 마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더없이 멋진 소설이었다. 실제 저자는 인터뷰에서 “우연히 과학을 접하면서 보이는 세계가 조금 바뀌거나 시야가 조금 넓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집필 계기를 밝혔다. 과학이라는 주제에 기대어 눈앞의 세계가 차츰 명징해지는 일,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의 통찰을 길어올리는 일. 이 소설은 그런 결의 시간들을 내게 선물했다.


오늘 독서모임에서 심리학자가 보는 세상은 좀 다르냐는 질문(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그렇다.)을 들었다. 특별히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려는데 현옥 언니가 절친의 시선으로 대신 답을 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때가 많다,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다른 부분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또 그것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구 행성물리학 박사 출신인 저자만이 가진 과학자로서의 자아가 한껏 빛을 발한 케이스다.


📍“반대로 묻고 싶어요. 다들, 왜 자기들이 사는 별의 내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 안쪽이 어떻게 되어 있나 궁금하지 않은지. 표면만 보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모르는데.” (46p)


📍나도 귀를 기울여보자. 말은 잘 못해도 귀는 기울이고 있자. 그 사람의 깊은 안쪽에서 뭔가가 조용히 내리며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71p)


자꾸만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만 같은 헛헛한 일상을 헤매고 있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눈앞에 과학자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툭, 우연처럼 떨어진다. 갇혀 있던 생각의 틀이 넓어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바라보는 생소한 변화 앞에서 ‘위로’가 빛난다. 지구의 내핵, 은빛 숲에 내린다는 은빛 눈의 소리를 마치 눈앞에서 보고 듣는 것만 같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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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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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물농장]을 읽었다. 역사적 배경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저 동물들의 이야기로 접근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가슴 한 켠이 욱씬거린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책 리뷰는 별도로 남기는 걸로)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소설로만, 픽션으로만 읽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됐다. 태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자고 할 때만 해도 참고 읽었다. 지하 벙커에 모여 진지하게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책을 읽다말고 책 첫 장에 적힌 리처드 닉슨의 연설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1971년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나 검색부터 시작했다.


​<개인적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나는 인구통제의 수단으로서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제한 없는 낙태 정책 또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낙태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나의 개읹거 믿음에 어긋난다. 여기에는 앚기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포함된다. 태아 또한 법뿐만 아니라 유엔이 상술한 원칙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권리를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닉슨 / 샌클레멘테, 1971년 4월 3일>


실제 저자는 리처드 닉슨의 이 연설 이래, 약 반년만에 책 한권을 완성했다. 바로 이 책 [우리 패거리]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실린 소설. 당시 얼마나 큰 화제가 되었을 지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해당 작품에 대해 주고 받는 말이 녹음된 파일이 공개되었는데 ’필립 로스는 끔찍한 도덕적 문둥병자‘라는 언어로 비난을 쏟아내고 있어 책 속 대통령 ’트리키‘ (사기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보다 더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기도 했다. 3년 후인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재선을 위해 민주당 본부에 침입, 도청 장치를 설치다가 들킴)으로 리처드 닉슨은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자진 사임하였다고.


물론 이런저런 이야기 모두 무시하고 소설로만 읽어도 좋다. 굳이 리처드 닉슨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많은 인물, 국가나 사회, 사건을 각자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므로. 1971년의 소설이 2024년인 지금에도 전혀 이질감 없이 읽힌다는 것. ’이런 때가 있었다고?‘ 혹은 ’픽션이니까 가능하지!‘가 아니라 ’아이고 현실은 더 할 텐데?‘ 라는 마음으로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특별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도 그랬으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구든 그 이상의 감정과 생각이 오가지 않을까.


문학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의식을 열어주는 글들을 선호한다. 그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들을 열고 그 세계로 직접 발을 딛게 만드는 일. 책 한 권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문고리에 손을 댈 수 있다.


동물농장의 정치 풍자가 마음에 와 닿았다면 이 책은 더욱 더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직위에 부여된 존엄성, 그 갑옷을 깨부수고 싶다던 저자의 말이 인상깊다. 출간으로부터 50년이 지나 이 책이 지금의 내 손에 있다. 여전히 다양한 갑옷을 입고 있는 무능한 지도자들을 향해 우리가 겨냥할만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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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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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1권 [검은 얼굴의 여우]를 얼마 전 읽었다. 2권인 [하얀 마물의 탑]은 아직. 3권인 [붉은 옷의 어둠]을 먼저 읽었다. (특별히 문제는 없다.) 제목 속 색상으로도 교묘하게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다. 검은 색의 1권은 탄광을 배경으로, 하얀 색의 2권은 등대를 배경으로, 붉은 색의 3권은 암시장을 배경으로 한다. 제목의 색감만으로도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예상 가능케 하는 것도 나름 매력적이다.


