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거두는 시간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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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퍼진 그물을 켜켜이 거두어내는 시간을 그려본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아 심해까지 뻗어있는 그물을 직접 거두는 마음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까. 참회와 속죄.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어쩌면 그 시간이 멈추지 않게 하는 마음은 참회나 속죄가 아니라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대필 작가 윤지는 어느 날, 이모의 자서전 작업을 맡게 된다. 녹취를 위해 만난 첫날, 윤지는 깨닫는다. 이모가 남기려는 자서전은 유명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마 모른척할 수 없는, 아무리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아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들에 대한 사죄임을. 이모와 만남을 이어가는 동안 윤지에게 민혁이라는 남자로부터 한 통의 연락이 닿는다. 무심코 전해 들은 선재와 수진이라는 이름. 완전히 일그러지고 구겨졌던 과거가 눈앞에 두서없이 펼쳐지고, 윤지는 깊고 깊은 심연에 가둬두었던 시간들을 마주하고 만다. 전혀 닮은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모와 윤지의 생은 꽤 많이 닮았다.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품었고, 잊고 싶을 만큼 나쁜 마음을 품었고, 누군가를 향한 독을 쏟아부었고, 끝내 그것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이 되었다. 그럼에도 생은 그들에게 기회의 손길을 내민다. 참회, 속죄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구겨진 종이를 반듯하게 펼쳐 다시 진심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용기를 빌려준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사랑의 양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글쎄, 나는 사랑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라 믿는다. 잘못을 덮지 않고 꼿꼿하게 기억하고 속죄하는 마음, 스치는 눈길만으로도 소스라치는 떨림, 상대를 위해 기꺼이 그림자 같은 사람이 되는 용기, 나와 같지 않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그늘,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드는 희생, 뜨겁게 타오르는 동시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욕망 ... 그 모든 마음들로부터, 그 모든 사랑으로부터 우리 모두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누구 하나 그런 시절, 그런 기억, 그런 마음 없었던 적 있던가.

단숨에 한 권을 통 째로 읽어 내렸다. 책장을 덮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크게 숨을 푹 내쉬는 것을 느낀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내 숨소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다양한 사랑들을 그려본다. 각자의 다양성이기도, 내 안에 담겨있는 무수한 다양성이기도 한 그것들을 마음 가득 안아본다. 용기를 거두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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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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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인공인 카논, 본인을 닮았다는 설명과 함께 보내온 사진 한 장. 여성의 옆얼굴을 그린 유화. 제로라는 이름의 작가가 그린 작품, <늦여름>. 카논은 생각한다. 내 옆얼굴이 저렇게 생겼나. 알 길이 없다. 어릴 적부터 깊이 품었던 그림에의 열망과 향수가 피어난다. 연이어 무언가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광고 회사에 다니다가 불미스러운 소문에 등 떠밀려 퇴사를 감행한 카논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간다. 정규직 입사를 걸고 특집 기사를 하나 맡게 되는데, 테마가 심상치 않다. 뱅크시처럼 얼굴도 본명도 그 외 무엇도 알려지지 않은 화가 나유타. 인터넷상에서 그(그녀)는 '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데, 그(그녀)의 그림 속 모델은 예외 없이 죽는다는 이유에서다. 그(그녀)가 그린 작품 속 모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카논은 취재를 시작한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만날 길이 없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죽은 이들의 유가족들 하나 둘 만나기 시작하면서 카논은 혼란스럽다. 함정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엄습한다. 누군가 일부러 자신을 여기까지 등 떠밀고 있었던 것만 같다. 생과 사, 예술적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존재, 알 듯 말 듯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미스터리한 서사들.

분명 인생에선 누구에게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찾아온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한 점에 집결하여, 나는 이걸 위해 태어났던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유년 시절 나를 살리기 위해 가차 없이 그어졌던 상처의 자국. 그걸 그에게 드러내며 나는 순수하게 실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려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라고.

제로의 늦여름, 403p

영화감독으로서의 저자가, 저자의 작품이 뇌리에 강렬해서 최대한 [러브레터]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책장을 펼쳤었다. (중간중간 러브 레터의 면모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들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전작을 떠올리지 않고도 편안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한 명의 장르 작가를 마주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 흡족했다. 작가의 첫 도전 장르라고는 하지만 장르물이기 이전에 사랑과 청춘, 생과 사 혹은 우연과 필연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시 제로로 돌아온 가세의 손끝에서 피어날 두 번째 늦여름 그림을 막연히 그려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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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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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손에 붙들 때와는 전혀 다른 색채가 덧입혀지는 것을 느낀다. 띠지에 쓰인 을지로 청년 예술가도, 상실에도 어두워지지 않는 젊음의 빛도 그다지 선명하게 각인되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내게는 한없이 취약하고 여린 이 세상 모두의 크고 작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자 누구보다 가장 솔직한 사랑 이야기로 각인되었다.

