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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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물농장]을 읽었다. 역사적 배경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저 동물들의 이야기로 접근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가슴 한 켠이 욱씬거린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책 리뷰는 별도로 남기는 걸로)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소설로만, 픽션으로만 읽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됐다. 태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자고 할 때만 해도 참고 읽었다. 지하 벙커에 모여 진지하게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책을 읽다말고 책 첫 장에 적힌 리처드 닉슨의 연설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1971년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나 검색부터 시작했다.


​<개인적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나는 인구통제의 수단으로서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제한 없는 낙태 정책 또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낙태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나의 개읹거 믿음에 어긋난다. 여기에는 앚기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도 포함된다. 태아 또한 법뿐만 아니라 유엔이 상술한 원칙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권리를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닉슨 / 샌클레멘테, 1971년 4월 3일>


실제 저자는 리처드 닉슨의 이 연설 이래, 약 반년만에 책 한권을 완성했다. 바로 이 책 [우리 패거리]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실린 소설. 당시 얼마나 큰 화제가 되었을 지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해당 작품에 대해 주고 받는 말이 녹음된 파일이 공개되었는데 ’필립 로스는 끔찍한 도덕적 문둥병자‘라는 언어로 비난을 쏟아내고 있어 책 속 대통령 ’트리키‘ (사기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보다 더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기도 했다. 3년 후인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재선을 위해 민주당 본부에 침입, 도청 장치를 설치다가 들킴)으로 리처드 닉슨은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자진 사임하였다고.


물론 이런저런 이야기 모두 무시하고 소설로만 읽어도 좋다. 굳이 리처드 닉슨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많은 인물, 국가나 사회, 사건을 각자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므로. 1971년의 소설이 2024년인 지금에도 전혀 이질감 없이 읽힌다는 것. ’이런 때가 있었다고?‘ 혹은 ’픽션이니까 가능하지!‘가 아니라 ’아이고 현실은 더 할 텐데?‘ 라는 마음으로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특별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도 그랬으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구든 그 이상의 감정과 생각이 오가지 않을까.


문학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의식을 열어주는 글들을 선호한다. 그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들을 열고 그 세계로 직접 발을 딛게 만드는 일. 책 한 권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문고리에 손을 댈 수 있다.


동물농장의 정치 풍자가 마음에 와 닿았다면 이 책은 더욱 더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직위에 부여된 존엄성, 그 갑옷을 깨부수고 싶다던 저자의 말이 인상깊다. 출간으로부터 50년이 지나 이 책이 지금의 내 손에 있다. 여전히 다양한 갑옷을 입고 있는 무능한 지도자들을 향해 우리가 겨냥할만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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