진행 순으로 따지자니 1권에 바로 이어지는 하야타 이야기였다. 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쯤(1권) 대학시절 동기 신이치의 연락을 받는다. 붉은 미로라고 불리는 암시장에 출몰하는 괴인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달라는 부탁이 이어진다. 전쟁 동안 초토되었을 거리에 거대한 암시장이 판을 치고 있다.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웠을 터전에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사건과 임산부 피습사건을 마주하게 된 하야타는 이번에도 사건을 잘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인지 초반부터 흡입력 있는 전개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엄청난 몰입도에 비해 다소 아쉬운 마무리가 조금 아쉬웠지만 (1권도 그런 경향이. 이 저자의 특징인걸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본인으로써 저자가 해당 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엿보는 것도, 광복을 맞이했던 당시 우리나라와 달리 세계대전에서의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도 전반적인 스토리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단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재미에 이끌려 하야타의 다음 행선지는 무슨 색채로 다가올 지 조금은 기대도 해 본다(곧 네 번째가 나온다고 한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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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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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스한 분위기의 호러와 미스터리를 애정하는 사람이라면 미쓰다 신조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나는 이 책으로 이 작가를 처음 만났다. 첫인상은 꽤 신선했다. 두꺼운 두께가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초반부터 휘몰아치듯 독자들을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끌고가는 필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다만 단순 미스터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루고 있는 시대 배경이나 역사적 사실(조선인 강제징용) 때문일 터. 아니나 다를까,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이름이 함께 붙어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일본의 한 탄광에 엘리트 출신의 젊은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가 등장한다. 당시의 암울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놓인 젊은 지식인의 낯선 탄광부 생활. 마음 먹었어도 감당하기 힘든 강도의 노동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낙반사고와 더불어 목을 매고 죽은 자들이 발견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실치 않은 사건으로 마을의 분위기가 일순간 흐트러지고, 사건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하야타의 총명함이 (탐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을 발한다.


일본 작가가 썼기 때문에 그의 글을 통해 써내려간 식민지 시절 이야기, 조선인의 복수극 이야기가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인지 모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아쉬운 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예상된다. 허나 이 책은 역사 기록물이 아니므로 ‘소설’이라는 틀에 입각하여 읽으면 크게 마음에 담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과거를 돌아보는 태도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해 본다.


신선한 책을 만났다.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다음 작품 <백마의 탑>에서는 또 무엇을 만날 지 궁금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다른 작품에까지 호기심이 가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와의 첫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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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말하는
오츠 슈이치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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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아이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해야 했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나의 첫 설명은 몹시도 무미건조했다. 심박수가 멈추고, 눈이 감기고, 이내 우리의 신체 전부가 활동을 멈추는 그저 과학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었다. 알고 있다. 죽음에는 그렇게 납작한 정의 말고도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그 후로 아이와 죽음에 대해 다양한 방향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막연히 두렵고 무섭고 슬픈 것이었던 죽음이 오늘날 아이에게는 무엇으로 정리되어 있을까.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누구나 반드시 겪어내야만 하는 죽음. 회피하기보다는 직면해야 할, 삶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한 죽음 말이다.


우리는 죽음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나의 1년 뒤, 10년 뒤를 떠올리듯 시간적으로 먼 곳에서 다가올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늘 주변에 말한다. 우리는 매순간 죽어가는 중이라고. 죽음은 예고하지 않고 다가온다. 이 길을 나선 그대의 심장이 갑자기 덜컥 문제를 일으켰는데 다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죽음을 맞는다. 길을 나서기 직전 마주한 풍경과 사람이 마지막인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웰빙 (well-being, 잘 사는 것)만큼이나 웰다잉(well-dying, 잘 죽는 것) 문제도 핵심 연구 주제로 자리매김 했다. 죽음도 결국 삶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죽음을 다루는 책들은 많다. 그럼에도 ’후회‘와 연결된 죽음 이야기가 전하는 울림은 또 다른 온도로 다가왔다. 후회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인간은 후회를 먹고 사는 생물이다.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를 꾸려나갈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당면한 죽음 앞에서 조금의 후회도 없는 사람도 있지만 극 소수인 현실. 우리는 앞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 그들의 후회를 배운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알려주는 인생의 후회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지도 모른다.


결국 저자는 후회와 죽음을 통해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호소한다. 실체가 있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용기내어 꺼낸 후회들을 부디 허투루 흘려 넘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 후회들 중에는 당신이 놓치고 있는 생의 중요한 열쇠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 스물 다섯가지의 후회 내용은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통해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그 중 저의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두 가지만 공개하자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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