특히 좋은 문장들, 인상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전반적인 컨셉이나 소재는 어슴프레 몽환적이기도, 어색하고도 낯설기도, 그런 연유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중간 멈칫 하게 만드는 어떤 걸림돌들이 무색하리만치 예쁜 말, 솔직한 표현들이 많아서 좋았다. 솔직함으로 무장한 글, 과장같고 억지같은 소재들 사이사이 진짜를 촘촘히 숨겨두고서 뽀빠이 과자 속 별사탕을 탐닉하듯 독자들이 그 빛들을 찾아내길 바라는 소설 같아서 유쾌하고 또 아련했다.

모두가 괴짜같다. 분명 여자아이였지만 엄마가 떠남과 동시에 남자아이가 된 휴일, 어딘가에 진득하게 머무르고 싶지만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엘, 남자를 사랑하고 습관적 유턴이 곧 삶인 휴일의 아빠, 그의 매니저이자 연인이자 안내견이기도 한 황실장,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나 어느덧 각자의 빛을 찾아 쌩뚱맞은 미래를 맞는 동료와 선배들 ... 이별, 상실, 배신, 죽음 같은 속절없는 슬픔 앞에서 무엇 하나 슬프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 그들이어서, 그들 안에서 가능할 법한 어떤 이야기.

몽롱하고 달뜬 가슴으로 책을 덮는다. 작가는 등단하면서 '한 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정확히 목표한 바를 이루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한 줄 메시지로 결코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요약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자꾸만 구구절절 구질구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누고 부풀리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그것이 이 작가가 쓰는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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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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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히 되짚어 본다.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적어도 최근에는 읽어보지 못했다. [토끼들의 섬]은 책에 실려있는 11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이다. 사실 다른 10편의 단편들도 몹시 인상적인 소재와 기괴한 뒤틀림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펼쳐지는 글이라 모든 단편들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제목으로 책 제목을 설정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평범한 일상인 것 같지만 여간해서는 그 일상적 범주에 집어넣을래야 넣을 수 없는 독특한 이질감이 책 전반에 젖어들어 있다. 이것이 특유의 분위기로 뒤엉켜 일종의 불투명하고 탁한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매캐하고 답답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경하고 신선한 느낌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궁금증이 일어 찾아본 작가 인터뷰에 "외곽, 변두리, 경계 ...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는 언급이 시선을 붙잡는다.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 그 미세하고도 결정적인 틈새에서 저자만의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가 재창조된다.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은 그 낯선 공간을 통해 젠더, 공간, 계층, 환경, 역사 등에서 투박하게 조각난 이분법적 관념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남성과 여성, 도시와 주변(변두리), 자본가와 노동자, 자연 개발과 환경 보호, 기록된 정서와 기록됮 못한 미시 서사 ... 그것들 너머로 밀려나 있는 문제들, 소외되고, 외면 당하고, 무시되었던 대사들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튀어나오면서 저자만의 세계는 어쩐지 조금 더 단단한 우주를 다져내는 것도 같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만나게 될 '개인의 서사'들이 궁금해진다. 촘촘하게 늘어선 열 한 편의 환상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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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트 영매탐정 조즈카 2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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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들어 범죄심리학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학부생 때부터 염원했던 본교 본과에서의 범죄심리학 강의. (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라 듣고 싶었어요) 그 첫 개설을 내가 맡은 것은 실로 큰 행운이자 복이라 믿는다. 다른 대학에서 이미 범죄심리학을 강의했지만 본교에서의 강의는 그 의미와 무게가 전연 다르다.

첫 강의를 앞두고 고민들이 많았다. 학생들에게 요구할 과제도 수많은 고민들 중 하나였는데, 그 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상상 글쓰기였다. 범인을 추적하거나 범죄행동을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같은 단편적인 접근은 시시했으므로 반대가 되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의 입장에서 하나의 사건(지정해 주는 유형의 범죄 내에서)을 저지를 것. 철저히 범인이 되어 범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무수한 일련의 과정을 상상해 볼 것을 요구하고 싶었다. 글쓰기 능력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마음을 뼛속까지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끝내 이번 학기에는 무난한 과제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콕 저장해 둔 과제. (언젠가는 시도해 보는 걸로)

갑자기 다짜고짜 왜 과제 이야기를 하느냐. [영매탐정 조즈카]의 속편인 이 책이 바로 내가 상상한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방식이 공개되어 있다. 반대로 탐정에게 추적 당하는 범인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명 도치 서술 추리소설인 셈.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이 아니라 신선하고 또 간접적으로나마 범인이 되어보는 매 순간의 짜릿함과 불안함 같은 묘미도 있었다. (이쯤 되니 꼭 그 과제는 시도해 봐도 좋겠다.)

내용을 실컷 읽고서야 뒤늦게 제목을 기웃거린다. invert가 곧 '~을 거꾸로 하다, 뒤바꾸다, 반대로 하다, 반전시키다'를 의미한다. 도치 서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촘촘하게 심어둔 반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퍽 만족스럽다. 개인적으로 전형적인 순정만화에 부합하는 표지라던가 '영매'라는 단어에서 취향에 부합하지 않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입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장르소설을 애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인기가 높겠다는 예상도 조심스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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